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업' 안주하지 않고 새 시장 창출…한국 대기업도 속속 알파 기업 합류
[스페셜 리포트] 시장 포화 시대다. ‘블루오션’으로 떠오른 분야는 경쟁자들이 진출하며 곧 ‘레드오션’으로 변한다. 기업은 실적·고용·외형·내실 등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신성장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알파 기업’은 존재하지 않는 시장을 만들며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기업을 뜻한다. 새로운 블루오션을 만들어 내는 ‘21세기의 콜럼버스’다.알파 기업은 군집 생활을 하는 동물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를 뜻하는 ‘알파 애니멀’에서 유래한 용어다. 시장의 주도권을 잡고 해당 분야에서 선도적 지위에 있는 기업을 뜻한다. 또한 매출·수익 등과 같은 객관적 지표보다 기업이 가진 경쟁력을 바탕으로 시장을 주도하는 기업을 뜻하기도 한다. 즉, 본인의 강점으로 시장을 창출하고 리드하는 회사가 알파 기업이다.
단순히 시장점유율 등이 높다고 해서 알파 기업이라고 칭하지 않는다. 현란한 마케팅과 브랜드 전략만으로는 알파 기업이 될 수 없다. 단순한 기술과 가치 혁신만으로도 알파 기업이 될 수 없다. 미래에 대한 장기적 관점에서 기업이 지닌 특별한 무기를 통해 소비자와 시장의 이목과 관심,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의 대기업도 최근 이 같은 특징을 보이며 알파 기업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캐시카우’였던 기존 사업에만 목매지 않고 본업을 넘어 신사업으로 지속 성장을 위한 발판을 마련 중이다. 아직 뚜렷한 수익성을 확보하지 못한 사업도 있지만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를 창출하면서 시장의 큰 기대를 받는 곳도 상당수다. 신흥 시장 알파 기업, 소비자에서 출발
알파 기업은 신흥 시장에서 먼저 주목받았다. 인도 최대 민영 종합 통신 기업 ‘바르트 에어텔’이 대표적인 사례다.
서비스 산업이 발달한 선진국에 비해 신흥 시장은 일반적으로 공급자가 주도하는 시장이어서 소비자라는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다. 하지만 소비자 중심 경영을 위한 제품 출시와 차별화된 서비스로 변화하면서 시장에 변화를 일으키고 선도하는 기업이 속속 등장했다
바르티 에어텔은 소비자가 빠른 시간 안에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업무 프로세스를 고객 중심으로 설계했다. 1995년부터 인도 이동통신사 중 처음으로 ‘에어텔 커넥트’라는 소비자 방문이 가능한 매장을 설치해 신청·해지, 요금 납부, 애로 사항 처리 등을 지원했다. 또 고객 민원을 휴대전화 문자 서비스(SMS)로 접수해 처리를 도왔다.
당시 인도 시장에선 통신사들의 경쟁이 심했지만 소비자 개념이 약해 고객 서비스가 형편없었다. 바르티 에어텔은 상당한 초기 자금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제적 투자로 소비자 중심의 서비스를 전개해 업계에서 선도적 지위를 차지했다.
또한 소비자의 특성과 생활 패턴을 고려해 경쟁사에서 선보인 적이 없는 여성과 대학생 맞춤형 통신 서비스를 파격적인 가격에 제시했다. 이동통신과 통신 서비스 분야에서 선도적인 기업 이미지를 구축해 여러 신규 상품을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출시하고 있다.
바르티 에어텔의 성공은 경쟁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경쟁사들도 에어텔과 유사한 서비스에 나서는 등 새로운 시장 창출을 통해 인도에 고객 개념이 정립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기존 고정관념을 타파해 신시장을 창출하고 틈새시장 공략에 나서는 곳도 많다. 고정관념을 바꾸는 발상의 전환으로 새 시장을 창출하는 기업도 신흥 시장에서 출발했다.
대표적으로 브라질의 커피 기업 ‘카페(Kapeh)’는 2007년 친환경으로 재배한 커피를 활용해 화장품·보습제·샤워크림 등 33가지 제품을 출시했다. 사용하는 커피는 모두 친환경 커피 인증인 ‘우츠(UTZ : 친환경·지속 가능성 커피 증명)’를 받았다. 이 제품군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등에 수출 중이다.
카페의 창업자인 바네사 아라우주는 “브라질을 대표하는 상품 중 하나인 커피를 사용해 만든 차별화된 제품을 개발해야 기업 존속이 가능하다”고 말하며 관련 상품 개발에 전념해 왔다.
그는 ‘커피는 마시는 것’이라는 공식을 깨는 동시에 브라질이 커피의 나라라는 고전적 이미지를 잘 결합해 새로운 시장을 창출했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도 알파 기업 속속 등장
신흥 시장에서 200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된 알파 기업의 바람은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으로 이어졌다.
대표 기업은 ‘괴짜’ 엘론 머스크 최고경영자(CEO)가 이끄는 테슬라다. 테슬라는 2003년 설립된 미국의 자동차 기업으로, 전기차만 전문으로 생산한다. 2008년 첫 제품으로 전기 스포츠카인 ‘로드스터’를 제작했고 이후 프리미엄 세단 ‘모델S’를 생산·판매하고 있다. 다른 자동차 기업과 비교해 규모가 작고 생산력이 낮지만 전기차로 업계의 판과 틀을 뒤흔들고 있다.
머스크 CEO와 테슬라는 전기차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다. 계속해 새로운 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머스크 CEO는 우주 탐사 기업 ‘스페이스X’를 설립해 발사체와 로켓 엔진, 우주 화물선, 위성 인터넷, 행성 간 우주선 등을 설계·제조하며 화성의 식민지화와 인류의 우주 진출, 탐사비용 절감 등을 목표로 한다.
현재 세계 최초의 상용 우주선 발사와 궤도 발사체 수직 이착륙, 궤도 발사체 재활용, 민간 우주 비행사의 국제 우주 정거장 도킹 등 수많은 업적을 달성해 21세기 인류의 우주 개발을 주도하고 있다. 특히 궤도 로켓의 1단 부스터 수직 이착륙은 미국 항공우주국(NASA)과 러시아 연방우주국, 중국 국가항천국 등 각국 정부 기관조차 성공하지 못한 기록이다. 또 세계 최초로 궤도 로켓을 100회 이상 재사용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스페이스X는 4만2000여 개의 인공위성을 우주로 쏘아 올려 전 세계에 위성 인터넷을 보급하는 스타링크 프로젝트에 집중하고 있다. 이 계획이 현실화된다면 현재까지 인류가 발사한 모든 인공위성보다 4배 정도 많은 스페이스X 위성이 우주에서 인류의 네트워크 역사를 주도하게 된다.
현재까지 1740개의 스타링크 위성이 발사됐다. 이를 통해 14개국 10만여 명에게 인터넷 시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서비스 가격은 한 달에 99달러다.
미국에서는 스페이스X가 장기적으로 테슬라의 기업 가치를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 ‘부업’이 ‘본업’의 위치를 차지하는 셈이다. 모건스탠리가 최근 현지 투자자 32명을 대상으로 관련 설문 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63%가 스페이스X가 테슬라의 시가 총액을 넘어설 것이라고 예상했다. 현재 테슬라의 시가 총액은 비상장 기업인 스페이스X의 시총을 압도한다.
테슬라의 현재 시총은 8580억 달러(약 1014조원), 스페이스X의 기업 가치는 1003억 달러(약 119조원)로 8.5배 차이가 나지만 스페이스X의 우주선이 통신·교통·관측 등에 광범위하게 쓰일 가능성에 높은 평가를 내린 것이다. ‘본업’인 전기차의 성공에 힘입어 머스크 CEO가 연 대우주 시대는 다른 글로벌 기업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주 산업은 스페이스X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각국 정부가 군사 목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반면 현재는 민간 자본을 바탕으로 경쟁이 벌어지는 ‘뉴 스페이스’ 시대다.
이 흐름에 맞춰 세계 최대 전자 상거래 기업 아마존 역시 내년에 첫 인터넷용 위성을 쏘아 올린다. 아마존의 자회사인 ‘카이퍼 시스템’은 내년 4분기에 우주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할 2대의 프로토 타입 위성을 발사할 계획이다. 스페이스X의 스타링크 프로젝트에 대항하기 위해서다.
아마존은 위성 인터넷 사업에 우선 100억 달러(약 118조원)를 쏟아붓는다. 고속 인터넷 통신이 충분하지 않은 오지나 비도시 지역에 인터넷을 제공하는 ‘카이퍼 프로젝트’를 달성하기 위해서다. 총 3236대의 위성을 발사해 지상에 고속 광대역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목표다. ‘딥 체인지’ 신사업 추진에 뛰어든 한국 대기업
글로벌 기업을 필두로 한 알파 기업 붐은 한국 대기업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 재계 총수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도 해외 일정을 완수하며 현지 기업의 진화 과정을 목격했다. 또 알파 기업의 흐름을 타지 못해 도태된 기업의 상황도 확인해 ‘딥 체인지’ 없이는 지속 성장할 수 없다는 경영 철학에 대부분 공감하고 있다.
삼성·현대차·SK·LG·롯데 등 5대 그룹을 중심으로 사업 다각화와 신사업 추진 등이 진행되며 알파 기업으로 진화하는 모습이다. 삼성전자는 이익의 핵심 축인 반도체와 전자 기기 외에 차세대 이동통신과 전장·인공지능(AI) 등에 집중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 기준 삼성전자가 보유한 순현금은 94조3700억원이다. 이를 바탕으로 5세대 이동통신(5G)을 넘어 6세대 이동통신(6G)에서도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선행 기술 연구를 수행 중이다. 통신망의 고도화·지능화를 위한 소프트웨어 역량 강화에 집중 투자하며 네트워크의 강자로 성장하기 위한 기반을 다지고 있다.
글로벌 이동통신 사업자와 잇따라 업무 협약을 체결해 시장 확대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미국 1위 이동통신 기업인 버라이즌과 지난해 계약한 것에 이어 올해 일본과 유럽의 1위 사업자인 NTT도코모·보다폰 등과 5G 장비 공급 계약을 했다. 전장 사업에도 지속적으로 힘을 쏟고 있다. 2015년 전장사업팀을 신설했고 2016년에는 미국 전장 기업 하만을 80억 달러(약 9조2000억원)에 인수했다. 다음해에는 3억 달러(약 3500억원) 규모의 ‘오토모티브 혁신펀드’를 조성해 사업 확대에 나섰다. 이 펀드는 첫 투자처로 오스트리아 자율주행차 기업 ‘TT테크’에 7500만 유로(약 1000억원)를 투입했다.
하만을 인수한 것처럼 글로벌 전장 기업을 추가 인수할 가능성도 있다. 서병훈 삼성전자 부사장은 올해 8월 열린 2분기 콘퍼런스 콜에서 “3년 안에 의미 있는 규모의 인수·합병(M&A)을 추진하는 것에 긍정적”이라며 “전장 사업 등 신성장 동력과 관련된 기업을 대상으로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현대차는 도심 항공 모빌리티(UAM)와 로보틱스 생태계 구현에 적극적인 모습이다. 현대차는 도심 항공 교통 민·관 협의체인 ‘UAM 팀코리아’에 참여해 관련 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 워싱턴에 2000억원 규모의 현지 법인을 설립했고 로스앤젤레스에도 협업 체계를 구축하는 등 해외 시장을 개척 중이다.
2028년 도심 운영에 최적화된 완전 자동화 UAM를 출시하고 2030년에는 인접 도시를 연결하는 지역 항공 모빌리티 제품을 내놓을 방침이다. 로보틱스 역시 현대차그룹의 한 축을 담당한다. 정의선 현대차 회장은 2019년 타운홀미팅에서 “우리 미래 사업의 50%는 자동차, 30%는 UAM, 20%는 로보틱스가 담당할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로보틱스 분야는 지난해 인수한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중심으로 연구·개발(R&D) 및 투자가 진행 중이다. 이 기업은 4족 보행 로봇인 ‘스폿’으로 유명하다. 스폿은 산업 현장에 투입돼 작업자의 안전을 보장하고 현장 운영화를 최적화하는 동시에 유지·보수에 도움을 주는 활동을 수행 중이다.
기아 광명 공장에 투입돼 현장의 위험을 감지하고 안전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고 있다. 현대차그룹 로보틱스랩의 AI 기반 소프트웨어가 탑재돼 작업자가 퇴근한 새벽 시간에 정해진 영역을 자율적으로 점검한다.
SK와 LG는 ‘배터리’를 신성장 동력으로 점찍었다.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자회사 ‘SK온’은 미국 완성차 업체 포드와 114억 달러(약 13조1000억원)를 투자해 미국에 배터리 합작 공장 3곳을 짓는다.
LG는 최근 그룹의 2인자 격인 권영수 부회장을 LG에너지솔루션 CEO에 선임했다. 미래 먹거리고 낙점한 배터리 사업을 강화하기 위한 인사로 풀이된다.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시장이 날이 갈수록 치열한 가운데 수년간 관련 사업을 진두지휘한 ‘베테랑’ 권 부회장을 CEO로 배치했다. 구광모 LG 회장의 배터리 사업에 대한 의지와 권 부회장을 향한 신뢰가 기반된 인사다.
‘유통 명가’ 롯데는 정보기술(IT) 사업으로 환골탈태에 나선다. 디지털 전환 시대에 발맞춰 자율주행·AI·클라우드 등의 사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롯데정보통신은 올해 6월 운전선 없는 자율주행 셔틀 임시 운행 허가를 받아 세종시에서 시험 운행을 진행한 바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당장 가시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미래 성장 기반을 닦는다는 차원에서 다수의 기업이 신기술에 투자하는 동시에 인력을 집중 배치하는 중”이라며 “기업의 존재 이유가 돈을 버는 것인 만큼 기업마다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을 갖고 긴 안목으로 신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돋보기] 한국 알파 기업의 ‘공통분모’ 수소 사업
한국의 알파 기업들은 각 기업의 색깔에 맞게 신사업을 진행 중이다. 또한 수소 사업이라는 ‘공통분모’에도 몰두하는 모습이다. 수소 경제 규모는 2050년 3000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 기업들이 놓칠 수 없는 기회의 땅이다.
주요 그룹은 현대차를 중심으로 수소 동맹을 결성해 관련 생태계 구축에 적극적이다. 현대차는 세계 최초로 수소차를 상용화했고 2030년까지 수소차 50만 대와 수소 연료전지 시스템 70만 기를 생산할 방침이다.
SK그룹은 2025년까지 18조5000억원을 투입해 수소 사업 활성화에 나선다. 2023년까지 SK인천석유화학 단지에 연 3만 톤 규모의 수소 액화 플랜트를 완공한다. 보령 LNG 터미널 근처에는 25만 톤의 블루 수소 생산이 가능한 시설을 짓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2008년부터 수소 사업에 진출한 삼성물산은 올해 7월 수소 생산에 특화된 미국 ‘뉴스케일파워’의 지분 투자를 실시하며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었다. 지난해 10월 탈석탄을 선언하고 향후 석탄 화력 발전 관련 사업의 투자 및 시공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밝힌 만큼 수소 사업에 더욱 집중하기 위한 지분 투자로 해석된다.
유호승 기자 yhs@hankyung.com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