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 줄어드는데 오르는 물가…새 정부가 해결해야 할 경제 이슈
[한상춘의 국제경제 심층 분석] 금융 위기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했던 ‘뉴 노멀’ 현상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면서 심화되는 모양새다. 특히 종전의 규범·이론·관행 등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뉴 노멀 현상은 경제 분야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약해진 세계 경제 결속과 미국 중심 경제뉴 노멀 시대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국가’를 전제로 했던 종전의 세계 경제 질서가 흔들리는 현상이다. 모든 국가를 대상으로 한 세계무역기구(WTO)와 뉴라운드, 파리 기후변화협약 등 다자주의 채널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 국제 규범의 구속력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국제 통화 질서를 봐도 여러 국가의 탈(脫)달러화 조짐이 뚜렷하다. 세계 경제 중심권이 이동됨에 따라 현재의 국제 통화 제도가 안고 있던 문제점이 도드라진 것이다. △중심 통화의 유동성과 신뢰성 간 ‘트리핀 딜레마’ △중심 통화국의 과도한 특권 △국제 불균형 조정 메커니즘 부재 등이 심해지면서 탈달러화 조짐이 빨라지는 추세다.
트리핀 딜레마는 1947년 벨기에 경제학자 로버트 트리핀이 제시한 것으로 유동성과 신뢰성 간의 상충 관계를 말한다. 중심 통화국인 미국은 경상수지 적자에도 통화를 계속 공급해야 한다. 하지만 이 상황이 지속되면 대외 부채 증가로 신뢰성이 떨어져 공급된 통화가 돌아오는 메커니즘이 무너져 미국이 기존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세계 경제와 국제 통화 질서의 틀이 붕괴되면 시장은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같은 ‘포퓰리스트’가 날뛴다. 세계화의 쇠퇴를 의미하는 ‘슬로벌라이제이션’이란 신조어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슬로벌라이제이션은 올해 다보스 포럼에서 제시됐던 ‘세계화 4.0’과 같은 의미다.
최근의 세계 경제와 각국 통화 정책에 최대 현안으로 등장하는 인플레이션에도 뉴 노멀 현상이 나타난다.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지난 4월 발표된 후 갑작스럽게 불거진 인플레이션이 ‘일시적’일지를 두고 지속되던 논쟁은 최근에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인플레이션은 크게 봤을 때 비용 상승과 수요 견인으로 나눠진다. 비용 상승 인플레이션은 원인에 따라 그린플레이션과 애그플레이션 등으로, 상승 속도로는 마일드‧캘로핑‧하이퍼 등으로, 경기 성장률로 볼 때는 디플레이션·스태그플레이션·슬로플레이션·골디락스 등으로, 정책 의지와 결부돼서는 리플레이션과 디스인플레이션 등으로 구분된다.
최근 인플레이션의 문제는 모든 우려가 한꺼번에 나타날 수 있는 ‘다중 복합 공선형 구조’라는 점이다. 가장 큰 요인은 코로나19 사태가 보이는 독특한 특성 때문이다. 뉴 노멀 디스토피아의 첫 사례인 코로나19 충격으로 미국 중앙은행(Fed)은 무제한 통화 공급으로 대응했다.
어빙 피셔의 화폐 수량설에 따르면 통화 공급은 그대로 물가로 연결된다. 전염성이 강한 코로나19 사태는 백신만 보급되면 세계 경제가 ‘절연’에서 ‘연계’ 체제로 이행되고 돈이 돌기 시작하면 ‘쇼크’라는 용어가 나올 만큼 인플레이션 우려가 불거진다.
인플레이션 지속 여부를 놓고 일시적인지 논쟁이 거세질 무렵, 세계 각국의 2분기 성장률이 높게 나오자 정책 요인에 의해 촉발된 인플레이션이 수요 견인 인플레이션으로 옮겨지면서 ‘하이퍼 인플레이션’ 우려까지 제기됐다. ‘오쿤의 법칙’으로 올해 미국 경제성장률을 평가해 보면 국제통화기금(IMF)의 전망치보다 무려 5%의 인플레이션 갭이 발생한다.
하지만 하이퍼 인플레이션은 여름이 지나자 노동 시장을 중심으로 심화된 병목과 기후 변화, 공급망 부족 등으로 비용 요건이 악화되자 이번에는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로 변했다. 하이퍼 인플레이션과 스태그플레이션을 두고 슬로플레이션과 디스인플레이션 등도 난무하는 모양새다.
인플레이션이 최대 현안으로 등장함에 따라 통화 정책의 우선순위부터 바뀌고 있다. Fed는 1913년 설립 이후 ‘물가 안정’을 추구해 오다가 2012년부터 ‘고용 목표’를 양대 책무로 설정했다. 현재는 고용 목표 달성에 통화 정책의 중점을 두고 운용 중이다. 반면 코로나19 사태로 인플레이션이 고착화될 움직임이 나타나자 다시 물가 안정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힘든 일상에 인플레이션까지 ‘첩첩산중’
한경 밀레니엄 포럼은 새 정부가 출범하는 내년 한국 경제에 관해 ‘스크루플레이션’이 최대 화두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스크루플레이션은 미국 헤지펀드 업체인 시브리즈파트너스의 더글러스 카스 대표가 처음 언급한 것으로, 쥐어짠다는 의미의 ‘스크루’와 물가가 오르는 ‘인플레이션’의 합성어다.
스크루플레이션은 스태그플레이션과 구별된다. 후자는 거시 경제 차원에서 경기가 침체되면 지표 물가가 올라가는 현상이지만 전자는 미시적 차원에서 쥐어짤 만큼 일상생활이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장바구니 물가가 오르는 것을 말한다. 국민으로선 전자가 나타나면 후자보다 더 어려운 상황을 맞이한다.
예측 기관들도 새 정부가 출범하는 내년에 한국 경제가 스크루플레이션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한국의 가계 부채는 1800조원을 넘어 세계 10대 고위험군에 속한 지 오래다.
중·장기적으로 잠재 성장률이 0%대로 떨어질 것이라는 목소리도 나올 정도로 성장 기반이 약화되는 추세다. 국민이 느끼는 체감 물가도 뛰기 시작했고 앞으로 더 올라갈 것으로 예상된다.
스크루플레이션이 무서운 것은 경제고통(실업률·물가상승률)이 급격히 높아진다는 점이다. 소득이 줄었는데 체감 물가가 올라 일생생활이 어려워진다. 국민의 입에서 살기 힘들다는 하소연만 나온다. 이를 정책 당국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제 정책의 최우선순위는 민생 경제 안정부터다.
국정 운영의 우선순위는 대외보다 대내에 맞춰져야 한다. 또 경제 각료는 경직된 사고보다 유연한 사고를 갖춰야 할 시점이다. 본인의 이념이나 주장의 틀 속에 갇히는 것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경제 정책과 운용에 변화를 주지 않으면 스크루플레이션은 현실이 될 수 있다. 새 정부는 이를 염두에 두고 경제 정책을 수립, 추진해야 한다.
한상춘 국제금융 대기자 겸 한국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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