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에 투자 상품으로 입성한 비트코인… 주류 미디어·지식인의 공격 빗나가

[스페셜 리포트]
미국 텍사스에 위치한 비트코인 채굴업체 '윈스톤'에서 채굴자들이 일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미국 텍사스에 위치한 비트코인 채굴업체 '윈스톤'에서 채굴자들이 일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미국 증권감독거래위원회(SEC)에 비트코인 상장지수펀드(ETF) 신청서가 접수된 후 8년 만인 2021년 10월 19일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비트코인 선물 ETF가 상장됐다.

비록 비트코인의 선물 계약을 추적하는 ETF이지만 월가에 비트코인이 하나의 투자 상품으로 당당하게 입성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 뉴스 전후로 비트코인 가격은 6만 달러를 회복했고 전고점에 1% 이내로 접근했다. 6개월 전 폭락 이후 주류 미디어와 주류 지식인들인 이번에야말로 비트코인이 끝났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이번에도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비트코인 투자를 하나의 게임으로 간주하면 이 게임의 승리 법칙은 의외로 간단하다. 비트코인이 강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투자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게임과 마찬가지로 게임의 승자는 드물다. 승리의 길은 단순한 반면 외롭고 비좁지만 실패하는 길은 다양하며 함께 가는 이들로 언제나 북적대는 넓은 길이다.

이제 미국 금융권이 비트코인을 포용하는 것이 명백해진 상황이지만 앞으로의 게임도 험난하기는 마찬가지다. 그 무엇보다 이미 오를 대로 올라버린 비트코인 대신 제2, 제3의 비트코인이 될 수 있다는 마케팅이 한 방에 인생 역전을 꿈꾸는 많은 서민들을 유혹할 것이다. 또한 비트코인이 폭락할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주류 미디어와 주류 지식 사회는 비트코인 투자를 비웃고 저주할 것이다. 내용은 늘 바뀌겠지만 패턴은 비슷하다. 즉 성공적인 비트코인 투자자라면 성급하고 무모하게 돌진하려 드는 급진 세력과 절대로 변하지 않으려는 수구 세력 사이에서 외로이 중심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비트코인이 알려주는 ‘엘리트 추종’의 허무함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비트코인은 갑자기 등장해 인생을 뒤흔들고 있는 게임 체인저다. 비트코인은 많은 사람들의 현재와 미래의 삶을 바꾸고 있다. 평생 만져 볼 수 없는 재산이라고 단정했던 부를 안겨 주기도 했고 좀 더 일찍 접했다는 이유로 전문가 대접을 받게도 하며 본격적으로 비트코인을 둘러싼 공학과 철학과 인문사회학을 공부하려고 마음먹게 하기도 하고 시간과 재원을 투입해 비트코인이 파생시킨 사업을 개척해 나가려는 이들도 양산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비트코인 때문에 패가망신한 이들도 나열해야만 공평한 서사로 느끼는 독자들이 많겠지만 수학적으로만 보면 비트코인 때문에 패가망신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비트코인 가격은 지난 10년 동안 달러 대비 무려 6만 배나 치솟았기 때문이다.

90% 이상 가치를 잃어버리곤 하는 알트코인에 손을 댄 사람들도 주변 지인들에게는 자신이 비트코인에 투자해 손해 봤다고 말하곤 한다. 철학적으로는 비트코인과 180도 반대라고 할 수 있는 알트코인을 대중은 구별조차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반지성주의를 부추긴 것은 매스 미디어다. 매스 미디어는 주류 지식 사회의 평균적인 지적 수준을 반영할 때가 많다. 즉 주류 지식 사회가 비트코인에 대한 대중의 오해를 강화하거나 최소한 방치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비트코인 게임에서 가장 뼈아프게 실패해 왔기 때문이다. 인간이 빚어내는 사회 현상도 시샘과 심통으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을 때가 생각보다 흔하다.

이들 대부분은 비트코인 게임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비트코인은 화폐 현상이다. 화폐 현상은 어쨌거나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구석이 있다. 중앙은행이 정하는 이자율과 정부가 단행하는 화폐 개혁이 일방적인 것과 마찬가지다. 비트코인에 대해 무심한 것 역시 비트코인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취할 수 있는 하나의 선택지이지만 좋게 봐야 늦게 탈락하는 희망 없는 포석일 뿐이었다. 선택지가 없다면 적극적으로 게임에 참여해 이기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지금까지의 승자들은 우연히 비트코인의 매력에 빠졌거나 그런 사람을 우연히 주변 지인으로 뒀던 운을 타고난 사람들이었다고 간주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비트코인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다고 가정한다면 앞으로 게임은 운에만 달려 있지는 않을 것이다. 게임에서 지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게임의 규칙을 숙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비트코인도 마찬가지다. 비트코인은 철학과 기술의 복합체로서 제대로 숙지하기 위해 누구나 어느 정도의 공력은 투입해야 한다.

비트코인을 발명하고자 했던 이들은 엘리트를 불신했다. 인간 사회의 속성상 공적인 업무는 필요하고 누군가는 공적인 업무를 담당해야 한다. 당연히 그들에게는 선택과 배제의 특권이 부여된다. 하지만 그들도 탐욕스러운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비트코인은 좋은 엘리트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할 수만 있다면 곳간의 열쇠나 지름길, 즉 엘리트의 특권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비트코인은 화폐 발행에 대해서만큼은 그 가능성을 열어젖혔다. 신기술이 낙원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성급한 이상주의자들은 단지 화폐를 넘어 회사나 정부도 엘리트 없이 운영할 수 있다며 들떠 있다. 많은 변화를, 그것도 긍정적인 변화를 초래할 것은 분명하지만 비트코인과 그 관련 기술이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낙원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사실 비트코인에 대한 주류들의 거부감과 엘리트에 대한 대중의 맹목적인 추종 역시 인간 본성의 산물이다. 소설가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은 엘리트와 대중의 숙명적인 굴레를 생동감 있게 그려낸 걸작이다. 대중은 엘리트를 따른다. 따라서 실패할 때까지 엘리트는 대중 위에 군림할 수 있지만 대중은 실패한 엘리트에 대해서는 잔혹하다. 비트코인은 인간의 본성적 차원에서 생겨난 대중과 엘리트 간의 질긴 인연을 끊어낼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다.

다양한 블록체인 기술에 투자하는 이들도 비트코인에 무관심한 이들 만큼이나 ‘당신들의 천국’이 알려 주는 굴레를 반복하고 있다. 그들은 저마다 누군가를 추종한다. 이런 의존적인 대중이 방만한 엘리트를 양산한다.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음모론이라는 반지성주의 감옥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다.

엘리트를 따르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보여주는 이가 바로 JP모간의 회장, 제이미 다이먼이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비트코인을 폄훼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투자 은행의 수장이 비트코인을 비난하는 것을 두고 필자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숨겨진 의도를 찾으려고 애썼다. 비트코인이 기존 금융권을 송두리째 바꿀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간을 벌기 위해, 대중을 기만하려고 한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그의 최근 발언은 이런 분석을 늘어놓았던 모든 이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비트코인이 2100만 개로 한정돼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이 발언으로 그는 지능적이고 이중적인 플레이를 하는 엘리트가 아니라 게으르고 공부하지 않는 꼰대일 뿐이라는 사실을 들키고 말았다.

비트코인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대부분도 다이먼 회장의 의심에 공감하고 있을지 모른다. 블록체인의 공식 명칭은 분산 장부다. 즉 비트코인은 분산 장부이고 1 비트코인은 이 장부에 기록된 1억이라는 숫자다. 비트코인은 댕그랑 소리를 내는 동전이 아니므로 장부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비트코인 장부는 수만 개가 흩어져 있는데 동시에 거래를 기록하며 동일한 내역을 유지한다. 여러 장부가 동일한 기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공통의 규칙이 필요하다. 총발행량이 2100만 개라는 것도 규칙의 하나이고 이 규칙을 어기는 장부는 동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다이먼 회장은 블록체인의 기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쯤 되면 엘리트 노릇도 고역이라는 사실을 인정해 줘야 한다. 이해할 수 있는 지력이 있건 없건 대중은 그 자리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쟁점이 나타날 때마다 엘리트가 책임 있는 의견을 말해 줄 것이라 기대한다. 무지하고 무책임한 발언이라도 받아 적고 무한 재생하며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 같다가도 틀렸다는 것이 명백해지면 그를 따르던 대중이 나서 모욕을 안겨 주고 무대 위에서 끌어내리려고 할 것이다.
지식 사회가 쏟아낸 비트코인을 향한 저주들
5월과 6월에 걸쳐 비트코인은 고점 대비 50%나 폭락했다. 돌이켜 보면 버스에 오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이번 게임에서도 승리를 거머쥐지 못했다. 역시 주류 미디어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엘리트 의존적인 선택을 한 이도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앞으로의 게임에서도 선택의 주체는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엄중하게 받아들일 때 비로소 주도적으로 이기는 선택을 할 수 있다.

비트코인 하락장에서 주류 지식 사회가 쏟아낸 저주를 떠올려 보자. 시작은 미국이었다. 바이든 정부는 친환경 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때마침 케임브리지 연구소에서 비트코인 채굴이 아르헨티나의 전기 소비를 압도한다고 발표했다. 빈곤의 종말로 유명한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는 비트코인은 쓸모없을 뿐만 아니라 환경에 부담을 주는 범죄 행위라고 말했다. 이런 주장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것은 미국 정부가 아니라 중국 정부였다. 중국 정부는 채굴업자들을 쫓아냈다. 이 뉴스에 가격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주류 지식 사회와 주류 미디어가 비트코인은 이제 끝났다고 외칠 만한 이벤트가 드라마틱하게 펼쳐졌다.

하지만 채굴자를 모두 쫓아낸 중국은 현재 전력난에 허덕이고 있다. 채굴자들이 남아 있었다면 전력난은 더 심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면 그 사람은 앞으로도 비트코인 게임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 채굴자들이 남아 있었다면 중국 정부는 책임을 떠넘기고 감옥에 보낼 희생양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채굴업자들이 남아 있었더라면 발전소들과의 공생을 통해 경영 악화를 방지할 수 있었다. 당연히 단전의 빈도도 줄어들었을 것이다. 이 추론의 근거는 중국을 떠난 채굴업자들을 받아들인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중국과 비슷한 전력난이 생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몇몇 지역에서는 비트코인 채굴에 대한 인식이 정반대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

텍사스 출신 미국 상원의원 테드 크루즈는 비트코인 채굴이 텍사스가 직면한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 책임 있는 정치가가 비트코인이 해롭지 않다는 수준의 수세적 발언이 아니라 환경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는 공격적인 발언을 하게 된 데는 여러 사람의 노력이 있었다. 요 몇 달 동안 비트코이너들은 에너지-환경 논쟁에 정면으로 맞섰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비트코인 채굴이 나름 거대한 이해관계인을 거느린 산업 생태계로서 이미 자리 잡았다는 현실이 스스로 운동하며 불리한 여론 환경을 뒤집고 있다.

에너지원의 지리적 편중과 저장 기술의 한계 그리고 수요의 불안정성은 전기 산업의 현실이다. 성수기의 피크타임과 비수기 때의 일상적인 수요는 두 배나 차이가 난다. 게다가 블랙아웃을 일으키지 않아야 하므로 정부는 성수기의 피크타임을 기준으로 발전 설비를 최대화할 것을 요구한다. 당연히 남는 전기를 소비해 줄 유연한 수요처가 필요하다. 비트코인 채굴은 위치와 시간에 구애 받지 않는다. 또 전기를 돌린 만큼 비트코인을 배당 받는다. 꼭 완제품을 만들 때까지 시간을 투입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텍사스의 에너지 문제는 천연가스와 풍력 에너지가 풍부한데도 겨울철 한때의 추위에 대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전기 수요의 특성상 한편으로는 전기를 버리면서도 한편으로 전기를 공급하지 못하는 일은 흔하게 발생한다. 비트코인 채굴은 텍사스의 풍부한 잉여 전기를 활용하므로 발전 설비를 최대치에 맞춰도 흑자 경영을 가능하게 한다. 전기 발전에는 특수한 경영 전략이 요구되며 비트코인 채굴이 비책이 된다는 것을 증명해 내고 있다.
미국 최대 은행인 JP모건체이스의 제이미 다이먼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10월 4일(현지시간) 비트코인에 대해 "본질적인 가치가 없고, 규제 담당자들은 기를 쓰고 규제할 것"이라 말했다.(/AP연합뉴스)
미국 최대 은행인 JP모건체이스의 제이미 다이먼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10월 4일(현지시간) 비트코인에 대해 "본질적인 가치가 없고, 규제 담당자들은 기를 쓰고 규제할 것"이라 말했다.(/AP연합뉴스)

알트코인은 비트코인이 아니다
비트코인 이론가들은 10년 전부터 연역적으로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주류 지식인들은 외면했다. 미시경제학의 기본 원리와 전기 산업의 특수성에 무지한 대중은 비트코이너들의 이런 논리적인 설명을 억지라며 조롱했다. 대중의 오해를 시정해 줄 수 있었던 경제학자들은 뒷짐을 지고 있었다. 존경 받았던 경제학자들 역시 주관적 선호와 무관하게 지식을 중립적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있는 혼란한 상황에서 믿고 따를 사람도 없다는 것이 비트코인 게임에 놓여진 대부분 사람들이 짊어져야 하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크게 실패하지 않도록 해주는 왕도는 있다.

첫째, 비트코인과 알트코인을 구별해야 한다. 비트코인은 12년의 세월을 견뎠다. 그 무엇보다 비트코인을 좋아할 수 없는 중국과 러시아 정부의 적대 정책을 버텼다. 심지어 세계 금융을 좌우하는 미국의 금융회사들조차 일찌감치 공생 쪽으로 각을 잡았고 이번 ETF 승인도 공생의 연장선에서 나온 일로 돌출적인 사건이 아니다. 반면 알트코인은 저마다 각각의 이상이 있지만 아직까지 현실에서 보여 준 것이 거의 없다. 이더리움도 이제 막 가능성을 현실로 타진하고 있을 뿐이다. 디파이(탈중앙화 금융)와 대체 불가능한 토큰(NFT) 시장이 순항할지 아니면 한 번 꼬꾸라지고 나서 뻗어 나갈지는 지켜 볼 일이다.

생소한 코인의 투자 수익을 자랑하는 이들은 늘 있겠지만 투자 붐과 실제와는 거의 언제나 시간차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본격적으로 산업혁명이 시작되기 80년 전에 산업혁명에 대한 기대감에서 주식 투자 붐이 있었다. 인터넷 닷컴 붐의 붕괴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가 등장하기도 전의 일이다.

둘째, 비트코인에 대해서만큼은 주류 미디어와 주류 지식인의 의견은 무시하라. 주류 지식인들은 비트코인이라는 기회를 놓쳤을 뿐만 아니라 대중을 호도했다는 부담감을 이제 막 느끼기 시작했다. 유연하게 전환할 수도 있지만 지식인들이란 자신이 결국 옳았다는 한마디에 목을 맬 때가 더 많다. 비트코인이 심오한 지적인 현상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들의 패배감은 위험한 방식으로 발현될 수도 있다. 앞으로 그들은 더욱 확증 편향에 시달릴 것이다. 비트코인이 폭락할 때만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하나의 증상이다.

점점 더 많은 주류 미디어들이 비트코인에 대해 우호적인 기사를 내보내고 있고 주류 금융인들 중에도 생각을 바꾸는 이들이 등장하고 있다. JP모간과 뿌리가 같은 모건스탠리의 제임스 고만 최고경영자(CEO)는 비트코인은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고 했다. 주류들의 이런 분열은 투자자에게는 좋은 신호다. 만약 그들 모두가 비트코인을 인정한다면 그때는 이미 일반 대중에게는 기회의 문이 닫혔다고 봐도 무방하다.

셋째, 이 게임의 필패 전략은 그 무엇보다 자신과 관계없다고 단정하고 앞으로도 무관심을 지속하는 것이다. 투자에 대한 철학이나 노동 윤리, 경제적 환경, 국가관 등 무엇이 됐건 비트코인에 대한 무관심에는 나름 합당하며 존경할 만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비트코인은 투자 상품이기 이전에 국가와 주류 엘리트들에게 망신을 안겨 준 혁신적인 발명품이다. 지금까지 필자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라도 당장 비트코인을 공부해야 한다. 새로운 화폐의 등장은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지만 일어난 이상 이와 무관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오태민 ‘비트코인은 강했다’, ‘비트코인 지혜의 족보’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