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2억 내수 시장, 낙후된 금융 시스템이 혁신 자양분…스톤코·누뱅크 등 급성장
[스페셜]글로벌 리서치·분석 회사인 핀덱서블(Findexable)은 ‘글로벌 핀테크 인덱스’를 통해 전 세계 국가 중 핀테크 생태계가 잘 갖춰진 도시들의 ‘글로벌 핀테크 랭킹’을 발표하고 있다. 지난 7월 발표한 최근 순위에 따르면 실리콘밸리·런던·뉴욕에 이어 전 세계 4위 핀테크 도시로 꼽힌 곳은 바로 브라질의 상파울루다. 참고로 서울은 31위에 그쳤다. 글로벌 금융 시장의 변방으로 여겨졌던 브라질이 최근 새로운 ‘핀테크 허브’로 부상하고 있다.

글로벌 핀테크 허브’로 성장한 브라질
중남미에 자리한 브라질은 낙후된 금융 시스템으로 글로벌 금융 시장의 변방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핀테크 기업들 대부분이 바로 이 브라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실제로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 벅셔해서웨이 회장이 지난해 골드만삭스의 주식을 대거 매도한 뒤 투자를 선택한 핀테크 기업 ‘스톤코’는 브라질 결제 시장의 떠오르는 핀테크 기업이다. 버핏 회장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올 6월 또 한 번 브라질의 인터넷 은행인 누뱅크에 5억 달러(약 5800억원) 투자를 결정하며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브라질의 핀테크 시장이 처음 주목을 받은 것은 2017년 골드만삭스의 보고서가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골드만삭스는 ‘핀테크의 브라질 모먼트(Fintech’s Brazil Moment)’라는 보고서를 통해 향후 브라질의 핀테크 산업이 2027년까지 240억 달러(약 2조원)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골드만삭스를 비롯해 당시 글로벌 투자업계가 브라질의 핀테크 시장을 눈여겨봤던 데는 이유가 있다. 브라질의 인구는 2억 명을 넘어선다. 국내총생산(GDP)은 2020년 기준 약 1조4000억 달러로, 그만큼 어마어마한 내수 시장을 갖춘 국가다.
이와 비교해 브라질의 금융 시장은 몇몇 주요 은행들이 시장을 독과점하고 있는 형태였다. 2017년 당시 골드만삭스의 분석에 따르면 브라질의 주요 5대 은행이 민간 대출의 85%, 기업 대출의 90%를 과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과점 구조 속에서 브라질 은행들의 제한된 상품과 서비스, 높은 금리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만 또한 상당히 높았다.
이보다 심각한 문제는 복잡하고 낙후된 금융 시스템으로 인해 금융 서비스에 접근하지 못하는 인구의 비율이 매우 높았다는 것이다. 브라질은 33%의 인구가 은행 계좌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고 신용카드 사용률 또한 30% 정도에 불과했다.
기존 금융 시장에 대한 불만 파고든 핀테크
하지만 브라질의 ‘반전’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융 시장이 낙후된 만큼 금융 소비자들이 불편하다고 느낄 수 있는 ‘빈틈’이 많았다. 당시 브라질의 주요 은행들 대부분이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을 출시하는 등 디지털화를 시도하기는 했지만 경쟁자가 없는 시장에서 혁신은 더디게 진행됐다. 예를 들어 2017년 당시 브라질 최대 은행인 이타우(Itau)는 앱에서 계좌 하나를 개설하는 데만 15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26개가 넘는 항목을 채워야 했다. 이후 은행 계좌 승인을 받는 데 또 18시간이 소요되는 시스템이었다.
핀테크 업체들이 바로 이 ‘빈틈’을 빠르게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브라질을 비롯한 중남미가 대부분 현금 결제를 중심으로 한 시장이라는 것도 핀테크 업체들의 성장에 유리한 조건이 됐다. 중남미 대부분이 온라인상에서 물건을 구매한다고 하더라도 지역의 상점들과 연계해 현금으로 가격을 지불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금 결제 비율이 70%를 넘어서던 브라질은 최근 5년 새 이커머스를 중심으로 한 온라인 지급 결제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추세다. 그 무엇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의 팬데믹(세계적 유행)이 이와 같은 비대면을 중심으로 한 온라인 지급 결제 시장의 폭발적 성장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 또한 적지 않다. 사기 금융 거래 비율이 높아 브라질 금융업계의 고질적인 골칫거리였던 ‘신원 확인’ 서비스를 해결하는 데도 핀테크 업체들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실제로 브라질의 핀테크 업체들 가운데는 기존 금융 시장의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한 ‘금융 서비스’에 특화된 업체들이 대부분이다. 디스트리토 핀테크 리포트 2020(Distrito Fintech Report 2020)에 따르면 현재 브라질을 기반으로 활동 중인 핀테크 업체는 771개에 달한다. 그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대금 결제 서비스로 35%나 된다. 신용 대출 관련 기업이나 재무 관리 등을 위한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핀테크 업체들의 비율도 높은 편이다. 이 밖에 증권·가상화폐·보험 등 다양한 핀테크 업체들이 활동 중이다. 이와 같은 핀테크 시장의 다양성은 핀테크 허브로서 브라질의 강점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중남미 핀테크 시장의 높은 성장성을 뒷받침하는 것은 최근 빠르게 늘고 있는 중남미 시장의 스마트폰 보급률이다. 브라질을 포함한 중남미 대부분의 국가는 젊은층의 인구 비율이 높은 편이다. 이는 브라질 역시 마찬가지다. 2020년 기준 54세 미만 브라질 인구 비율은 전체의 81%에 달한다. 오랫동안 경기 침체를 겪었던 브라질은 2015년 이후로 회복세에 접어들며 인터넷에 상대적으로 친숙한 젊은층의 인구를 중심으로 스마트폰 보급률 또한 빠르게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2016년 57.75%에서 2021년 현재 75.61%까지 높아졌다. 2026년 85%에 이를 것으로 예측된다. 실제로 브라질은 인스타그램·페이스북 사용률이 세계에서 셋째로 높은 국가이기도 하다.
여기에 코로나19 사태는 모바일과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핀테크업계의 성장을 부추기는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최근 1~2년 새 브라질을 포함한 중남미 금융 소비자들에게 ‘내 손안의 은행’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대폭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글로벌 투자자들이 중남미 핀테크 산업의 높은 성장성에 주목하는 이유이고 중남미의 맏형이라고 할 수 있는 브라질이 더욱더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다.

핀테크 산업의 성장을 위한 조건들이 잘 갖춰져 있다고 하더라도 핀테크 기업들의 성장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규제’다. 금융 산업 자체가 규제 산업이기 때문이다. 브라질의 핀테크 산업 성장의 기폭제가 된 것은 2019년 브라질의 핀테크 관련 법안이 마련된 이후다.
이는 브라질 내의 금융 업체 수 변화만 보더라도 명확하게 나타난다. 2013년부터 2018년 사이 브라질의 금융 업체는 약 10% 감소 추세였지만 2019년 이후 다시 증가 추세로 돌아섰다. 브라질중앙은행에 따르면 2020년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브라질 역시 대부분의 기업들이 문을 닫아야 했지만 핀테크 분야에서는 최소 40개 업체가 새롭게 영업을 시작한 것으로 나타났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도 핀테크 산업만큼은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브라질은 최근 몇 년간 브라질중앙은행(BACEN, the Central Bank of Brazil) 등을 중심으로 ‘친 핀테크 정책(fintech-friendly policy)’을 구축해 나가는 중이다. 브라질의 금융 규제는 브라질중앙은행을 비롯해 브라질증권거래위원회(the Brazilian 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ion, CVM), 민간보험감독부(the Private Insurance Superintendence, SUSEP) 등의 기관이 담당하고 있다. 이들이 주도하는 ‘친 핀테크 정책’의 목적은 뚜렷하다. 다양한 핀테크 서비스들이 기존의 금융 서비스와 자연스럽게 융화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 금융 소비자들의 안전을 지키는 데 최우선을 두고 있다. 실제로 이들 기관은 브라질 금융 시장에 참여하고 있는 핀테크 플레이어들을 파악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현재 브라질은 핀테크 기업들에 특정한 ‘운영 라이선스’ 를 지급하는 시스템은 아니다. 새로운 플레이어들이 핀테크 시장에 진입하기에 유리한 환경인 셈이다. 이는 해외 핀테크 기업들이 브라질 시장에 진출하는 데도 마찬가지다. 다만 핀테크 기업들은 일반적인 은행이나 증권 등 금융 산업 관련 법을 따르도록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브라질의 금융 규제는 상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규제를 부과하는 방식 대신 관리 감독이 필요한 특정 거래 방식을 규제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이에 따라 기존의 금융 서비스로 구분하기 어려운 핀테크 업체들은 각각 서비스의 특성에 따라 관련 법의 규제를 받는다. 기존 금융 시장에서 대출 받기 어려웠던 기업들이 자금 조달 등에 활용할 수 있는 ‘크라우드 펀딩’ 활성화를 위한 ‘크라우드 펀딩’ 관련 법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와 함께 브라질증권거래위원회(CVM) 산하 ‘핀테크 금융 기술 혁신 허브(Fintech Hub of Innovation in Financial Technology)와 같은 연구소를 설립해 운영 중이기도 하다.
브라질 핀테크 산업의 성장에 특히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 기관은 브라질중앙은행이다. 블록체인·P2P·전자지갑·환전 서비스 등 핀테크와 관련한 정책을 연구 중이다. 최근에는 브라질중앙은행이 주축이 된 즉석 결제 시스템 ‘픽스(PIX)’ 등도 핀테크 산업에 대한 기대감을 부추기는 대표적인 요인으로 거론되고 있다. 2019년 처음 논의를 시작한 이 시스템은 2020년 9월 관련 법안이 발효됐다. 서로 다른 금융회사를 이용하는 개인이나 기업 등의 24시간 연중무휴 실시간으로 거래할 수 있도록 한 시스템이다. 개인과 개인뿐만 아니라 개인과 법인, 법인과 법인 간의 거래 등에 활발히 사용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개인이나 법인이 세금을 납부할 때도 활용 가능성이 높다.
이와 함께 브라질은 정부 차원에서 ‘오픈 뱅킹’을 제도화하는 데도 적극적이다. 2020년 5월 브라질중앙은행과 국가통화위원회(National Monetary Council)가 오픈 뱅킹 구현 및 규제를 위한 공동 결의안과 BACEN 시행규칙을 발표한 바 있다. 브라질의 ‘오픈 뱅킹’ 서비스는 당초 올해 2월 시작이 예정돼 있었지만 일정이 미뤄져 올 연말쯤 본격적으로 서비스가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금융사들 간 통합된 정보 시스템 플랫폼이 마련되면 향후 이를 활용한 핀테크 업체들의 성장성 또한 더욱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 무엇보다 금융 소비자들에게 투명하고 명확한 정보 제공을 목표로 하는 만큼 신규 핀테크 업체 등에 대한 정보를 보다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향후 핀테크 산업 전반의 퀄리티가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 또한 크다.
<박스> 브라질 핀테크 대표 주자들
1. 누뱅크(Nubank)

2. 이뱅스(EBANX)

3. 크레디타스(Creditas)

4.페그세구로(PagSeguro)

5. 스톤코(StoneCo)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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