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480억원 지급하라”…현대重·금호타이어도 불인정

[법알못 판례 읽기]
서울의 한 기아 매장 전경. 사진=연합뉴스
서울의 한 기아 매장 전경. 사진=연합뉴스
기아가 직원 2000여 명이 제기한 통상임금 소급 적용 소송에서 패소했다. 이들은 과거 기아가 노동조합을 상대로 한 통상임금 소송에서 패소한 뒤 노조와 맺은 특별 합의에 반대해 개별적으로 미지급 임금 청구 소송을 걸었다.

기아가 소송을 취하한 직원에게 일정 금액을 지급하기로 노조와 합의했더라도 직원 개개인이 ‘소송을 제기하지 않겠다’고 회사와 합의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다.

기아는 노사 특별 합의로 직원들에게 지급할 임금 규모를 어느 정도 확정지었다고 봤지만 이번 패소로 약 480억원이 추가로 빠져나갈 처지에 놓였다. 당초 예상했던 1조원보다 더 많은 금액을 임금 지급에 쓰게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노사 합의했어도 개개인 동의한 것은 아냐”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2부(마은혁 부장판사)는 2022년 2월 기아 직원 2446명이 낸 통상임금 소송 2건을 각각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기아는 소송을 제기한 직원들에게 총 479억4000여만원을 지급하게 됐다. 직원 1인당 받게 될 금액은 평균 1960만원 정도다.

기아는 2019년 2월 기아 노조가 제기한 1·2차 통상임금 소송 항소심에서 패소했다. 정기 상여금을 비롯한 각종 수당을 통상임금에 포함하고 이를 기준으로 재산정한 임금 미지급분을 달라는 노조의 요구를 법원이 받아들였다.

이 회사는 패소 직후 소송을 취하하거나 부제소(소송을 제기하지 않기로 하는 것) 동의서를 제출한 직원에게 예상 승소액의 절반 정도를 지급하겠다는 특별 합의를 노조와 맺었다.

하지만 합의 내용에 반대한 일부 조합원이 “액수가 적다”며 그해 5월 통상임금 소송을 별도로 제기했다. 이들은 기아에 2011~2014년분 임금을 달라고 요구했다.

법조계에선 과거 기아 노조 대표자 13명이 2011~2014년분 임금을 두고 소송을 제기했다가 취소한 상황에서 다른 직원들이 개별적으로 소송을 낼 수 있는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기아 노조는 통상임금 소송전을 시작한 2011년부터 3년마다 한 번씩 소송을 냈다. 임금 청구권 소멸 시효가 3년임을 고려해 소멸 시효가 끝나는 시기에 맞춰 2014년과 2017년에도 다시 소송을 건 것이다.

기아는 이에 대해 “개별적으로 소송을 낸 직원들도 과거 노조가 대표로 낸 소송과 관련한 특별 합의를 받아들였다고 봐야 한다”며 “소송을 내지 않기로 합의했거나 적어도 제소권을 포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법원의 의견은 달랐다. 재판부는 “기아와 노조가 특별 합의를 체결한 사실만으로 개별 노동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지 않기로 합의했다고 인정하기엔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1兆 넘는 통상임금 폭탄 맞나

산업계에선 통상임금 소송에서 기업들이 내세우는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이 또 한 번 인정받지 못했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2021년 금호타이어와 현대중공업 등이 통상임금 소송에서 신의성실의 원칙을 인정받지 못한 채 줄줄이 패소했다. 통상임금 미지급분을 소급해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면 경영난을 겪을 수 있다는 회사 측의 호소는 반영되지 못했다.

신의성실의 원칙은 ‘계약 당사자들이 형평에 어긋나거나 신뢰를 저버리는 내용·방법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는 민법의 대원칙이다. 자동차 부품 업체인 갑을오토텍에 대한 판결이 나왔던 2013년부터 이 원칙이 통상임금 관련 재판의 중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당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정기·일률·고정성이 있는 상여금은 통상임금”이란 판결을 내리면서도 “회사에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이 초래되거나 회사 존립을 위태롭게 할 정도로 미지급 임금을 요구하는 행위는 신의성실의 원칙에 어긋난 권리 남용”이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기아에 대해선 “(미지급 임금을 주더라도) 회사의 계속성을 장담할 수 없는 수준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방침을 유지해 왔다.

기아의 2008~2017년 연평균 순이익이 1조7591억원, 2017년 매출(32조1098억원) 대비 우발 채무(1조672억원) 비율이 3.3%, 2018년 이익 잉여금이 19조3513억원이란 점 등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

기아는 통상임금 소송에서 연이어 패소하면서 당초 예상보다 많은 자금을 임금 지급에 써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 회사는 1심 패소 직후인 2017년 3분기 9777억원을 통상임금 관련 충당금으로 쌓았다. 2심 패소 후 노조와 특별 합의를 하면서 비용을 다소 줄일 여지가 생겼지만 직원들이 개별적으로 낸 소송에서 패소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노사 특별 합의에 동의하지 않는 또 다른 직원들이 추가 소송을 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아 노조가 2017년 낸 3차 통상임금 소송은 아직 진행 중이다.


[돋보기]
금호타이어를 상대로 통상임금 소송을 낸 전·현직 노동자들이 2021년 8월 9일 광주고등법원 앞에서 법원의 조속한 파기환송심 판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금호타이어를 상대로 통상임금 소송을 낸 전·현직 노동자들이 2021년 8월 9일 광주고등법원 앞에서 법원의 조속한 파기환송심 판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외면받는 신의칙…통상임금 소송에서 연이어 패소하는 기업들

기업들은 최근 통상임금 소송에서 번번이 고배를 들고 있다. 재판부는 기업들이 내세운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은 채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추세다. 단순히 회사 경영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신의칙을 적용하기는 어려워진 분위기다.

신의칙이 통상임금 소송에서 엄격하게 적용되기 시작한 것은 2019년 2월 버스회사 시영운수 소송부터다. 당시 대법원은 정기 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은 하급심 판결을 파기했다.

재판부는 “노동자의 추가 법정수당 청구가 사용자에게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기업의 존립을 위태롭게 해 신의칙에 위반되는지는 신중하고 엄격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사실상 도산 위기가 아니면 신의칙을 반영할 수 없다는 의미로 봤다.

해당 판결 이후 기업들은 좀처럼 통상임금 소송에서 신의칙을 인정받지 못했다. 시영운수 상고심 판결이 나온 지 1주일 뒤 기아가 통상임금 관련 항고심에서 패소했다. 그로부터 4개월 후인 2019년 6월 만도와 두산인프라코어가 패소했다.

두 회사 모두 1심에서 인정받았던 신의칙이 2심에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2월엔 현대중공업이 상고심에서 패소했다. 이 회사 역시 원심 판결이 뒤집히면서 약 6000억~7000억원을 추가 임금 지급에 써야 할 상황에 놓였다.

장기간 경영난을 겪은 금호타이어도 마찬가지였다. 대법원 제3부(주심 민유숙)는 2021년 3월 금호타이어 노동자 5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광주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원심에선 인정됐던 신의칙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번 소송은 금호타이어가 2010년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가면서 노조와 기본급과 상여금 삭감, 임금 동결 등을 합의한 뒤 노조가 “상여금도 통상임금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면서 비롯됐다.

대법원 재판부는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되면 임금 총액도 증가해 새로운 재정적 부담이 될 수 있다”면서도 “2조원이 넘는 연매출 등을 고려하면 추가로 지급해야 하는 법정 수당이 회사에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을 초래한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이 같은 판결 추세는 2022년 들어서도 이어졌다. 올해 1월 서울고법 민사1부(전지원 부장판사)는 현대제철 인천·포항공장 생산직 노동자 704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통상임금 소송에서 1심과 마찬가지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상여금 고정 지급분은 기본급과 지급액에 변동이 없는 수당에 상응하는 금액이기 때문에 통상임금에 해당한다”고 봤다.

시영운수 판결 이후 신의칙이 인정돼 회사 측이 웃은 사례는 아시아나항공·한국GM·쌍용자동차 소송 정도가 꼽힌다. 법원은 이들 회사에 대해 “장기간 큰 폭의 적자로 회사 존립 자체가 위태롭다”는 이유를 대며 신의칙을 적용했다.


김진성 한국경제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