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문 잠그는 국가들…“곳곳에서 폭동 발생할 수도”
[글로벌 현장] 데이비드 비즐리 세계식량기구(WFP) 사무총장은 최근 트위터에 절절한 호소문을 띄웠다. 세계에 절체절명의 식량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였다.비즐리 사무총장은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많은 지역에서 불가피하게 식량 위기를 겪게 될 것”이라며 “WFP의 운영 비용만 매달 6000만~7500만 달러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올해 식량 안보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며 “만성적으로 식량이 부족한 아프리카에선 종전보다 기아가 심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글로벌 식량 부족이 취약 국가와 저소득층에 더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얘기다. 1990년대 경제 제재로 식량이 부족했던 이라크에선 50만여 명의 어린이가 영양 실조로 사망했다는 통계도 있다.
농업 부문의 시장 분석가인 압돌레자 아바시안 전 세계식량기구(FAO) 선임이코노미스트는 “지난 30여 년간 글로벌 시장을 지켜봐 왔지만 지금처럼 심각한 식량 부족 위기는 처음 경험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제 기구의 경고 “곡물 가격 20% 더 뛸 것”
동유럽 전쟁이 세계 식량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큰 이유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비중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두 나라는 서양인들의 주식인 밀 생산량의 4분의 1을 도맡고 있다. 해바라기씨유의 생산 비율은 80%에 달한다. 드넓은 곡창 지대를 끼고 있기 때문이다. 보리·옥수수·귀리 등도 많이 경작하고 있다. 두 나라가 유럽의 빵바구니(breadbasket)라고 불리는 배경이다. 밀·옥수수·쌀은 전 세계 인구가 섭취하는 열량의 40% 이상을 차지한다.
비즐리 총장은 “세계의 기아 인구가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 이전만 해도 약 8000만 명이었는데 이번 전쟁 직전 2억7600만 명까지 불어났다”며 “전쟁 이후엔 기아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고 걱정했다.
FAO도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 국제기구에 따르면 밀 가격은 앞으로 8.7~21.5%, 옥수수 가격은 8.2~19.5% 더 뛸 수 있다. 최악의 시나리오에서 밀과 옥수수 가격이 20% 안팎 급등할 것이란 경고다. 상당수 곡물 가격은 이미 올 들어서만 최고 두 배 가까이 뛴 상태다.
FAO가 매달 발표하는 세계식량가격지수(FFPI)는 올 2월 기준 140.7로, 1년 전보다 20.7% 상승했다. 1996년 집계를 내기 시작한 이후 최고치다. 식량가격지수는 2002∼2004년 평균치를 100으로 정해 산정한 수치다.
옥수수와 과일 등을 수출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시로보 농업상공회의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지금은 곡물 가격 인상이 문제이지만 조만간 필수 작물의 부족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돈을 주고도 식량을 구하지 못하는 사태가 빚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특히 일부 국가는 더욱 위험한 것으로 평가된다. 중동 국가인 레바논은 자국에서 소비하는 밀의 90%를 우크라이나에서 수입해 왔다. 레바논 외에 시리아·리비아·소말리아 등은 자국 식량 안보의 상당 부분을 우크라이나에 의존해 왔다. 터키는 전체 수입 밀의 70%를 러시아에서 공급받고 있다. 이집트 역시 비슷한 처지다.
아너드 페티트 국제곡물협회(IGC) 이사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대한 수입 의존도가 큰 국가는 당장 오는 7월부터 식량 위기를 맞을 수 있다”고 예상했다.
고유가에 불똥 튄 비료 산업…“식량 부족 부추겨”
전쟁에 따른 경작 감소만이 문제는 아니다. 비료 생산과 운송에 커다란 차질이 발생하면서 곡물 생산의 효율성이 떨어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비료 유통 물량이 줄어들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것은 비료의 생산 구조 때문이다. 비료는 대표적인 화학 산업으로, 생산 과정에서 전기를 많이 소모한다.
미 정부가 매년 발간하는 ‘에너지 지표’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산업용 전기를 가장 많이 쓴 업종은 제조업(77%)으로 파악됐다. 광산·채굴업(12%), 건설업(7%), 농업(5%) 등이 뒤를 이었다.
제조업 중에서 전기를 가장 많이 소모한 부문은 화학산업(37%)이었다. 비료가 속한 카테고리다. 다음으로 석유·석탄업(22%), 금속업(8%), 식품업(6%) 등의 순이었다.
전기 가격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국제 유가는 올 들어서만 50% 넘게 오른 상태다. 천연가스의 가격도 많이 뛰었다.
특히 한국·미국·유럽연합(EU)·일본 등이 경제·무역 제재에 나선 러시아는 비료의 주요 수출국이다. 비료 원료인 질소·칼륨·인산염의 유럽 공급량 중 25%를 차지해 왔다. 공급 부족 우려가 커지자 요소 비료의 국제 거래 가격은 올 들어서만 4배 폭등했다. 현재 톤당 1000달러 정도에 거래되고 있다.
농업 회사인 야라인터내셔널의 스베인 홀세더 대표는 “세계는 전체 식량의 절반 정도를 비료에 의존하고 있다”며 “다시 말해 비료 없이는 곡물 수확량이 50% 감소할 것이란 의미”라고 말했다.
야라인터내셔널 측에 따르면 유럽 내 암모니아·요소 등 비료 생산 시설 가동률은 올 들어서만 45% 줄었다. 홀세더 대표는 “식량 위기가 올 것이란 데 대해선 더 이상 이견이 나오지 않는다”며 “지금은 위기가 얼마나 심각할 것인지가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밀·보리·수수 등 곡물의 경작 감소는 필수 식료품인 고기 가격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가축이 먹는 사료의 주요 원료이기 때문이다. 사료 값이 뛰거나 부족해지면 소·돼지·닭 등의 사육이 줄거나 고기 값이 뛸 수밖에 없다.
식량 부족 사태가 현실화할 조짐을 보이자 상당수 국가들이 곡물 수출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 자국민을 먹이는 게 먼저라는 판단에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물론 헝가리·터키·몰도바·아르헨티나·이집트·세르비아·불가리아 등 주요 수출국들이 한시적인 수출 제한 조치를 발표했다.
거대한 전장으로 바뀐 우크라이나의 로만 레셴코 농업식품부 장관은 “올해 말까지 밀·귀리·수수·메밀·설탕·육류·가축 등의 수출을 금지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국민들은 씨를 뿌리고 경작을 준비해야 한다”고 호소했지만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농기구를 들어야 할 농부 중 상당수가 러시아에 항전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FAO는 “유럽의 곡창 지대로 꼽히는 우크라이나에서 올해 옥수수·해바리기 등의 경작이 20~30% 감소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각에선 식량 가격 급등에 따른 소요 사태를 우려하고 있다. 가족을 제대로 먹이지 못하게 된 분노한 시민들은 정권을 겨냥한다는 게 세계 역사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7년 국제 곡물 가격이 동시에 뛴 애그플레이션(agflation)이었다. 필리핀·인도네시아·이집트 등에서 동시다발적인 시위와 폭동이 일어났다.
2011년 들불처럼 번졌던 ‘아랍의 봄’ 소요 사태도 만성적인 고물가와 식량난에서 촉발됐다. 튀니지·리비아·이집트·예멘·시리아·바레인 등에서 정권이 뿌리째 흔들리거나 내전이 발생했다.
미국 뉴욕 증시에서 튜크리엄 농업 상장지수펀드(ETF)를 운용하는 살 길버티 튜크리엄 최고경영자(CEO)는 “빵값이 급등한 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아랍의 봄 시위도 시작됐다”며 “식량난에 가장 취약한 저소득층이 먼저 생존의 문제를 안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뉴욕(미국)=조재길 한국경제 특파원 roa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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