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최저치 기록…환율 방어하려다가 재정 파탄 우려
[글로벌 현장] 달러당 엔화 가치가 연내 130엔까지 떨어질 것이란 전망이 힘을 얻는 가운데 엔화 약세가 일본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는 ‘나쁜 엔저(低)’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의 ‘나 홀로 금융 완화’가 엔화 추락의 근본 원인으로 꼽힌다.하지만 일본은행이 금융 정책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는 분석이 나왔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4월 18일 시장 전문가 7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긴급 설문 조사에서 5명이 올해 엔화가 달러당 130엔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일본 경제가 미국 9·11 테러의 여파로 심각한 경기 침체를 겪은 2002년 1월 환율이 달러당 135엔을 기록한 이후 20년 만의 최저 수준이다. 사이토 다로 닛세이기초연구소 경제조사부장은 “원자재 가격 급등과 일본의 경상수지 악화의 여파로 올해 엔화 환율이 달러당 122~130엔에서 움직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원자재 값 급등 체감하는 일본 국민들
엔화 가치가 급락하자 스즈키 준이치 일본 재무상은 4월 15일 기자 회견에서 “기업이 원재료 값 상승분을 판매 가격에 전가하지 못하고 임금 인상이 불충분한 상황에서 진행되는 엔화 약세는 ‘나쁜 엔저’”라고 말했다.
통화 당국 최고 책임자가 환율 수준을 이처럼 직설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으로 평가된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환율은 상대국이 걸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통화 당국자들은 환율의 수준이 아니라 속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본 내부에서는 스즈키 재무상이 ‘현 상황을 제대로 짚었다’는 공감대를 얻고 있다. 하시모토 에이지 일본철강연맹 회장(일본제철 사장)은 3월 말 기자 회견에서 “일본 제조업 역사상 처음으로 ‘엔저 리스크’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수출 산업인 철강업은 가격 경쟁력이 오르는 통화 약세를 반기는 업종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엔화 약세로 수출 기업의 가격 경쟁력이 오르는 효과보다 원재료 값 급등 부담이 더 커졌다는 설명이다.
일본 국민도 엔화 약세로 인한 원자재 값 급등의 충격을 실감하고 있다. 일본 최대 전력 회사인 도쿄전력홀딩스는 오는 5월부터 일반 가구용 평균 전기요금을 8505엔(약 8만2830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5% 올린다. 도쿄가스의 일반용 요금은 5783엔으로 24% 상승한다. 지난 10년간 일본 기업이 엔화 강세를 피해 생산 거점과 연구 시설을 해외로 옮긴 결과 엔화 약세가 수출에 기여하는 효과도 크게 줄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1995년까지만 해도 일본의 전체 수출 가운데 자국 내 생산 부가 가치 비율은 94%였다. 2018년 이는 83%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미국은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미국은 소프트웨어와 클라우드 등 고부가 가치 상품을 자국에서 제조해 해외 고객에게 판매한 반면 일본은 자국 내 산업이 경쟁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고노 류타로 BNP파리바증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에는 (글로벌 경쟁력이 없어) 남을 수밖에 없는 기업만 남아 제조업 전체의 생산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대규모 경기 부양책인 ‘아베노믹스’를 시작한 2012년 이후 일본의 실질적인 수출량은 10% 느는 데 그쳤다는 통계도 있다. 사이토 준 일본경제연구센터 연구고문은 “‘글로벌 가치 사슬(여러 나라를 넘나드는 생산 공정을 거쳐 부가 가치를 생산하는 생태계)’에서 일본의 지위 저하가 두드러진다”고 분석했다.
‘금리 인상→재정 파탄→엔저’ 악순환
그런데도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대규모 금융 완화를 지속할 것이라는 방침을 분명히 하고 있다. 미국 등 주요국이 일제히 기준금리를 올리는데 따라가지 않고 현재의 마이너스 금리를 고수하겠다는 것이다.
시장에서는 일본은행이 나 홀로 금융 완화를 고수할 수밖에 없는 외통수에 걸렸다는 말이 나온다. 구로다 총재는 2013년 취임 직후부터 대규모 금융 완화 정책으로 아베노믹스를 측면 지원했다. ‘물가상승률이 안정적으로 2% 수준을 유지할 때까지’인 정책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는데 긴축으로 돌아서면 지난 10년간의 금융 완화 정책을 스스로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환율을 방어하려다 자칫 재정을 파탄 낼 수 있다는 점도 일본은행이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다. 작년 말 일본의 국채 잔액은 처음으로 1000조 엔을 넘어섰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부채 비율이 256%로 미국(133%)과 영국(108%)의 2배가 넘는다.
올해도 일본 정부는 예산 부족분 37조 엔을 적자 국채를 발행해 채운다. 일본이 G7(선진 7개국) 최악의 재정 건전성을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일본은행이 국채의 상당 부분을 사들여 금리가 오르는 것을 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9월 말 일본은행은 일본 국채의 44.1%를 갖고 있다. 일본 재무성은 일본은행이 금리를 1%포인트 올리면 연간 원리금 부담이 3조7000억 엔 늘어날 것이라고 추산했다. 금리가 2%포인트 오르면 매년 갚아야 할 원리금은 7조5000억 엔 더 불어난다.
글로벌 원자재 값 급등이 서민 생활에 충격을 주기 시작하자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관계 부처에 오는 6월까지 물가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일본 정부가 마련하는 물가 대책의 대부분은 휘발유 값 지원, 저소득층 생활비 지원 등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물가 대책을 실행하기 위한 재원 역시 적자 국채로 마련한다. 일본 정부가 금리 인상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뿐만 아니라 물가 대책 때문에 엔저가 심해져 다시 물가 대책을 세워야 하는 모순이 발생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러한 부담을 감수하고 통화 긴축 정책을 실시한다고 해서 엔저를 막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미국의 금리가 워낙 가파른 속도로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는 11월 중간 선거를 앞두고 물가와의 싸움에 나선 미국 정부가 엔화 강세를 용인할지도 불투명하다는 분석이다. 일본은행 관계자는 “환율을 방어하려면 금리를 미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며 “그러면 재정이 파탄 나 다시 엔화 가치가 폭락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은행이 딜레마에 빠진 틈을 타 국제 투기 자본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국 통화 선물 시장에서 투기 자본은 최근 1개월 동안 엔화를 1조4000억 엔어치 순매도했다. 한 달 만에 순매도 규모가 두 배 늘었다. 한 외국계 금융회사 관계자는 “일본은행의 통화 정책을 보면 앞으로도 엔화 가치가 떨어질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했다.
일본 개인 투자가들의 자금이 해외로 유출될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3월 말 마넥스증권의 미국 주식 예탁 잔액은 5700억 엔으로 2년 새 3배 늘었다. 일본의 대형 패밀리 레스토랑 프랜차이즈인 사이제리아의 호리노 잇세 사장은 일본 정부의 코로나19 방역 대책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으로 화제를 모으는 인물이다. 지난해 1월 기자 회견에서는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점심시간에도 외식을 자제해 달라는 일본 정부의 권고에 “장난해 지금!”이라고 반박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호리노 사장은 4월 13일 실적 발표를 위한 기자 회견에서 “모든 수입품에 통화 약세의 여파가 불어닥치는 최악의 엔저”라며 “(내년 4월 임기 만료인) 구로다 총재가 바뀌지 않는 한 현재 상황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일본)=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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