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라이즌, 거리 두기 기능 도입…“성범죄 처벌 공백, 형사적 제재 필요성” 강력 대두

[스페셜 리포트]
메타버스 안 추악한 그늘, ‘아바타 성범죄’
“현실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악몽이었다.”

최근 미국의 한 메타버스 서비스 이용자가 자신의 아바타가 3~4명의 남성 아바타에게 가상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며 충격을 주고 있다. 해당 서비스는 상황의 심각성을 받아들여 즉각 ‘아바타 간 거리 두기’ 기능을 신설했다. 전문가들은 메타버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성범죄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아바타 성범죄, ‘현실’인가 ‘가상’인가.


메타(구 페이스북)의 자회사 호라이즌은 2월 4일 자사의 가상현실(VR) 메타버스 플랫폼인 호라이즌 월드에 아바타 간 거리 두기 기능을 도입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아바타 간 약 4피트(120cm)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아바타 주변에 ‘개인 경계’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을 추가하는 기능이다.

호라이즌은 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와 같은 전염병이 없는 VR 세계에 아바타 간 거리 두기 기능을 도입했을까.

소셜 VR의 새로운 기준 설정

“저는 최근 메타버스 안에서 성희롱을 당했습니다. 접속한 지 60초도 채 되지 않았는데 3~4명의 남성 아바타들이 내 아바타를 강간하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내가 도망치려고 하자 그들은 음성 채팅으로 ‘좋아하지 않는 척하지 마’라고 소리쳤습니다. 그것은 끔찍한 악몽이었습니다.”

메타버스 기술 연구 업체인 카부니의 니나 파텔 부사장은 지난해 12월 22일 온라인에 ‘현실인가, 가상인가’란 제목의 글을 올렸다. 메타의 VR 메타버스 플랫폼인 호라이즌 월드에서 자신의 아바타가 남성 아바타들에 의해 성폭행 당했고 너무 빠르게 일어난 사건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당시 파텔 부사장의 악몽같은 경험이 공유되자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바보처럼 굴지 마세요, 진짜가 아니잖아요’, ‘아바타들은 폭행할 하체가 없어요’, ‘여성 아바타를 선택하지 마세요. 간단한 해결책입니다’, ‘이런 경험을 하게 되다니 정말 유감입니다’ 등 아바타 성범죄를 주장한 그를 향해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졌다. 파텔 부사장은 “VR은 본질적으로 마음과 몸이 가상 경험을 실제와 구별할 수 없도록 설계됐다”며 “나의 생리적이고 심리적인 반응은 마치 현실에서 일어난 일처럼 동일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의 경험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와 뉴스를 통해 공유되자 파장이 커졌다. 호라이즌 측은 내부 검토를 통해 ‘개인 경계’, 즉 아바타 간 거리 두기란 신규 기능을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비벡 샤르마 호라이즌 부사장은 “아바타가 서로 일정 거리 내에 오는 것을 방지해 사람들은 더 많은 개인 공간을 만들고 원하지 않는 상호 작용을 쉽게 피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호라이즌 측은 이번 새 기능이 사람들의 경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면서 시스템을 계속 계선하겠다고 밝혔다. 샤르마 부사장은 “우리는 이 기능이 (메타버스상에서 이용자들의) 행동 규범을 설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이번 사건은) ‘중요한 단계’이며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말했다.
호라이즌월드의 아바타 간 거리두기. /사진=호라이즌
호라이즌월드의 아바타 간 거리두기. /사진=호라이즌
호라이즌월드의 아바타 간 거리두기. /사진=호라이즌
호라이즌월드의 아바타 간 거리두기. /사진=호라이즌
2016년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화제를 모았다. VR 게임인 ‘퀴브이아르’의 한 이용자가 아바타 성추행 피해를 당한 후 CNN머니와의 인터뷰에서 “과거 실제로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는데 그때의 쇼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말한 것이다.

피해자의 경험담이 공유되자 퀴브이아르 측은 게임 안에 성추행 등으로 괴롭히는 상대를 튕겨내 버리는 기능인 ‘퍼스널 버블’을 추가했다. 게임 개발자인 헨리 잭슨은 “만약 그가 손가락만 이용해 가볍게 치는 것만으로 마치 개미를 날리듯 그 나쁜 플레이어를 날려 버릴 수 있었다면 그 글쓴이의 경험은 어떻게 달라졌을까”라며 “VR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나 ‘포비아’ 등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VR이 구현하는 엄청난 리얼리티 덕에 사람의 심리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그 반대 효과 역시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말했다.


신기술의 등장 뒤에는 아이로니컬하게도 항상 새로운 성(性) 문제가 뒤따라온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2000년 쓴 ‘신종 성폭력 연구-사이버 성폭력 실태 및 대책을 중심으로’에 따르면 당시 인터넷의 발전과 대중화로 사이버스 토킹, 원조 교제, 몰래 카메라 등의 성문제가 새로 등장했다.

최근에는 메타버스 안에 그늘이 생겨나고 있다. ‘현실과 닮은 가상 세계’이자 이용자 간 상호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는 특징 때문에 이를 악용한 범죄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메타버스에서 벌어지는 아바타 간 성범죄는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에서도 메타버스상 성범죄가 대두되고 있다. 특히 제페토 등 대중적인 메타버스 플랫폼 이용자의 10명 중 7명은 미성년자이고 미성년자의 절반 이상은 12세 이하인 것으로 조사돼 아동·청소년이 메타버스 플랫폼을 매개로 한 성범죄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최근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메타버스 내 대화방에 13세 미만의 아동·청소년을 초대해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메시지를 전송하거나 메타버스에서 알게 된 피해자와 연락처 교환을 통해 휴대전화로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메시지를 전송하는 사례가 발생했다. 또한 아동·청소년을 유인해 지속적으로 피해자의 노출 사진을 전송받아 성착취물을 제작한 사건도 있었다.

심하게는 메타버스 서비스상에서 아바타 간 유사 성행위를 요구한 사례도 있었다. 해당 플랫폼 서비스는 성적인 행동을 묘사하는 조작을 할 수 없도록 돼 있지만 엎드리기·앉기·먹기 등의 단순 조작을 유사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행위로 탈바꿈시킴으로써 이용자에게 성적 수치심을 유발한 것이다.
메타버스 안 추악한 그늘, ‘아바타 성범죄’
‘리얼 메타버스’ 촉각 느낄 땐…

전문가들은 메타버스의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아바타 간 성범죄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를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정희진 탁틴내일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 팀장은 1월 27일 열린 ‘메타버스 매개 아동 청소년 성착취 현황과 대응 방안 토론회’에서 “온라인 성착취에 대응하기 위해 인공지능(AI), 머신러닝, 언어 분석 등 새로운 기술과 정책을 도입하고 있지만 기술 발전과 동시에 온라인상 성착취 범죄 수법 역시 날로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메타버스상 성범죄는 아바타를 매개로 하는 대화가 상대방에 대한 경계를 약화시킬 수 있고 반대로 아바타와 자신을 동일시할 때 가상 세계에서의 피해 구분이 어려울 수 있어 위험 요인이 존재한다”고 덧붙였다.

아직까지 VR 기술은 인간의 오감 중 시각과 청각 경험만이 이용자에게 일부 전달되는 수준이다. 업계에선 시각과 청각에 이어 촉각·후각·미각 등 오감 전체를 전달하는 이른바 ‘지능형 메타버스’를 구현하기 위해 기술 개발에 한창이다.

2019년 스웨덴의 통신 제조 장비사인 에릭슨은 ‘인터넷 오브 센스(Internet of Sense)’ 보고서에서 2030년쯤엔 스마트폰 화면에 보이는 물건의 재질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촉각을 느낄 날이 보다 앞당겨질 가능성도 있다.
메타의 햅틱 장갑 시제품. 사진=메타 제공
메타의 햅틱 장갑 시제품. 사진=메타 제공
실제 메타는 VR 속의 물체를 손으로 느낄 수 있는 햅틱 장갑 시제품 개발에 성공했다고 지난해 밝혔다. 이 장갑은 메타의 연구소인 리얼리티랩스가 7년간 연구한 제품으로, 추후 이 회사의 오큘러스 VR 시스템에 결합해 보다 완벽한 VR 세계를 구축하는 데 쓰일 예정이다.

마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주인공이 고글·헤드셋·글러브 등으로 구성된 햅틱슈트(haptic-suit)를 착용해 외부 자극을 몸으로 느낀 것처럼 메타버스상에서 이용자가 아바타를 통해 외부 자극을 몸으로 느낄 일도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 개발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지만 아바타 성범죄와 같은 부작용과 관련된 논의는 한국에서는 이제 막 포문을 연 단계다.

한국의 대표적 메타버스 플랫폼인 제페토는 AI 기술을 통해 금칙어를 걸러내고 캠페인을 통해 이용자에게 메타버스상 윤리 의식을 고취하는 방식으로 아바타 간 성범죄 등을 방지하고 있다. ‘상대방의 외모 평가는 자제해 주세요’와 같은 캠페인이나 채팅에서 음란성 발언, 불건전 행위 등 가이드라인을 지키지 않으면 제재하는 방식이다. 제페토 관계자는 “메타버스상에서 벌어지는 일부 부작용을 막기 위해 모니터링을 계속하고 있다”며 “사용자의 경험과 메타버스상 행동 양식을 주의 깊게 지켜보며 플랫폼에 적합한 해결 방식을 계속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회적 대응 방안 물꼬

보다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사업자에게는 더 큰 책임이, 가해자에게는 법적 제재가 따라야 한다는 의견이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월 18일 메타버스 등 온라인 플랫폼을 이용한 아동·청소년 대상 그루밍 성범죄 예방 및 즉각 대응을 위한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메타버스 등 온라인 플랫폼 사업자가 자신이 운영·관리하는 정보통신망에서 청소년성보호법 제15조의2 제1항 및 제2항에 해당하는 아동·청소년에 대한 성착취 대화 등 관련 범죄를 인지한 경우 즉시 수사 기관에 신고하도록 하는 신고 의무 조항이 담겼다. 강 의원은 “메타버스 등 온라인상의 아동·청소년 성착취는 피해 아동이 자신이 범죄를 당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성착취 범죄가 신고로 이어지기 어렵다”며 “아동·청소년 성착취 목적 대화 금지 조항이 신설된 만큼 메타버스 등 온라인 플랫폼 사업자가 범죄 행위를 발견하는 즉시 수사 기관에 신고하는 등 더욱 적극적인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현재 법은 메타버스 등 디지털 성범죄의 특성을 고려한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빈틈이 있기 때문에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서지현 법무부 디지털 성범죄 TF 팀장은 “메타버스 내 성적 폭력과 괴롭힘은 성적 이미지를 이용한 디지털 성범죄뿐만 아니라 ‘언어’를 매개로 이뤄지는 것이 많다”며 “전통적으로 성범죄는 신체적 성폭력 행위 위주로 형사적인 규제가 이뤄졌지만 네트워크 기술의 발달과 통신 매체를 이용한 의사소통이 확대됨에 따라 신체적 접촉 없이 온라인 네트워크를 이용해 타인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들에 대한 형사적 제재의 필요성이 강력히 대두된다”고 강조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