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에서 수소로’ 글로벌 수소 경제 주도권 싸움…지리적 이점, 산업 인프라, 정부 지원 삼박자
[스페셜 리포트] 글로벌 수소 경제를 선점하기 위한 국가별 주도권 싸움이 치열하다. 특히 유럽연합(EU)이 차세대 수소 밸리 구축을 위해 공격적인 투자를 진행하는 가운데 스페인 북동부 자치 지역인 카탈루냐가 지리적 이점과 산업 인프라, 주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신흥 수소 밸리’로 뜨고 있다.‘탄소에서 수소로.’
‘2050 탄소 중립’ 시대를 향한 속도가 빨라지면서 ‘수소 경제’의 패권 전쟁이 뜨거워지고 있다.
미래 먹거리로 떠오른 수소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글로벌 기업들의 경쟁도 치열하지만 글로벌 수소 경제의 핵심 거점이 과연 어디가 될 것인지 각 나라들의 주도권 경쟁도 뜨겁다.
세계적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에 따르면 2050년 수소는 전체 에너지 수요량 중 약 18%를 점유해 글로벌 수소 시장 규모는 약 2938조원, 투자 규모는 약 5000억 달러(약 593조원), 관련 일자리는 3000만 개 이상으로 예상된다.
이 거대한 시장의 핵심 거점이 되기 위해 각 나라들은 ‘수소 밸리’ 구축에 앞장서고 있다. 수소 밸리는 수소 기술을 응용한 생산-수송-저장-최종 사용에 이르기까지 전체 가치 사슬이 탄탄하게 연결된 하나의 통합된 생태계를 말한다. 즉 수소 생산부터 최종 사용에 이르기까지 모든 순환이 가능한 수소 집적화 단지다.
2000년대 ‘실리콘밸리’가 정보기술(IT) 혁명을 이끌면서 IT 산업과 금융·증시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듯이 거대한 글로벌 수소 시장을 빨아들일 차세대 수소 밸리는 어디가 될까. 수소 혁명 이끌 수소 밸리 경쟁
현재 수소 밸리에 가장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곳은 탄소 중립에 앞장서고 있는 유럽연합(EU)국들이다.
네덜란드는 풍력 발전과 해상 강국의 강점을 살려 세계 최초의 해상 수소 플랫폼 건설에 나서면서 수소 생산부터 충전까지 수소 에너지 사업을 중심으로 한 수소 밸리 구축 작업을 진행 중이다. 독일은 북부와 남부에 각기 정유·시멘트·수소 배관 등을 중심으로 한 수소 밸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탈리아·프랑스·영국 등에서도 대규모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있다.
EU국들 이외에도 세계 최대 수소 생산국인 중국은 광둥·산둥·장쑤성을 거점으로 수소 연료전지와 수소 자동차를 핵심 사업으로 한 수소 밸리 구축에 나섰고 캐나다·호주·일본 등도 수소 밸리 구축에 뛰어들고 있다.
EU의 수소 전략은 30년 동안 수소 생산에 최소 4700억 유로(약 627조원)를 투자해 2030년까지 EU 내 80기가와트의 녹색 수소 생산 용량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EU는 1460개 이상의 기업·조직·부처가 가입한 유럽청정수소동맹(ECH2A)을 설립하기도 했다. 회원들은 2030년까지 총 897만 톤의 수소 생산 능력을 계획하고 있고 그중 84%는 전기 분해(재생 에너지에서), 15%는 메탄화, 1%는 바이오제닉 재료에서 나올 것으로 보인다.
2030년 총 73기가와트의 전해조 용량이 계획된 스페인은 유럽 예상 용량의 52% 이상을 차지해 유럽 내 녹색 수소의 중심지가 될 전망이다. EU 내에서 2030년까지 176개의 전기 분해 프로젝트가, 2040년까지 약 136GW 용량의 230개 이상의 수소 에너지 프로젝트가 진행될 예정인데 그중 절반 이상이 스페인에서 개발될 예정이다.
남유럽의 최대 그린 에너지 허브가 되기를 희망하는 스페인에 흑색·회색 수소의 대안인 녹색 수소는 큰 기회다. 스페인은 2019년 기준 세계 14위의 경제 대국으로, EU에선 독일·프랑스·이탈리아에 이은 4대 경제권이고 신재생에너지 비율이 40%에 가까운 ‘탈탄소 선진국’이기도 하다. 스페인, 그린 에너지 허브 국가 도약
스페인 정부가 2020년 발표한 수소 로드맵에 따르면 스페인은 2030년까지 100~150대의 공공 수소 발전기, 5000~7500대의 수소 연료전지차(FCEV : Fuel Cell Electric Vehicle) 화물 운송 차량, 100~150대의 FCEV 버스, 2개 노선의 수소 화물 열차와 산업 내 수소 소비 25%를 전망하고 있다.
이런 스페인 정부의 구체적인 계획의 가능 여부를 확인하려면 먼저 그린 수소의 생산 능력을 살펴봐야 한다. 스페인의 수소 생산량은 연간 50만 톤이고 현재 생산되는 그린 수소는 연 50톤으로 0.01%에 불과한 미미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수소협회(AeH2) 등 산업 관계자들은 스페인 수소 경제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는 정부와 사회의 강력한 의지와 성숙한 기술력, 자원을 보유한 대기업의 적극적인 참여가 더해져 그린 수소 경제로 가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는 데서 오는 자신감이라고 볼 수 있다.
스페인 정부는 2020년 그린 수소 생산 프로젝트를 위해 유럽 회복 기금인 넥스트 제너레이션(Next Generation)을 통해 15억 유로(약 2조원)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2030년까지 총 투자 금액이 89억 유로(약 12조원)로 이미 기업들의 의향서를 접수했다. 약 5개월의 기간 동안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참여한 100억 유로(약 13조원)의 규모에 달하는 총 502개의 프로젝트가 접수됐다.
현재 스페인 전역에서 추진하고 있는 그린 수소 프로젝트에는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이 적극 참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컨대 로비라 비르질리대·렙솔·에나가스가 공동으로 운영해 수소 가치 사슬 통합 생태계를 카탈루냐 지역에 통합해 구성하겠다는 카탈루냐의 수소 밸리, 페트로노(Petronor)와 렙솔이 참여하는 바스크 지방의 수소 코리도(Hydrogen Corridor) 등이 대표적이다. 카탈루냐 수소 밸리의 경쟁력
이 중 스페인 북동부 자치 지역인 카탈루냐에서 추진 중인 카탈루냐 수소 밸리는 지리적 이점과 산업 인프라,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신흥 수소 밸리의 강자’로 뜨고 있다. 카탈루냐는 우리에겐 건축가 가우디의 고향으로, 명문 축구클럽 FC바르셀로나로 더 유명한 곳이지만 알고 보면 스페인 경제의 20%를 차지할 만큼 스페인 경제를 떠받치는 곳이다.
이곳이 신흥 수소 밸리로 떠오르고 있는 경쟁력은 크게 네 가지다. 먼저, 유럽 진출의 교두보라고 불리는 지리적 이점이다. 카탈루냐는 지중해를 면한 바르셀로나항과 타라고나항을 중심으로 항만 교통은 물론 지중해 철도망을 중심으로 한 철도 교통, 바르셀로나공항 등이 발달해 오랫동안 유럽과 아프리카는 물론 미주와 아시아까지 효율적으로 연결하는 물류 거점이 돼 왔다. 세계 최대 이커머스 플랫폼 아마존이 카탈루냐에 판매지원센터(Seller Support Hub)를 둔 것도, 부산항만공사가 한국 수출 기업의 안정적인 물류망 구축을 위해 이곳을 물류 거점으로 삼은 것도 바로 이런 경쟁력 때문이다. 생산된 수소 에너지의 안정적인 이송과 뮬류 운송에 최대의 이점을 발휘할 수 있다.
둘째, 정보통신기술(ICT)·자동차·에너지·화학 등 산업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다. 카탈루냐의 중심 도시인 바르셀로나는 ICT 분야의 강자로 세계 3대 가전 IT 전시회인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WC)가 매년 열리는 곳이다. 세계에서 다섯째로 꼽히는 스타트업의 도시로, ICT 산업 생태계와 클러스터를 이미 갖춘 것이 장점이다. 또 유럽 2위의 자동차 생산국으로서 유럽 전기차 생산의 핵심 거점이기도 하다. 전기차 부품 생산부터 완성차 조립까지 모든 생산 공정을 아우를 수 있고 이제는 수소 모빌리티(버스·승용차·항공·선박 등 운송 수단)의 전략적 요충지로 거듭나고 있다.
스페인은 현재 전기차에 과감하게 투자하고 있는데 2년 내에 전기차를 25만 대까지 늘린다는 계획과 함께 수소 전지와 수소 차량 생산, 수소 충전소 설치 사업에도 6조원 이상의 투자 자금을 쏟아부을 계획이다.
에너지 산업 역시 스페인의 또 하나의 강점이다. 유럽 최고의 일조량과 지중해 덕분에 지리적으로도 신재생에너지를 생산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는데 이베르드롤라·가메사·엔데사 등 스페인 기업들은 태양광이나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분야에서 우수한 기술력을 갖추고 있고 그린 수소 생산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온화한 기후와 풍부한 인적 자원도 강점이다. 바르셀로나는 지중해 연안의 온화한 기후와 독특한 건축물들로 늘 유럽의 인기 거주 도시로 꼽힌다. 그만큼 인재 확보에도 유리하다. 세계 유수의 대학인 바르셀로나대와 카탈루냐 폴리테크닉대 등이 인근에 포진해 있고 기술 이전을 지원하는 응용·기초 연구 기관과 과학기술센터 등의 네트워크도 형성돼 있다. 지난 5월 공식적으로 오픈한 ‘카탈루냐 수소 밸리’에는 이미 화학 산업, 기타 대기업(약 90개), 연구·개발(R&D)센터(12개) 외에도 공공 행정 (40개), 타라고나 항구, 협회·비즈니스 클러스터 (20개) 등 다양한 구성원이 참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카탈루냐 주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다. 스페인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앞선 자치 지역인 만큼 카탈루냐는 기업들을 유치하기 위한 독자적인 행보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주변국보다 낮은 법인 세율인 25%를 기업에 적용하고 R&D 촉진을 위한 세금 공제 제도도 갖추고 있다. 또 연소득 60만 유로(약 9억원)에 대해 외국인에겐 25%의 단일 세율을 적용한다. 카탈루냐 진출 기업들의 성공을 위해 입지 선정부터 전문 인력과 정보 제공, 각종 허가 지원, 주요 기관 및 기업들과의 네트워킹 등의 서비스에도 적극적이다.
지난 6월 문재인 대통령의 유럽 순방 때 스페인과의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고 바르셀로나와 카탈루냐에서의 교류와 협력을 약속한 것도 스페인과 카탈루냐의 이런 적극적인 행보와 무관하지 않다.
수소 연료전지, 수소차 모빌리티, 충전소, 수소 저장 탱크나 밸브, 제조 플랜트 등 카탈루냐의 글로벌 수소 경제 경쟁력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수소 소비 분야 블루오션…“한국엔 기회의 땅”스페인은 전통적으로 강세인 에너지·화학 산업 기반 덕분에 그린 수소 생산이 어렵지 않고 이에 수소 경제를 달성하는 데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생산된 수소를 소비할 소비처의 개발은 부족한 상황이다. 카탈루냐 주정부는 카탈루냐 수소 밸리가 수소 소비 분야의 블루오션이라며 해외 기업들에 적극적인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카탈루냐 무역투자청 내 수소 밸리 프로젝트 담당자 산드라 콜롬 씨는 “수소 밸리 내에서 추진되고 있는 대부분의 프로젝트가 수소 생산과 관련된 것으로 수요에 비해 공급이 많은 상황”이라며 “저장과 운송 특히 수소 소비 분야는 현지 기업이 사실상 전무한 블루오션”이라고 밝혔다. 그는 “수소 연료전지, 수소 차량 등의 분야에 한국 기업의 적극적인 현지 진출을 기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 K기업들의 진출도 활발하다. 수소 차량 선도 기업인 현대자동차 역시 스페인 진출을 확대하고 있다. 현대차는 스페인 에너지 기업인 에나가스(Enagas)와 함께 수소차 대중화를 위한 그린 수소 생산 개발에 나섰고 기아는 스페인 최대 정유사인 렙솔SA와 전기차 충전소 설치 사업에 협력 계약을 체결했다. 또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은 로컬 기업인 에바엠과 액화천연가스(LNG)를 수소로 전환해 사용하는 수소 연료전지차 시제품을 만들어 카탈루냐 지역에서 시험 운행하는 프로젝트를 전개 중이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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