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델 도마 위 오르면 기업도 큰 타격
-로지·루이 등 업계 샛별로 떠올라

[비즈니스 포커스]
신세계의 패션 플랫폼 W컨셉 광고에 등장한 가상 인간 로지.   사진=W컨셉 제공
신세계의 패션 플랫폼 W컨셉 광고에 등장한 가상 인간 로지. 사진=W컨셉 제공
온라인 쇼핑몰 ‘11번가’는 사명을 연상하게 하는 11월이 되면 해마다 연중 최대 규모의 할인 행사를 열고 고객들을 그러모았다. 올해도 ‘그랜드 11절’이라는 이름으로 어김없이 행사를 개최했는데 출발부터 뜻하지 않은 암초를 만나 곤욕을 치렀다.

광고 모델로 내세웠던 배우 김선호 씨가 예상하지 못한 논란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11번가는 올해 4월 김선호 씨와 전속 광고 모델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광고업계에 따르면 11번가가 김선호 씨에게 모델료로 지급한 비용은 약 4억원대(1년 계약)로 알려졌다.

다행히 논란이 일단락되면서 11번가는 예정대로 김선호 씨가 등장한 광고를 내보냈지만 여전히 일부 소비자들은 김선호 씨가 등장한 11번가의 광고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당초 기대했던 광고 효과는 사실상 기대하기 어렵게 된 셈이다.

배우·스포츠 선수 등 유명인들의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으면서 이른바 ‘가상 인간(virtual influencer)’들이 광고계의 ‘블루칩’으로 떠오르고 있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만들어 낸 가상 인간은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다. 온라인 세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사생활 문제 등으로 인해 돈과 시간을 들여 애써 찍은 광고를 내려야 하는 ‘리스크 요인’이 전혀 없는 것이 가상 인간의 최대 강점으로 꼽힌다.
공인에 대한 도덕적 잣대 높아져해를 거듭할수록 ‘공인’들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잣대가 높아지고 있다. 가령 과거 그냥 넘어갔을 법한 일들도 최근 들어서는 순식간에 큰 논란으로 번지며 추락하는 사례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른바 ‘유명인’을 꿈꾼다면 학창 시절부터 연애도 하지 말고 조용히 숨만 쉬며 살아야 한다”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이런 추세는 광고업계엔 큰 부담이다. 자사의 광고 모델이 좋지 않은 일로 도마 위에 오르게 되면 매출뿐만 아니라 기업 이미지에도 큰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단 11번가뿐만이 아니다. 최근 나이키 역시 광고 모델로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나이키는 지난해 초부터 쇼트트랙 국가 대표 심석희 선수를 모델로 내세웠다. 코치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당당하게 폭로하며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던 그를 앞세워 ‘우리의 힘을 믿어’라는 슬로건을 띄우며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끊이지 않는 연예인 사건·사고...광고계 블루칩 떠오른 ‘가상 인간’
하지만 심석희 선수의 ‘불법 도청’ 및 ‘고의 충돌’ 의혹이 불거지면서 나이키 또한 곤욕을 치렀다. 나이키는 현재 인스타그램에서 심석희 선수가 등장했던 광고를 모두 삭제했다. ‘우리의 힘을 믿어’라는 나이키의 슬로건 또한 의미가 퇴색하고 말았다.

이처럼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유명인들의 사생활 논란은 기업과 광고주들이 가상 인간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모델로 눈을 돌리게 된 결정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기술의 진보 또한 한몫했다. 과거 1990년대 후반에도 한때 가상 인간 열풍이 불었던 적이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한국 최초의 가상 인간으로 꼽히는 ‘사이버 가수’ 아담을 예로 들 수 있다. LG생활건강의 ‘레모니아’ 등에도 출연하며 큰 인기를 끌었지만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부족한 기술력이 원인이었다.

처음에는 아담을 신선하게 바라봤던 대중도 점점 부자연스러운 아담의 얼굴과 몸짓에 점차 흥미를 잃어 갔다. 하지만 최근에는 달라졌다.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진일보한 기술을 활용해 대중이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실제 사람과 비슷한 가상 인간 제작이 가능해졌다는 설명이다.

한 광고업계 관계자는 “광고의 목적은 결국 소비자들의 구매를 유도하는 것”이라며 “과거 가상 인간은 한눈에 봐도 괴리감이 느껴져 이런 역할을 하는 데 뚜렷한 한계를 보였지만 요즘엔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가상 인간들이 나와 막강한 팬덤을 구축하고 매력을 어필하는 등 좋은 효과를 낼 수 있는 광고 모델로 각광받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의 말처럼 싸이더스 스튜디오 엑스가 지난해 8월 첫선을 보인 가상 인간 ‘로지’는 신한라이프·LF·W컨셉 등 굵직한 대기업들을 비롯해 10여 개의 광고를 따내며 브라운관을 종횡무진하고 있다. 이를 통해 거둔 수익만 10억원이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디오비스튜디오가 제작한 가상 인간 ‘루이’ 역시 공공 기관과 일반 기업 등의 요청을 받아 10여 편 정도의 광고를 찍으며 얼굴을 알리고 있다.

이렇듯 가상 인간이 주목을 끌다 보니 ‘신인’들도 속속 나타나는 추세다. 롯데홈쇼핑은 가상 인간 ‘루시’를 직접 개발했다. 현재 인스타그램과 같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기반으로 여러 사진들을 올리며 활동을 시작했다. 벌써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3만 명을 넘었다.

롯데홈쇼핑 관계자는 “내년에는 루시가 방송에서 수화로 상품을 소개할 예정이고 추후엔 루시에게 쇼 호스트 역할도 맡길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 게임업계 등 여러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잇달아 가상 인간들을 선보이며 시장의 판을 키우고 있다.

로지의 제작사인 싸이더스 스튜디오 엑스의 백승엽 대표는 최근 열린 ‘2021 한경 디지털 ABCD 포럼’에서 “버추얼 인플루언서(가상 인간) 시장이 2025년 14조원으로 커질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인터뷰>
오제욱 디오비스튜디오 대표

“루이로 광고 매출 8억원…남자 가상 인간도 선보일 것”
오제욱 디오비스튜디오 대표와 가상 인간 루이.   사진=서범세 기자
오제욱 디오비스튜디오 대표와 가상 인간 루이. 사진=서범세 기자
광고업계에서 핫한 모델 중 하나인 ‘루이’는 이제 막 설립 2년 차에 접어든 스타트업 디오비스튜디오가 제작한 가상 인간이다. 루이는 지난해 말 처음 등장해 현재 일약 스타가 됐다.

CJ온스타일의 프라이빗 브랜드(PB) 모델을 비롯해 문화체육관광부 누리 홍보대사, 한국관광공사 명예 홍보대사로 위촉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유튜브 채널 ‘루이커버리’를 통해 K팝과 팝송을 불러 해외에서의 인지도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오제욱 디오비스튜디오 대표를 만나 루이의 제작 과정과 활동 계획 그리고 가상 인간 업계의 전망 등을 들었다.

-루이의 제작 과정이 궁금하다.
“약 2개월의 제작 과정을 거쳐 지난해 10월 루시가 세상에 나왔다. 회사 설립 전부터 개발자들과 관련 기술을 꾸준히 발전시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보통 가상 인간은 컴퓨터 그래픽(CG), 특수 시각 효과(VFX) 등의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제작되는데 루이는 인공지능(AI) 딥러닝을 활용한 가상 얼굴 생성과 변환 기술을 적용해 실제 사람과 같은 얼굴을 만들어 내는 것이 특징이다. 아직 보완할 부분이 있지만 국내외적으로 독보적인 기술을 갖췄다고 생각한다.”

-가상 인간이 등장하는 광고는 어떻게 만들어지나.
“사람이 하는 것과 똑같다. 실제 모델이 콘티에 맞춰 움직이면 앞서 설명했던 가상 얼굴 생성 및 변환 기술을 적용해 얼굴을 바꿔 한 편의 광고가 완성된다. 얼굴을 변환하는 기술에는 각각 차이가 있겠지만 현재 모든 가상 인간 광고는 실제 사람을 기반으로 제작되고 있다.”

-스타트업에서 만든 루이가 빠르게 광고계의 스타가 됐다. 어떻게 루이를 알렸나.
“처음에 가상 인간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루이가 노래하는 영상 등을 올렸는데 조회 수가 꽤 나왔다. 사실 루이가 실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네티즌들이 알아주길 바랐는데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더라. 결국 직접 루이가 사실 가상 인간이라는 사실을 영상에서 밝히자 ‘거짓말하지 마라’,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쏟아졌고 이런 사실이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됐다. 그러면서 기업과 공공 기관 등에서 먼저 광고를 찍자고 연락해 왔다. 광고 등을 통해 올해 8억원 정도의 매출이 예상된다.”

-노래하는 것도 디지털 기술로 완성하나.
“아이돌 연습생 출신의 실제 사람이 루이를 연기하고 있다. 목소리와 행동은 다 그의 것이고 그의 얼굴만 변환해 지금의 루이가 완성됐다.”

-가상 인간 시장의 미래를 어떻게 보나.
“미국의 미켈러는 현재 100억원 이상의 광고 수익을 내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 쪽에서도 인플루언서들이 각종 사건에 휘말리거나 몸값이 더욱 치솟으면서 가상 인간에 대한 니즈가 커지고 있다. 게다가 비대면 환경이 익숙해지고 ‘메타버스’ 등과 같은 새로운 플랫폼도 나타났다. 이런 환경에 맞춰 향후에는 지금과 같은 광고 모델보다 온라인에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가상 인간의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것으로 본다.”

-계획은 세웠나.
“루이에 이어 하마라는 새로운 남성 가상 인간을 곧 선보일 계획이다. 그리고 ‘부캐(본래 모습이 아닌 또 다른 캐릭터)’가 트렌드인 만큼 일반인들에게도 온라인에서 또 다른 자신을 만들 수 있도록 우리의 기술을 판매할 예정이다. 현재도 일반인들의 구매 문의가 이어지고 있는데, 이를 악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판매는 하지 않고 있다.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대책을 찾는 것이 숙제다.”

김정우 기자 enyo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