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통화 당국, 개인의 선택 제한에도 ‘디지털 통화’ 야심…‘개인 자유 보호’ 위한 비트코인 중요성

‘디지털 달러’가 비트코인을 대체하지 못하는 이유 [비트코인 A to Z]
예고한 지 6개월이 지나서야 미국 중앙은행(Fed)의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 : 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보고서가 공개됐다.

CBDC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말하는 기관마다 차이가 크다. 하지만 가상 자산이 범람할 때 각국의 중앙은행들이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디지털 통화를 발행하면 비트코인과 같은 암호화폐들은 대거 정리된다는 전망에는 차이가 없다.

그런데 Fed의 보고서에서는 블록체인을 뜻하는 가상화폐나 분산 장부, 블록체인이라는 단어가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여러 기관들이 만든 CBDC 연구 검토 보고서들과는 달러 CBDC의 기술적 특징과 구조에 대해 충분한 설명이 없는 것도 눈에 띈다.

다시 말해, 이는 달러 CBDC가 비트코인·블록체인·가상화폐의 등장에 대한 대응이 아니라 이와 무관하게 진행돼 온 프로젝트일 수 있다는 가설에 무게를 실어 준다. 세계 통화 당국의 야심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세계 금융 엘리트들과 통화 시스템의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한 금융 분석가 제임스 리카즈는 그의 책 ‘은행이 멈추는 날’에서 종이돈을 없애려는 세계 통화 당국의 야심을 경고했다.

그의 지적대로 달러 CBDC는 종이돈을 없애고 자산을 모두 전산화하려는 오래된 기획의 일환일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달러 CBDC를 만들어야만 하는 이유를 찾기 어렵다. 보고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미 통화 시스템은 상당 부분 전자화돼 있다.

Fed가 달러를 발행할 때 종이돈을 찍어 시중에 뿌리는 비율은 높지 않다. 본원 통화의 상당 부분은 상업은행들의 계좌에 전자 형태로 꽂아 준다. 달러 CBDC가 전자화폐의 편리성을 극적으로 향상시킬 수 없다는 의미다. 게다가 CBDC는 상업은행들에 충격을 준다.

보고서가 가장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는 부분은 바로 상업은행과의 협업 시스템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다. 호주 중앙은행이 발행한 CBDC 보고서에 따르면 호주 은행들의 예금 자산 60% 이상이 단기 예금이라고 한다.

즉, 중앙은행이 전자화된 화폐를 발행하면 상업은행의 요구불 예금 상당 부분이 사라지게 된다. 은행 면허는 고객이 맡긴 단기 예금을 장기로 대출하면서 예대 마진을 독점적으로 얻는 특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는 고객들이 한꺼번에 돈을 인출하지 않는다는 경험에 따른 것인데 상업은행은 본원 통화보다 훨씬 많은 유동성을 시중에 공급해 왔다.

하지만 신용 위기가 오면 고객들이 은행을 믿지 못하고 예금을 인출하려고 길게 줄을 서는 뱅크런이 발생한다. 중앙은행은 바로 이런 위기에서 거의 무제한 신용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상업은행들을 구하기 위해 설립됐다.

그런데 중앙은행이 CBDC를 발행해 국민에게 디지털 화폐를 공급하면 얼마 안 되는 이자 때문에 이미 전자화폐인 달러 CBDC를 은행에 맡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즉 상업은행을 위기에서 구해 내기 위해 설립된 중앙은행이 상업은행의 기둥뿌리 하나를 철거한다는 자기모순에 직면하고 만다.

Fed의 CBDC 보고서는 블록체인이나 암호화 기술을 이용하려는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향후 달러 CBDC를 언급할 때 전제로 삼아야 할 만큼 중요한 사안이다. 비트코인의 혁신성은 코인의 소유자를 검증하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디지털 결제 수단이라는 점에 있다.

초창기 얼마 안 되는 커뮤니티였지만 우수한 두뇌들이 열정적으로 모여들었던 이유도 돈을 e메일처럼 보내는 기술에 감탄했기 때문이다. 당시 인터넷은 이미 비자나 마스터카드는 물론 온라인 뱅킹과 휴대전화 결제를 비롯한 다양한 결제 수단에 접근할 수 있었다. 비트코인이 해결하는 문제는 어떤 ‘소비자 불편’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암호화폐가 등장하기 전까지 인터넷은 소액 결제를 지원하지 못했다. 소액 결제는 액수의 많고 적음보다 인터넷의 디지털 콘텐츠를 건당 계산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웹툰이나 기사를 하나 보기 위해 회원에 가입한다든지 콘텐츠 가격보다 비싼 수수료를 지불한다든지 아니면 개인의 금융 정보를 노출해야만 한다.

길을 가다가 노점에서 핫도그를 살 때 종이돈만 내밀면 신원 인증 없이도 거래가 완결되는 그런 디지털 현찰이 없었다. 구글이나 네이버 같은 인터넷 기업들이 대형화 된 이유 중 하나도 자신의 정보를 이미 다 가지고 있는 플랫폼을 재사용하는 편이 결제 문제를 간편하게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개인 정보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위폐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비트코인과 암호화폐는 디지털 현찰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달러 CBDC는 전자화된 달러가 아니다. 차라리 개인과 기업들의 중앙은행 계좌에 가깝다. 물론 중앙은행이 개인들에게 직접 계좌를 주는 것이 현행 법으로는 불법이기 때문에 보고서는 중간에 지갑업자를 둔 간접적 시스템에 무게를 싣고 있다.

어떤 디자인이건 간에 달러 CBDC는 사람을 인증한다. 그래서 모든 거래 기록을 확보할 수 있다. 보고서는 이 특성을 직접 언급하는 대신 자금 세탁 문제가 없는 해결책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미국의 고성능 통화를 외국의 개인이나 기업들이 자유롭게 직접 소유하는 것은 현행 시스템에서는 많은 문제를 유발한다. 하지만 보고서는 이를 쟁점으로 다루지조차 않았다. 국경을 넘을 때 현행 시스템보다 수수료를 절감할 수 있다는 장점을 설명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개별 국가의 통화 주권에 대한 위협을 문제 삼지 않았다.

이는 허가 받은 지갑만이 디지털 달러, 즉 달러 CBDC를 주고받을 수 있게 한다는 설계의 기본적인 특성을 강하게 암시한다. 아마도 외국의 개인이나 기업은 자국 정부의 엄격한 심사를 거친 뒤 미국 Fed으로부터 지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종합적으로 살펴 볼 때 달러 CBDC의 구조는 현금을 없애려는 통화 당국의 의도에 대한 리카즈의 추론에 부합한다. 그렇다면 현찰을 없애려는 의도는 무엇일까.유동성의 함정, 프라이버시의 희생 리카즈에 따르면 디지털 자신이 현금 자산보다 통제와 조절이 쉽기 때문이다. 리카즈는 거시경제학적으로 이런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는 타당한 이유를 설명한다. 바로 유동성의 함정 때문이다.

유동성의 함정은 경제 주체들이 시장에 대한 전망을 잃어 버려 중앙은행이 막대한 양의 화폐를 공급해도 쓰지 않고 저축만 하려는 상태다. 통화 정책이 작동하지 않으므로 정부가 가장 큰 소비자로서 직접 소비를 창출하는 재정 정책이 적절하다는 것이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주장이다. 하지만 경제 주체들이 정부가 프로그램할 수 있는 디지털 형태로 돈을 보유하고 있다면 유동성 함정을 간단하게 극복할 수 있다.

개인들이 달러 CBDC를 소유하는 것 이외에는 뾰족한 대안이 없다면 보유 액수와 한도를 제한하고 마이너스 이자율을 적용하면 소비에 나설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사용하지 않는 돈은 점점 썩어 가치를 잃어 버리는 셈이다.

공교롭게도 Fed의 CBDC 보고서는 액수 제한과 차별적 이자율에 대해서도 다른 맥락에서 언급하고 있다. 아무튼 경제 주체들이 중앙은행이 발행한 디지털 통화를 사용하게 되면 정부는 거시경제의 정책 목표를 미세 조정을 통해 손쉽게 달성할 수 있다.

조금 더 나아가자면 사용처도 제한할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생산자를 시장에서 간단하게 퇴출시킬 수도 있다. 즉 달러 CBDC는 개인들의 편리함을 위해서라기보다 정부의 정책적 재량권을 확대하는 데 유용하다. 하지만 그 대가는 자유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프라이버시의 희생이다.

보고서도 프라이버시 문제를 여러 쟁점 중 하나로 언급하지만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Fed의 보고서가 나오기 전에 관련 정보를 입수한 미국 정치권에서는 개인의 정보 보호를 위해 CBDC 발행을 금지해야 한다는 법률 제안이 나오기도 했다.

리카즈에 따르면 평소에는 가능하지 않던 발상이라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나 금융 위기와 같은 격변에서는 가능하다고 한다. 특히 정책적 재량권을 확대하는 데 관심이 있는 엘리트 국민이 빠른 해결책을 원하는 위기 상황이라는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는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Fed의 보고서에서 전제하는 달러 CBDC는 절대로 비트코인을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중앙은행이 개인의 선택권을 제한하려는 디지털 통화를 밀어붙일수록 디지털 생활권이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게 될 메타버스 시대를 대비해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비트코인이 반드시 앞서 발명됐어야 했다는 역사의 보이지 않는 섭리를 일깨워 줄 것이다.

오태민 '비트코인은 강했다', '비트코인 지혜의 족보'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