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젠더 특성 반영 연구 적정성 높인다...연구비 지원, 학술지 게재 시에도 젠더 평가 필수로

[ESG 리뷰]
과학기술의료 젠더혁신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토론하고 있다. 사진=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제공
과학기술의료 젠더혁신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토론하고 있다. 사진=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제공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지난해 3월 기준 코로나19 백신 부작용 사례의 79.1%는 여성이었다. 중증 알레르기 반응인 아나팔락시스도 대부분 여성에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됐다. 이는 생물학적 면역 반응에 차이가 있고 임상 시험에서 성별에 따른 투여량이나 부작용 등이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인 남성을 중심으로 한 기존 의학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과학 기술 연구에서 성별 편향을 줄이는 ‘젠더 혁신(gendered innovation)’이 중요하게 대두되는 이유다. 젠더 혁신은 남녀 간 생물학적·생리학적 변수는 물론 사회·문화적 변수도 함께 고려하는 개념이다. 과학 기술 연구와 제품 개발에 성 분석과 젠더 분석을 활용해 편향성 없는 연구로 과학 기술의 적정성을 높인다는 목적이다.

‘네이처’ 등 학술지, 성별 특성 고려 요구

젠더 혁신은 2005년 미국 스탠퍼드대의 론다 시빙어 교수가 처음 시작했다. 시빙어 교수는 과학 연구에서 남녀 간 생리학적 차이가 고려되지 않았다고 처음 지적했다. 2009년 시빙어 교수 연구팀과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성 분석과 젠더 분석을 활용한 연구 사례를 발굴, 연구자들이 이를 실천하는 데 도움을 줬다. 여기서 개발한 연구 원칙이 △연구 우선순위 및 결과 재검토 △개념 및 이론 재검토 △연구 문제 개발과 성별 분석 △성·젠더 요소의 상호 작용 분석 등이다. 이후 젠더 혁신은 과학 기술 연구의 국제적 새로운 어젠다로 부상했다.

젠더 혁신의 대표적 성과는 의생명 분야다. 미국 정부가 1997~2000년 사이 미국에서 시판된 의약품에 대한 부작용을 추적한 결과 퇴출된 10개 의약품 가운데 8개가 여성에게 더욱 치명적이었다. 조사 결과 신약 개발 과정에서 수컷을 대상으로 동물 실험을 하고 임상 시험에서도 여성은 소수만 포함됐기 때문이다. 이후 남녀의 부작용이 다른 약물이 10개가 아니라 600여 개가 된다는 논문이 발표되면서 연구에서의 성별 특성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젠더 혁신은 여성에게만 국한되는 개념은 아니다. 남성이 많이 앓는 협심증 등 심혈관 질환은 여성에서는 잘 포착되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성별 특성을 고려해 진단과 치료 방법을 차별화했다. 반대로 골다공증은 중년 여성의 질병으로 인식돼 남성의 진단이 잘 안 됐다. 젠더 혁신 연구 결과 남성에게 빈번한 골다공증성 골반 골절에 진단 방법과 치료법이 개발됐다. 대장암 위치나 자폐증, 비만도 남녀 차이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아직까지는 남성을 기준으로 한 연구 결과를 남녀 모두에게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건물의 실내 적정 온도 기준이 남성에게 맞춰져 있는 데다 실험실 장비나 작업장의 안전 장치, 휴대전화 크기도 평균적 남성을 기준으로 해 여성이나 체격이 작은 남성은 불편을 감수해 왔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같은 연구 성과가 밝혀지자 전 세계 주요 학술지도 성별 특성 변수(SABV : Sex As a Biological Variable)를 연구에 반영하고 있다. 세계 권위의 과학 학술지 ‘네이처’는 2019년 창간 150주년 기념호에서 과학 기술계에 불고 있는 젠더 혁신을 집중 조명한 데 이어 게재 원고에 동물 실험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성별 특성 등을 반드시 포함하도록 했다. 사육 시설 환경과 축산법이 실험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정보 역시 포함돼야 한다. 엘스비어 출판사의 의학 학술지 ‘란셋’도 임상 시험의 모든 단계에서 여성 참가자 수를 확대하고 연구 자료를 성별로 분석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성별 특성을 고려하는 편집 정책을 표방한 전문 학술지의 피인용지수(임팩트 팩터)는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다.

국책 연구 기관과 연구비 지원 단체도 젠더 혁신을 반영하고 있다. 미국에서 연구비 집행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미국 국립보건원은 2016년부터 연구에 사용되는 척추동물과 사람 연구에서 생물학적 변수로 성별을 고려해야 한다는 규정을 추가했다. 미국 국립암연구소 저널도 양성을 포함한 임상 시험과 방역학 연구 분석을 진행하도록 권고한다. 빌앤드멀린다게이츠재단은 농업 부문 개발 사업에 지원할 때 젠더 요소를 반드시 포함하도록 했다. EU 최대 연구비 지원 프로그램 ‘호라이즌 2020’은 젠더 혁신과 관련한 법적 근거를 마련해 젠더 혁신과 관련한 지원 과제 비율이 13.8%에서 36.2%로 증가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어 2021년 출범한 ‘호라이즌 유럽’도 예외로 제시된 경우 외에는 전체 연구에서 젠더 요소를 포함하도록 했다.
과학기술계에 부는 ‘젠더 혁신’ 바람
과학 기술기본법에 젠더 혁신 포함 성과

한국에서는 2013년부터 젠더 혁신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현 여성기술인육성재단) 초대 소장이던 이혜숙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소장이 이를 처음 소개했다. 이 소장은 “과학 기술의 연구·개발(R&D) 전 과정에서 성별 특성을 반영하는 젠더 혁신 연구야말로 남녀 모두를 위한 더 좋은 연구 혁신”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설립된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는 R&D에 성별 특성을 반영해 ‘수월성 높은 포용적 연구 혁신 문화를 조성하기 위한 정책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과학기술기본법에 성별 특성을 반영하도록 문구 개선을 추진해 지난해 수용되는 성과를 거뒀다. 이에 따라 과학기술기본법 제7조3항이 ‘성별 등 특성을 고려하고 사회적 가치를 증진하기 위한’ 과학 기술의 구현을 목적에 추가해 개정됐고 14조3항은 정부가 기술 영향 평가를 실시할 때 ‘성별 등 특성 분석이 반영’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수정됐다. 또한 26조3항은 과학 기술 통계와 지표를 조사 분석할 때 ‘특성 분석이 반영’되도록 바뀌었다.

지난해 12월에는 성별 특성이 반영된 연구개발성과평가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연구비 지원 사업에서도 연구에 성별 특성을 고려하라는 권고가 늘고 있다. 한국연구재단은 2018년부터 연구에 성별 특성을 반영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한국과학단체총연합회도 2019년부터 회원 학회에 학술지 발간 지원을 신청할 때 성별 특성을 반영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최근에는 뇌질환 연구에서 젠더 혁신 연구 성과가 나타나 주목받았다. 김은준 기초과학연구원(IBS) 시냅스 뇌질환 연구단장팀은 2019년 자폐증이 남자에게 더 많이 나타나는 이유를 규명한 연구 결과를 국제 학술지 ‘네이처 뉴로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자폐증은 남자에게 5배 정도 빈도가 높은 질환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팀이 자폐증을 일으키도록 유전자를 결핍시킨 생쥐를 관찰해 보니 수컷만 신경 전달 균형이 무너진 반면 암컷은 균형 시스템을 지키는 유전자가 발현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대표적 젠더 혁신 연구 성과로 꼽힌다.
과학기술계에 부는 ‘젠더 혁신’ 바람
자율주행차·AI 연구에서도 핵심 이슈

최근 젠더 혁신은 의생명 분야뿐만 아니라 인공지능(AI)과 데이터를 활용한 과학 기술 분야에서도 중요해지고 있다. 예컨대 영국 디지털 헬스 기업인 바빌론이 개발한 건강 챗봇은 완전히 동일한 건강 조건에 성별만 다르게 입력했는데도 여성은 우울증, 남성은 심혈관 질환으로 전혀 다르게 진단해 논란이 됐다. 남성은 48시간 안에 신속한 병원 방문을 추천한 반면 여성은 그렇지 않아 골든타임을 놓칠 가능성도 제기됐다.

자동차 사고 테스트에도 남성과 여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1998~2015년 정면 충돌 사고를 분석한 미국 버지니아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여성 운전자는 치명적 부상이 남성보다 73% 더 높았다. 평균 치수의 남성을 기준으로 한 자동차 충돌 실험용 인형(더미)만 사용된 것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2019년에도 치명적 충돌의 80%가 발생하는 전면·측면 테스트에 남성 더미만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지난해 6월 충돌 테스트에서 여성의 신체 특성을 반영한 더미 활용을 의무화하는 ‘페어 크래시 테스트 액트(Fair Crash Test Act)’ 법안이 발의된 배경이다.

최근에는 자율주행차와 관련한 젠더 혁신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자율주행 기술의 초기 사용자가 남성 중심이어서 서비스 개발 방향이나 안전성 연구, 시스템 고도화를 위해 투입하는 데이터 등도 남성 위주로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완성차 업체와 테크 기업, 주요 정부들이 운전자 개입이 거의 필요하지 않은 레벨4 상용화 시점을 앞당기려고 노력하고 있다. 남녀의 성별 특성을 고려한 안전 표준이 개발 단계에서부터 적용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얼굴 식별도 문제다. 2019년 12월 19일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컴퓨터에서 백인 남성의 얼굴을 판별할 때 오류율이 0.3%에 불과한 데 비해 유색 여성의 오류율은 34%에 달한다. 남성이 기술을 만들고 남성에게 우선 테스트해 시장에 나온 기술과 서비스 등에 결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구글 AI가 30·40대 백인 중심으로 학습했다가 흑인 사진을 ‘고릴라’라고 인식한 것은 잘 알려진 데이터 편향 사례다.

[인터뷰] 이혜숙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소장
“과학 기술은 가치 중립적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과학기술계에 부는 ‘젠더 혁신’ 바람
- 젠더 혁신이란 어떤 의미인가.

“간단히 말해 과학 기술 연구·개발(R&D) 전 과정에 성별 특성을 반영한 과학 기술 연구라고 볼 수 있다. 유럽의 ‘호라이즌 2020’에는 젠더 이퀄리티에 관한 3개 항이 들어 있다. 첫째가 참여하는 남녀 비율, 둘째는 남녀 평등한 법과 제도, 셋째는 연구 문제나 연구 수행 과정, 연구 결과 등 콘텐츠에서 젠더 형평성이다. 우리는 셋째 요소인 콘텐츠에 집중하고 있다. 기존 연구가 남녀 중 하나에 주로 집중됐는데 이제는 R&D 과정에서 성별 특성을 고려해 남녀 모두를 위한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편향의 대상에는 연령이나 사회 경제적 수준, 교육 수준, 지역, 인종 등 구분이 다양한데 남녀를 중심으로 놓고 교차적 특성을 보는 것이 효과적이고 보편적인 접근이라고 본다.”

- 젠더 혁신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

“원래는 수학자로, 순수 수학을 전공했다. 2013년부터 미국에서 약의 부작용이 남녀가 다르다는 과학적 증거들이 나타나고 유럽연합(EU) 서밋에서 젠더 형평성과 관련한 연구 콘텐츠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같은 해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현 여성기술인육성재단)가 설립돼 초대 소장을 맡아 론다 시빙어 교수를 초청해 교류하고 양해각서(MOU)도 맺었다. 2015년 8월에는 아시아퍼시픽 최초로 젠더 서밋을 열고 성별 특성을 반영하지 않은 연구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소개하는 한편 한국의 사례 발굴 지원도 했다. 이번 제5차 과학 기술 기본 계획 및 성과 관리, 기술 영향 평가에 성별 특성을 고려하도록 한 것이 센터의 1차 목표였는데 실현돼 매우 고무적이다. 내년에 시행될 제5차 과학 기술 기본 계획에 성별 특성을 반영해 법 개정의 실효성을 높일 계획이다.”

- 기존 연구에서 편향이 생겨난 이유는 무엇인가.

“남녀는 기본적으로 같다는 가정에서 시작한 것 같다. 또 암컷 동물은 호르몬 주기가 연구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다음으로는 연구나 기술 개발을 할 때 일정 그룹에 집중하면 R&D 비용도 적게 들고 결과가 빠르게 나온다는 장점도 있었다. 남녀노소를 모두 고려하면 오래 걸리고 비용도 더 든다. 특히 스타트업 등은 빠르게 실행하다 보니 기술 개발의 편향성이나 공정성을 고려하지 못하는 곳이 있다. 바빌론이 그렇다. 기술의 편향은 사용자에 의해서도 생길 수 있는데 여성 혐오와 성희롱 발언으로 논란이 된 이루다 챗봇이나 인종 차별 발언으로 폐기된 마이크로소프트의 챗봇 테이 등이 대표적 사례다. 인공지능(AI)은 데이터에 내재된 편향이 확대 재생산될 우려가 크기 때문에 젠더 혁신이 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한다.”

- 자율주행 등 신기술 분야에서 젠더 혁신이 고려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자동차는 남성 더미를 갖고 실험하면서 여성이 사고 났을 때 부상 부위가 다르다 보니 문제가 됐다. 일부 여성이나 임산부 더미가 만들어지고 있지만 아직 법적 요구 대상은 아니다. 모빌리티 패턴도 남녀가 다른데 앞으로 자율주행차 시대로 가기 위해서는 성별 특성을 고려하는 것이 안전성과 기술 수용성 측면에서 중요하다. 자율주행에서 젠더 혁신에 대한 포럼을 열었는데 관심이 매우 높았다. 폭스바겐의 지원을 받는 독일 프라운호퍼연구소가 여기에 주목하고 같이 협력해 ‘미래의 이동 기술과 젠더’를 연구하기로 했다. 아직은 어떤 데이터를 어떻게 봐야 할지 논의 중인데, 매우 흥미롭다.”

- 젠더 혁신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뭔가.

“심혈관이나 골다공증 연구처럼 대표성을 띤 이들에게 집중하다 보니 소수가 소외되는 경우가 생긴다. 다행히 차이가 없을 때도 있지만 차이가 날 때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R&D 참여에서 다양성이 확보돼 다양한 관점이 반영돼야 하고 R&D에 참여하는 남녀 모두 성별 특성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연구 문화 조성이 시급하다. 과학 기술이 가치 중립적이고 어떤 편견도 없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젠더 혁신이 여성을 위한 것만은 아니고 젠더 혁신이 반영된 연구는 남성과 여성 모두를 위한 연구가 된다는 점이다. 젠더 혁신은 더 좋은 R&D를 위한 방향이라는 인식과 공감대가 생겨났으면 한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1378호와 국내 유일 ESG 전문 매거진 ‘한경ESG’ 4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더 많은 ESG 정보는 ‘한경ESG’를 참고하세요)

구현화 기자 ku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