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엔비디아의 인수 무산…하이닉스, 반도체 동맹 맺고 공동 인수 나선다

SK하이닉스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일하고 있는 연구원들.[SK하이닉스]
SK하이닉스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일하고 있는 연구원들.[SK하이닉스]
SK 성장의 역사는 인수·합병(M&A)의 역사였다. 통신·정유를 인수하며 몸집을 키운 후 하이닉스반도체를 인수하며 비약적 성장의 토대를 마련했다. SK가 또다시 몸집 키우기에 나선다. 이번 주자는 주력 계열사가 된 SK하이닉스다.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2인자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 비메모리 반도체로 영역을 확장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지난해 13조4000억원을 들여 낸드플래시와 반도체 위탁 생산(파운드리) 기업을 인수한 SK하이닉스의 다음 목표는 반도체 설계다. 전 세계 모바일 칩(AP) 설계 시장의 최강자인 영국 ARM의 공동 인수를 추진한다. SK하이닉스는 지난 달 "다양한 반도체 기업의 M&A를 검토 중이며 그 중 ARM 인수도 고려하고 있다"며 ARM을 콕 집어 언급했다. SK그룹의 M&A를 통한 화려한 승부가 다시 펼쳐질지 관심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메모리 반도체와 비메모리 반도체 역량을 모두 갖춘 기업은 삼성전자와 인텔 등 딱 두 곳뿐이다. SK하이닉스도 지난해 파운드리 생산 능력을 두 배로 확대하기 위해 키파운드리를 인수하고 이미지 센서를 생산하며 비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펼치고 있지만 여전히 매출의 96%는 메모리 반도체에서 나온다.
M&A 승부사 기질 발동…'ARM' 콕 집어 인수 나선 SK, 남은 과제는?
‘팹리스의 팹리스’ ARM 인수, 반도체 판도 흔든다
SK하이닉스가 ARM 공동 인수에 성공한다면 비메모리 반도체 역량 확보뿐만 아니라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판도를 바꿀 수 있다. ARM은 컴퓨터의 두뇌인 중앙처리장치(CPU)와 스마트폰의 두뇌인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의 설계도를 그리는 기업이다. 이 분야에선 ARM을 따라올 기업이 없다. 특히 AP 설계 시장점유율 95%를 차지하고 있다. 퀄컴·삼성전자·애플 등 다른 반도체 기업들도 ARM의 설계를 기반으로 각자의 반도체 칩을 다시 설계하고 만들어 낸다. ARM은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회사)의 팹리스인 셈이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비메모리 시장(70%)이 메모리 시장(30%)을 압도한다. SK하이닉스가 ARM을 인수하면 메모리 반도체 2인자를 넘어 CPU와 AP 설계 능력까지 보유한 종합 반도체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다. 파운드리와 이미지 센서에만 국한돼 있는 비메모리 반도체 포트폴리오를 ARM의 설계 기술을 바탕으로 확장할 수도 있다.

M&A 전략은 SK하이닉스가 일본 도시바메모리(현 키옥시아)를 인수할 때와 마찬가지로 공동 컨소시엄을 통한 지분 투자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은 지난 3월 주주 총회에서 “다른 기업들과 공동으로 ARM에 투자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했다. 업계에서는 미국 인텔과 손잡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2월 ARM 공동 인수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규제 당국·경쟁사 반대로 엔비디아는 ‘백기’…공동 인수로 성공할까
SK하이닉스가 공동 인수에 나서는 가장 큰 이유는 반독점 규제 강화다.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가 먼저 ARM 인수를 추진해 왔지만 지난 2월 거래가 무산됐다. 주요 규제 당국이 모두 M&A를 승인하지 않았고 전 세계 경쟁 기업들 역시 적극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이다.

각국 정부가 반도체를 국가 안보 차원에서 보기 시작했고 공급망을 둔 패권 전쟁이 격화되면서 그동안 대형 M&A로 몸집을 키워 오던 반도체업계에도 비상이 걸렸다. SK하이닉스는 공동 인수를 통해 전 세계 규제 당국의 승인을 끌어낸다는 전략이다.

ARM이 반도체 생태계에서 갖고 있는 독특한 입지도 공동 인수를 추진하는 이유다. 박 부회장은 “ARM을 특정한 누군가가 인수해 그 이익을 다 누린다면 인수하도록 (반도체) 생태계가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지분을 공동으로 인수하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 설계를 하는 기업들에 설계도(IP)를 판매하며 수익을 얻는 ARM을 한 기업이 독점하면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가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가 깔려 있다.

자금 문제도 공동 인수를 추진하는 배경이다. 과거 엔비디아가 ARM 인수에 합의한 금액은 400억 달러(약 48조4000억원)다. 하지만 SK하이닉스의 실탄은 6조원이 채 안 된다. 지난해 말 기준 SK하이닉스의 현금과 현금성 자산은 5조579억원, 단기 금융 상품은 4746억원이었다. 여기에 인텔 낸드 사업부 인수 대금 중 20억 달러(약 2조4000억원)의 잔금도 아직 남아 있다.

태생부터 M&A 기업…키옥시아 투자로 2조 넘게 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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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업계에서는 그동안 M&A를 통해 퀀텀점프한 SK하이닉스의 전략이 이번에도 먹힐지 주목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태생부터 인수와 합병을 거듭하며 성장해 왔다. 2000억원의 적자에 허덕이던 하이닉스반도체는 SK그룹에 인수된 이후 지난해 글로벌 3위 반도체 기업으로 거듭났다.

2012년 2월 SK가 하이닉스반도체를 인수한 다음 해부터 흑자로 돌아섰고 10년 만에 시가 총액이 6배나 뛰었다. 2012년 2월 14일 16조3140억원이던 시가 총액은 10년 뒤 같은 날 96조4603억원을 기록했다. SK하이닉스는 SK텔레콤(통신)·SK이노베이션(석유화학)과 함께 SK의 3대 주력사로서 그룹의 실적을 책임지고 있다. 지난해 1~3분기 기준 SK하이닉스는 그룹 매출의 28%를 책임지는 핵심 동력으로 거듭났다.

SK그룹은 하이닉스 인수 이후에도 투자를 이어 갔다. 2012년부터 2018년까지 약 53조원을 SK하이닉스에 투자했다. 2015년, 2018년, 2021년 각 3년마다 M14·M15·M16 공장을 신규 준공했고 2017년 키옥시아에 지분 투자를 하면서 낸드플래시의 경쟁력을 확보했다. SK하이닉스는 키옥시아 인수로 지난해 기준 2조 3000억원에 달하는 지분법 이익을 얻었다. SK하이닉스에 따르면 키옥시아 지분 투자 평가액은 6조3476억원을 기록했다. 2017년 최초 투자 금액인 4조490억원(출자 2조7659억원, CB 1조2831억원)과 비교하면 2조2986억원의 평가 차익을 거뒀다. 다만 SK하이닉스는 2028년까지 키옥시아의 경영권을 가질 수 없다.

지난해에는 인텔의 메모리 반도체(낸드 플래시) 사업부 1차 인수를 마무리했다. 10조2476억원을 투입한 빅딜이었다. 사업 확장을 위해 팔았던 회사를 다시 사들이기도 했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8인치 파운드리 기업 키파운드리를 17년 만에 재인수하기 위한 계약을 체결했다. 전 세계적인 반도체 공급난이 이어지면서 8인치 파운드리에 대한 수요가 커지자 키파운드리 인수로 파운드리 생산 능력을 확대한다는 전략이었다.

SK하이닉스뿐만 아니라 반도체 사업 수직 계열화에도 나섰다. SK그룹은 하이닉스 인수 이후 반도체 소재 사업을 확대하며 반도체 사업 수직 계열화에 성공했다. SK머티리얼즈와 SK실트론 지분을 인수하면서 반도체 핵심 소재를 내재화하고 반도체 공급망을 확보했다. 두 기업을 인수하는 데 투자한 금액만 1조1000억원을 들였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M&A에 보수적인 전략을 취하는 삼성전자와 달리 SK하이닉스는 경쟁력을 갖춘 반도체 기업을 인수하면서 사업 역량을 빠르게 확보해 왔다”며 “ARM 공동 인수에 성공하면 완벽한 포트폴리오 확장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지분 투자를 통해 SK하이닉스가 보유하지 않은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 성장에도 올라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