반도체·바이오 대비 기술난도 낮고 진입 장벽도 낮아
가격 경쟁으로 수익성 담보 쉽지 않은 배터리산업
‘중국 굴기’ 안 통하는 초격차 기술 확보만이 살길

[비즈니스 포커스]
삼성SDI 연구원들이 경기 수원시 전자소재연구단지에서 배터리셀(2차전지의 최소 단위)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삼성SDI 제공
삼성SDI 연구원들이 경기 수원시 전자소재연구단지에서 배터리셀(2차전지의 최소 단위)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삼성SDI 제공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가석방돼 출소한 지 10여 일 만에 삼성이 240조원대 대규모 투자 계획을 공개한 가운데 배터리 투자에 대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아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다.

삼성은 2023년까지 3년간 반도체·바이오·차세대 통신 등 미래 전략 사업에 240조원을 신규로 투자한다고 8월 24일 밝혔다. 이는 2018년 발표한 180조원 투자 계획을 뛰어넘는 단일 기업 사상 최대 규모다.

삼성은 메모리 경쟁력 절대 우위를 유지하고 시스템 반도체 분야 글로벌 1위로 도약하기 위해 2030년까지 반도체 분야에 171조원을 투자한다.

눈길을 끄는 점은 삼성이 배터리가 아닌 바이오 사업을 ‘제2 반도체’로 낙점한 것이다. 삼성은 바이오의약품 위탁 개발 생산(CDMO)과 바이오시밀러 강화를 통해 바이오 분야를 미래 성장 동력으로 키워 제2의 반도체 신화 주역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배터리, 반도체·바이오에 왜 밀렸나

업계에선 이 부회장이 8월 13일 가석방된 이후 삼성의 차세대 주력 사업인 반도체와 배터리 사업에 대한 의사결정이 탄력을 받게 될 것으로 예상했다. 삼성은 이 부회장이 구속 수감된 2017년 이후 총수의 과감한 의사 결정이 필요한 대규모 투자와 인수·합병(M&A)이 사실상 올스톱 상태였다.

특히 점유율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미국 제2 공장 증설과 함께 삼성SDI의 미국 내 전기차 배터리 공장 건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생산 투자 등이 이 부회장의 복귀 후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현안으로 꼽혔다.

그동안 해외 생산 거점 마련에 소극적이었던 삼성SDI는 올해 2분기 콘퍼런스콜에서 미국 진출을 공식화했다. 삼성SDI는 미국 내 첫 배터리셀 공장 부지로 일리노이 주와 미시간 주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이노베이션) 중 미국 내 생산 기지를 마련하지 못한 곳은 삼성SDI가 유일하다. 삼성SDI는 미국 내 배터리셀 생산 라인이 없고 배터리팩 조립 공장만 가지고 있는데 이는 해외에서 배터리셀을 들여와 조립하는 시설이다.

중국과 유럽에 이은 3대 전기차 시장인 미국 시장 선점을 위해 경쟁사인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이 글로벌 완성차 업체인 제너럴모터스(GM)·포드와 각각 손잡고 미국 내 배터리 공장 건립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 정부가 자국 내 생산 비율이 75% 이상인 완성차업체에 무관세 혜택을 주는 신북미자유협정(USMCA : 미국·멕시코·캐나다 간 협정)을 2025년 7월 발효할 예정이어서 배터리 업체들에도 현지 생산 기지 구축이 유리하다. 삼성SDI의 미국 진출이 시급해진 이유다.

하지만 최고 의사 결정권자의 복귀 이후에도 배터리 투자 계획이 나오지 않으면서 시장의 의구심을 자아내고 있다. 삼성은 배터리 사업에 대한 구체적인 투자 계획없이 “전고체 배터리 등 기존 제품의 한계를 뛰어넘는 차세대 기술 리더십을 강화해 시장 주도권을 강화할 계획”이라고만 밝힌 상태다.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6월 9일 열린 인터배터리 전시회에서 삼성SDI의 전기차용 5세대 배터리 솔루션을 살펴보고 있는 전영현(오른쪽부터) 삼성SDI 사장,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지동섭 SK이노베이션 배터리사업 대표.  /한국경제신문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6월 9일 열린 인터배터리 전시회에서 삼성SDI의 전기차용 5세대 배터리 솔루션을 살펴보고 있는 전영현(오른쪽부터) 삼성SDI 사장,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지동섭 SK이노베이션 배터리사업 대표. /한국경제신문
중국에 잠식당한 LCD 시장의 그림자

이번 투자 계획에 배터리 내용이 짧게만 언급된 것을 두고 일각에서는 미래 먹거리로서의 배터리 사업에 대한 삼성 내부의 회의적인 시각이 일부 반영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먼저 삼성이 배터리를 반도체·바이오처럼 초격차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사업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분석이다.

배터리 산업은 반도체·바이오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기술 난도가 낮아 진입 장벽이 낮다. 배터리 산업은 수주산업으로 생태계 구조상 배터리 업체보다 완성차 업체들이 주도권을 쥘 수밖에 없어 다양한 변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한국 배터리 기술이 글로벌 지위를 확보하고는 있지만 수십조원에 달하는 중국 정부의 막대한 지원을 등에 업고 급성장 중인 중국 배터리 업체들을 견제하기에는 힘에 부치는 것이 현실이다.

중국을 따돌리기 위해서는 전고체 배터리 등 차세대 배터리 개발에 매진해야 하는데 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해 해마다 수조원씩 투자하는 것은 대기업들도 쉽지 않다. CATL 등 중국 배터리 업체들의 저가 공세로 투자한 만큼 수익성을 담보하기 어려워지고 있는 점도 문제다.

진입 장벽이 낮다 보니 배터리 업체뿐만 아니라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도 배터리 자체 생산을 추진하고 있어 후발 주자의 추격이 비일비재하다.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이미 차세대 배터리인 전고체 배터리 전쟁에도 뛰어든 상태다.

결국 관건은 전고체 배터리 등 차세대 배터리를 누가 먼저 상용화하느냐에 달려 있다. 삼성SDI가 당장의 생산 능력 확대보다 투자 계획에서 밝힌 것처럼 전고체 배터리 등 초격차 기술 우선 확보를 통한 시장 선점 전략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이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중국에 잠식 당하고 있는 디스플레이 산업은 현재 한국의 배터리 산업이 처한 상황에 시사점을 준다. 한국의 디스플레이 산업은 2004년 평판 디스플레이 종주국 일본을 제친 후 세계 1위를 지켜왔지만 고액 연봉을 제시해 한국인 인재를 빼가서 신기술을 탈취하는 전략을 취한 BOE 등 중국 업체들이 액정표시장치(LCD)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면서 올해 1분기 중국에 선두 자리를 빼앗겼다.

LCD 시장을 잠식한 중국은 이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시장까지 노리고 있다. 삼성은 차세대 디스플레이 등 고부가 가치 제품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재편해 초격차 기술로 중국과 기술 격차를 벌리고 있지만 이 역시 중국이 빠른 속도로 맹추격하고 있어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반도체는 기술의 초격차가 이끄는 시장이지만 디스플레이 시장은 아직 고난도 기술이 주류인 시장이 아니다. 중국이 막대한 자본을 동원해 기술 탈취와 국내 인재 빼가기를 시도했음에도 반도체 굴기에 실패한 것은 반도체 산업의 높은 진입 장벽 때문이었다.

배터리 사업은 화재와 같은 잠재적인 리스크에 대한 위험부담도 반도체·바이오 사업보다 큰 편이다. 삼성SDI는 2016년 삼성전자 갤럭시 노트7 배터리 발화 사태로 리콜 사태를 겪었던 만큼 화재와 안전성 이슈에 매우 민감하다.

전영현 삼성SDI 사장은 올해 3월 정기 주주 총회에서 “전기차 배터리는 전기차 사용 고객의 생명과 직결된다”며 “시장 선점을 위한 발 빠른 생산 능력 확보도 중요하지만 기술력에 기반한 품질과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이 더 우선시돼야 하고 차별적 품질을 굳건히 한다면 중·장기 성장에 더욱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삼성SDI는 지난해 BMW와 포드 등에 공급한 차량에서 배터리 결함으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해 리콜을 시행했다. 사태 이후 삼성SDI는 전영현 사장을 제외한 주요 경영진을 교체했고 공식 석상에서 기회가 될 때마다 배터리 안전성을 최우선으로 강조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SDI가 생산 능력 확대에 다소 보수적인 기조를 유지하는 것은 결국 화재와 리콜 등 잠재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