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 잘록하게 만들고 스커트는 풍성하···'벨 에포크' 감성 살려
[류서영의 명품이야기-크리스찬 디올①] 크리스찬 디올은 1905년 1월 프랑스 서부 노르망디 그랑빌에서 5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다. 그해는 유럽 사회가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기 전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이른바 ‘벨 에포크’ 시대였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사업가였다. 정원 가꾸기가 취미였던 어머니는 패션 감각이 뛰어난 귀부인이었다. 디올은 또래의 뛰어놀기를 좋아하는 다른 남자 아이들과는 좀 달랐다. 디올은 어머니와 함께 정원에서 꽃 가꾸기를 즐기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섬세한 아이였다.훗날 디올은 “나는 꽃 같은 여성(flower women)을 디자인했다”고 말했다. 아마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추억이 영향을 줬을 것이다. 벨 에포크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디올은 열 살이 되던 해 가족과 함께 파리로 이사했다. 디올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외교관이 되기 위해 정치학을 전공했다.
디올은 1920년부터 1925년까지 에콜 리브르 데 시앙스 폴리테크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디올은 사실 건축과 예술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열정을 쏟았다. 디올은 1928년 아버지의 재정 지원에 힘입어 친구 자크 봉장과 함께 파리에 작은 화랑을 열었다. 이 화랑에서 피카소의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디올은 화랑을 운영하면서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시인이자 소설가인 장 콕토 등 유명 예술가들과 친분도 쌓았다. 어머니 따라 어릴 적부터 꽃 그리기 좋아해
1931년 그의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전 세계에 불어닥친 경제 공황과 여러 가지 악재로 디올 아버지의 사업이 파산해서다.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운영하던 화랑은 문을 닫아야 했다. 화랑뿐만 아니라 디올 가문의 집, 가구, 보석과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소중한 물건들을 모두 팔아야 했다. 이런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디올은 그림 한 장에 10센트를 받으며 생계를 유지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림 중 몇 장은 프랑스의 유명 일간지인 ‘르 피가로’에 실리기도 했다. 디올은 일러스트를 그리는 한편 모자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1938년 디올은 프리랜서 생활을 그만두고 디자이너 로베르 피게의 회사에 입사했다. 그곳에서 데시나퇴르(의상 디자인이나 스타일을 그려 주는 사람)로 일했다. 그러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디올은 남프랑스 지역에 입대했다. 1941년 군 복무를 마치고 디올은 파리에 다시 돌아왔다.
디올은 뤼시앵 를롱 부티크에 취직했다. 디자이너 뤼시앵 를롱은 오트 쿠튀르(고급 맞춤복) 컬렉션의 단가를 낮춰 ‘오트 쿠튀르를 대중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곳에서 디올은 8년간 보조 디자이너로 일했고 피에르 발망과 함께 근무하기도 했다.
1946년 디올은 지인의 소개로 프랑스에서 가장 큰 직물 회사를 경영하고 있던 마르셀 부사크 사장을 만났다. 부사크 사장은 디올의 재능을 알아봤고 자신의 회사 중 하나를 맡아 직접 운영해 보라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하고자 했던 디올은 이 요청을 거절했다. 그 대신 부사크의 재정적인 지원으로 본격적인 쿠튀르 하우스를 시작해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내놓았다.
1946년 12월 6일 41세의 나이에 파리 몽테뉴 거리 30번지에서 크리스찬 디올 부티크를 열었다. 이듬해 2월 12일 자신의 첫째 컬렉션으로 파리는 물론 전 세계를 단숨에 들썩거리게 했다. 디올은 “나는 여성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고 말했다. 첫 봄여름 컬렉션에서 코롤(Corolle : 꽃부리)과 위뜨(Huit8) 등 두 개의 라인에 총 90개 스타일의 디자인을 선보였다.
1920~1930년대 여성 복식은 전쟁의 영향으로 군복을 연상하게 하는 각진 어깨의 상의와 짧고 좁은 직선적인 실루엣의 치마 등 다소 남성적인 형태가 유행했다. 반면 디올은 여성의 둥근 어깨 라인을 살리고 잘록한 허리를 강조하는 긴 스커트 등 파격적인 실루엣을 제시했다. 이 컬렉션은 전쟁으로 어려웠던 시절을 끝내며 좋았던 옛 시절, 즉 벨 에포크를 향수하는 스타일이었다. 디올은 “나치 점령 기간 동안 스타일은 정말 끔찍했다. 하루빨리 더 나은 스타일을 제시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고 컬렉션 후 말했다.
이 스타일의 특징은 마치 꽃부리를 엎어 놓은 듯한 모습이다. 디올이 이 스타일을 선보인 이후 수년간 패션의 고장 유럽은 물론 미국의 안목이 높은 패션족들도 열광했다. 미국 패션 잡지 ‘하퍼스 바자’의 편집장인 카멜 스노가 “참으로 새로운 룩(It’s such a new look)”이라고 말하면서 ‘뉴룩’으로 불린 계기가 됐다. 특히 바 슈트는 뉴룩의 대표적인 아이템 이었다. 바 슈트의 특징은 상의는 허리를 잘록하게 하고 치마는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모습이었다. 디올은 완벽함을 추구했다. 짜임이 아주 조밀한 면직물 퍼케일(percale) 소재를 안감으로 사용했다. 모든 솔기엔 테이프를 덧댔다. 하얀색 재킷과 검은색 치마를 만드는 데 다른 옷보다 훨씬 많은 산퉁 견직물 등을 사용했다. 영국 왕, 공주에게 사치스러운 뉴룩 착용 금지
이런 뉴룩의 성공은 ‘패션의 본고장’ 파리의 자존심을 살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당시 파리는 2차 세계대전 때 받은 나치 압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다. 뉴룩의 성공으로 디올의 회사는 17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리는 명실상부한 대형 패션 업체로 점프했다. 특히 큰 시장인 미국에서의 인기는 디올에 날개를 달아 줬다. 당시 디올 판매 수익의 절반은 미국에서 발생했다. 디올은 프랑스에도 크게 공헌했다. 1951년 프랑스 대미 수출의 75%를 디올이 차지할 정도였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이다. 뉴룩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 무엇보다 사치스럽다는 게 단점으로 작용했다. 전쟁 직후였기 때문에 직물 소비를 아껴 쓰는 풍토 속에서 뉴룩이 많은 직물을 사용하고 있는 데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적지 않았다. 디올은 이브닝드레스에 42마를, 주간용(daytime) 옷 한 벌에 20마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영국 왕실의 부정적 반응이 유명했다. 영국은 당시 의복 배급제를 시행했다. 그래서 영국 왕 조지 6세는 두 딸(엘리자베스 공주와 마거릿 공주)에게 뉴룩 착용을 아예 금지시켰다.
미국에서는 짧은 치마를 선호하는 여성들이 ‘무릎 바로 밑 클럽(Little-Below-the Knee club)’을 결성해 디올의 스타일에 반기를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뉴룩의 인기를 완전히 꺾지는 못했다. 영국 왕실의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디올은 왕족만을 위한 비공개 패션쇼를 진행하기도 했다.
참고 자료 : ‘최고의 명품, 최고의 디자이너(명수진, 삼양미디어)’ 등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과 교수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