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만 주주 시대, "주주친화정책 강화해야 코스피 4000 간다"
[스페셜 리포트] 코스피지수는 1980년 100으로 출발했다. 1989년 1000, 2007년 2000을 넘어섰다. 그리고 지난해 3000선을 돌파했다. ‘동학개미운동’으로 시작해 1000만 주주 시대가 열리며 시장에 개인들의 자금이 들어온 효과였다.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코스피지수는 시가 총액 증가분을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1990년 1월 초 915였던 코스피지수는 작년 말 2978로 3.25배 증가했다. 같은 기간 시가 총액은 96조원에서 2203조원으로 23배나 늘었다.
미국은 달랐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는 1990년 350에서 작년 말 4766까지 올라갔다. 14배 늘었다. 같은 기간 시총은 2조 달러에서 40조 달러로 늘었다.
‘3.25 대 23’은 한국 주식 시장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대표적 숫자로 꼽을 수 있다. 기업 분할과 상장(IPO)은 넘쳐나는데 비해 자사주 매입 소각, 배당 확대 등은 이를 따라가지 못한 결과라는 평가가 많다.
1000만 주주 시대, 한국 자본 시장이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자본 시장 최일선에서 증권사와 자산 운용사를 이끌고 있는 최고경영자(CEO) 48인에게 ‘한국 자본 시장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물었다. 이번 설문은 한국경제신문과 한경비즈니스가 함께 진행했다. 모든 문항은 복수 응답이 가능하도록 했다.
“한국 자본 시장은 60~70점”
지금 한국 주식 시장은 변곡점에 서 있다. 한국 자본 시장의 현주소에 대한 한국 증권사·자산 운용사 CEO들의 평가는 냉혹했다. 글로벌 자본 시장과 비교해 한국 자본 시장의 현재 수준을 평가해 달라는 질문에 CEO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43%가 ‘60~70점 미만’이라는 점수를 줬다. ‘50~60점 미만’이라고 응답한 CEO도 25%에 달했다.
그렇다면 이들이 생각하는 한국 자본 시장의 발전을 막는 가장 중요한 걸림돌은 무엇일까. ‘자본 시장에 대한 지나친 규제(32명, 66.7%)’를 꼽은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자본 시장에 대한 규제는 대부분 투자자 보호라는 취지로 실행된다. CEO들은 이 취지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하지만 이를 명분으로 가해지는 각종 규제는 소비자를 위한 상품 출시마저 막는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규제에 이어 ‘투명하지 못한 지배 구조, 지배 주주에 대한 낮은 신뢰도’를 꼽은 응답자도 27명(58.3%)에 달했다. 개인 투자자 1000만 명 시대를 맞아 주식 시장에서 이른바 ‘개미 투자자’로 일컬어지는 소액 주주들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지고 있지만 상장 기업들의 이와 관련한 인식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게 CEO들의 판단이다.
‘코스피 4000을 위해 필요한 조건’을 묻는 질문에도 한국의 증권사·자산 운용사 CEO들의 답은 일맥상통했다. ‘주주 친화 정책의 확대’를 답한 응답자(복수 응답)가 31명(64.6%)으로 가장 많았고 30명(62.5%)이 ‘기업들의 이익 증가’를 강조했다. 기업의 이익 증가는 배당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한국 주식 시장이 앞으로 담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투자자의 자산, 소비 여력 증식’을 꼽았다. CEO 48인 가운데 35명(72.9%)이 꼽은 답이다. 1000만 명이 주주가 된 시대인 만큼 주식 시장이 자산 증식의 통로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얘기다.
‘혁신 유망 기업 발굴(41.7%)’과 ‘기업의 자금 조달 통로(39.6%)’로서의 역할을 강조한 대답도 눈에 띄었다.
이는 ‘2022년 한국 기업이 우선해야 할 것’은 투자일까, 배당일까’라는 질문과 연결된다. 눈여겨볼 것은, 주주 친화 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CEO들 가운데 다수가 압도적으로 ‘배당(22.9%)’보다 ‘투자(77.1%)’를 우선해야 한다고 답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설문 결과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장기적으로 볼 때 주주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성장을 통해 기업의 가치를 키우는 데 있고 이를 위해서는 적극적인 투자가 선행돼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는 자본 시장이 본연의 역할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개인 투자자 1000만 시대, 기업과 주주의 동상이몽
#1. ‘K팝의 원조’라고 일컬어지는 SM엔터테인먼트는 지난 3월 31일 정기 주주 총회 직후 주가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3월 29일 종가 기준 7만6000원이던 주가는 3월 31일 주주 총회 당일 8만원대를 넘어서더니 4월 1일 8만5900원에 장을 마감했다. 4월 1일 장중 한때 최고가 9만원에 도달하기도 했다.
SM엔터테인먼트 주주 총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간 SM엔터테인먼트의 주주들은 ‘회사 가치 저평가’의 원인으로 SM엔터테인먼트 지배 구조의 아킬레스건으로 일컬어지는 라이크기획을 지목해 왔다. 라이크기획은 이수만 총괄프로듀서가 지분 100%를 가진 자회사로, SM엔터테인먼트는 1998년부터 라이크기획과 용역 계약을 하고 SM엔터테인먼트 매출액의 6%를 인세로 지급하고 있다. 이에 따라 SM엔터테인먼트의 영업이익이 축소되고 경쟁사들과 비교해 낮은 기업 가치를 인정받아 왔다는 주장이다.
이에 주총 전부터 소액 주주들은 SM엔터테인먼트 경영진과 감사 선임을 앞두고 치열한 표 대결을 펼쳤고 결국 소액 주주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2000년 상장 이후 20년간 ‘무배당’으로 일관했던 SM엔터테인먼트가 ‘창사 이후 첫 배당’을 하기로 한 데다 주주 측이 제안한 곽준호 전 KCF테크놀러지스(현 SK넥실리스) 최고재무책임자(CFO)가 감사로 선임된 것이다. ‘소액 주주’의 승리로 SM엔터테인먼트의 지배 구조 개편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며 주가 상승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2. 동원산업은 4월 7일 동원엔터프라이즈를 흡수·합병한다는 소식과 함께 액면가 5000원을 1000원으로 분할한다고 공시했다. ‘대주주만 유리한 합병’이라며 소액 주주들의 반발이 쏟아져 나왔다.
백지윤 블래쉬자산운용 대표는 4월 13일 자신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동원산업의 자회사인 스타키스트는 성장성이 매우 높은 회사로, 지금 1조원이 안 되지만 향후 기업 가치는 2조원 이상일 것으로 본다”며 “동원산업의 지배 주주 일가는 고성장하는 자회사를 가진 동원산업의 일반 주주를 내쫓고 이익을 강탈해 본인들의 부를 쌓아 올리려고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스타키스트는 미국에서 참치를 파우치 형태로 판매하면서 매년 두 자릿수로 성장하고 있는 동원산업의 100% 자회사다.
합병 공시 이후 첫 거래일인 4월 11일 동원산업의 주가는 4월 8일 종가 기준 26만5000원에서 4월 11일 종가 기준 22만7500원으로 14.15% 급락했다. 이후 주가가 서서히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합병 발표 전과 비교해 10% 이상 하락한 상태다.
소액 주주의 승리가 주가 상승을 견인한 SM엔터테인먼트의 사례와 회사의 흡수·합병 결정이 주주 이익에 반한다는 평가 속에 주가가 하락한 동원산업의 사례는 한국 자본 시장의 달라진 풍경을 보여준다. 2020년 시작된 동학개미운동은 ‘개인 투자자 1000만 명’ 시대를 여는 예고편이었다. 글로벌 증시가 얼어붙으면서 동학개미들의 화력은 예전만 못하지만 한국 자본 시장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는 이해관계인으로서 존재감이 커지고 있다.
1000만 주주 시대가 의미하는 바는 단순한 주주 숫자의 증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들은 각종 매체를 통해 주식에 대해 공부하고 적극적으로 정보를 공유한다. 양적인 변화가 질적인 변화를 동반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기업들의 인식 변화는 이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이는 시장 참여자 사이의 신뢰도 하락으로 이어진다.
설문에 참여한 48인의 자산 운용사와 증권사 대표들은 한국 자본 시장의 가장 큰 문제로 기업과 소액 주주, 금융 당국 등 자본 시장 참가자 사이의 신뢰도가 낮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29명(60.4%)이 ‘지배 주주 위주의 이익 추구’를 꼽았다. ‘낮은 배당 성향과 기업의 허술한 내부 통제 시스템’을 지적하는 의견도 각각 35.4%(17명)로 응답률이 높았다.
한국 기업의 배당 성향이 해외에 비해 낮은 것이 주요한 코리아 디스카운트 요인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그렇다’는 응답이 72.9%로 압도적이었고 ‘아니다’는 응답은 27.1%에 불과했다. 한국 기업의 배당 성향이 유독 낮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대주주가 배당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사회 분위기’를 꼽은 응답자가 25명(52.1%), ‘높은 배당세’를 꼽는 의견도 45.8%(22명)에 달했다. “투자자들의 외면 받는 기업은 매력도 줄어”
지배 주주를 우선으로 한 이익 추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충돌 사례가 LG화학의 LG에너지솔루션 ‘쪼개기 상장’ 논란과 카카오페이의 ‘스톡옵션 먹튀’ 논란이다.
4월 19일 열린 자본 시장연구원의 ‘주식 시장 공정성 제고를 위한 과제 : 물적 분할과 스톡옵션을 중심으로’ 온라인 정책 세미나에 패널로 참석한 천창민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물적 분할 논란을 ‘팥빵과 팥(앙꼬)’에 비유했다. LG화학이라는 팥빵을 구매한 소액 주주들이 기대한 것은 배터리 관련 사업의 높은 성장성이었다. LG에너지솔루션이 LG화학의 ‘앙꼬’란 얘기다. 그런데 LG화학이라는 아버지가 이 ‘앙꼬’를 다 떼어내겠다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앙꼬를 떼어내기로 결정한 아버지(LG화학)는 언제든 앙꼬를 나눠 먹을 수 있다는 데 있다. 팥이 가득한 팥빵을 기대했지만 결과적으로 ‘앙꼬 없는 팥빵’만 들고 있게 된 소액 주주들로서는 원성이 자자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었다.
이날 남길남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원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장기적으로 ‘물적 분할’은 기업 지배 구조 개편 효과에 따라 주가와 관련해서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다만 물적 분할 후 모회사와 자회사를 동시에 상장했을 때 모자회사의 기업 가치가 모두 하락하는 결과를 나타냈다. 한국식 기업 지배 구조에서 나타나는 ‘모자회사 동시 상장’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의 단초가 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이번 설문에서 역시 마찬가지의 답변이 나왔다. 최근 물적 분할 후 재상장 논란이 문제인 이유와 관련한 질문에 31명(64.8%)이 ‘더블카운팅으로 인한 모회사의 주주 가치 훼손’을 꼽았다. ‘자본 시장에 대한 불신 확산’이라고 답한 응답자도 14명(29.2%)이었다.
물적 분할 후 재상장과 관련한 법적 규제 수준을 묻는 질문에는 25명(52.1%)이 ‘모회사 주주에 주식 우선 배정 의무화’를 꼽았고 ‘주식 매수 청구권을 부여해 주주들에게 탈출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는 방안을 제시한 의견도 22명(45.8%)이나 됐다.
카카오페이 ‘스톡옵션 먹튀’ 논란 또한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최근 카카오 경영진의 스톡옵션 매각 문제가 불거진 후 상장 후 최소 6개월간 스톡옵션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방안이 적절한지를 묻는 의견에 87.5%의 CEO들이 ‘적절한 주주 보호 장치’라는 의견을 밝혔다. 상장 직후 경영진의 무리한 스톡옵션 매각을 막기 위해 어떤 수준의 제재가 적절한지 묻는 질문에는 ‘의무 보유 기간 법제화’를 꼽은 응답이 가장 많았고(29명, 60.4%), ‘사내 허가제 도입 및 사전 공시 의무화(12명, 25%)’, ‘한국거래소의 권고 수준의 가이드라인 제시(7명, 14.8%)’가 뒤를 이었다.
김민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온라인 세미나에서 2015년부터 2021년 사이 한국 주식 시장에 상장된 기업들 가운데 임직원에게 스톡옵션을 부여한 기업들을 전수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전반적으로 향후 성장 가능성이 높은 기업들이 스톡옵션을 활용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문제는 카카오페이뿐만 아니라 많은 기업들에서 회사 임원이 상장 후 조기에 스톡옵션을 행사해 매도하는 행태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날 세미나에 패널로 참석한 이수영 금융위원회 자본시장 과장은 이를 ‘배’에 비유해 설명했다. 성장성이 높아 보이는 멋진 배에 올라탔는데 주주들이 올라타자마자 배 주인이 소형 보트를 타고 배를 탈출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얘기였다.
주주 친화 정책을 내걸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은 한국 기업들의 자사주 매입 및 소각에서도 나타난다. 설문에 참여한 증권사 자산 운용 CEO들은 ‘한국 기업이 자사주 매입 및 소각에 적극적이지 않다(87.2%)’는 데 의견을 모았다. 자사주 매입이나 소각이 늘어나야 하는 이유와 관련해 65.2%(30명)가 ‘주주 가치 제고를 위해 기업이 노력한다는 시그널’이라고 답했고 ‘주당순이익(EPS) 상향 효과’를 언급한 응답자도 41.3%(19명)에 달했다. 물론 ‘소각 대신 투자를 통한 성장이 장기적으로 주주 가치를 상향시킬 수 있어 자사주 매입 및 소각은 필요없다’는 응답도 15.2%(7명) 있었다.
이수영 과장은 “개인 투자자들이 언제 어느 곳이든 손쉽게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서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는 기업은 그 매력 또한 매우 빠른 속도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자본 시장의 한 참여자이자 기업의 이해관계인으로서 소액 주주들을 존중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자본 시장 역동성 막는 과도한 규제
2019년 라임 사태와 옵티머스 사태 이후 자본 시장에 대한 투자자들의 무너진 신뢰도 한국 자본 시장이 겪고 있는 또 다른 성장통이다. 이후 금융 당국은 서둘러 소비자 보호를 강화하고 나섰지만 이는 오히려 과도한 규제로 이어지며 한국 자본 시장의 역동성을 제한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제기되는 중이다.
한국 공모펀드 시장이 성장을 멈춘 이유를 묻는 질문에 한국 증권사·자산 운용사 CEO들은 ‘펀드업을 둘러싼 각종 규제(23명, 47.9%)’와 ‘경쟁 상품 대비 낮은 수준의 펀드 수익률(23명, 47.9%)’을 가장 먼저 지목했다.
투자자들에게 수익률이라는 과실을 안겨주지 못하는 금융 상품은 투자자들의 선택을 받기 힘든 게 현실이다. 이를 위해서는 과감한 시도가 필요하지만 복잡한 규제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한 자산 운용사 CEO는 “2021년 3월 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 시행 이후 펀드 상품 하나를 판매하는 데도 40~50분씩 걸리는 데다 절차도 매우 복잡해졌다”며 “특히 판매사의 책임이 강화되면서 구조가 조금 복잡한 상품은 출시가 임박한 상태에서 개발이 중단되거나 전면 수정하는 상품들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한국 자산 운용 시장의 발전을 위해 보완해야 할 제도 개선책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강화된 투자자 보호 조항 완화’와 ‘펀드 장기 투자 시 세제 혜택 강화’를 언급한 이들이 다수였다. 각각 30명씩(62.5%) 응답했다. ‘공모와 사모펀드를 분리하지 않은 획일적인 규제 완화’를 언급한 응답자도 18명(33.3%) 있었다.
금융 사고가 일어나면 당국이 규제를 강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론도 그렇게 움직인다. 하지만 이 강화된 규제가 몇 년 지나고 나면 시장을 침체시키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주식 시장과 자본 시장도 덩달아 출렁이게 된다.
설문에 응한 한 CEO는 “결국 핵심은 규제와 혁신의 밸런스”라고 강조했다. CEO들은 현재 한국의 자본 시장은 지나치게 엄격한 규제로 선진 금융 시장 대비 시장 참여자의 혁신과 창의가 어려운 구조라고 지적한다. 금융 소비자 보호를 명분으로 금융회사에 과도한 책임을 전가하고 징벌적 징계 조치를 내리는 경우 또한 적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CEO는 ‘금융 당국의 관치성 규제’를 꼬집었다. 회계 이슈나 물적 분할 등과 관련한 논란이 불거지면 감독 당국이 사후약방문 형식의 제재에만 집중하는 기조에 대한 우려다. 사고 발생 후 규제가 강화되는 패턴이 반복되다 보니 ‘일관성 없는 규제’가 시장의 불안을 더 키우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돋보기1> 한국 자본 시장의 문제점은 “신뢰의 상실” 설문의 첫 문항은 ‘한국 자본 시장의 가장 큰 문제점’에 대한 주관식 질문이었다. ‘한국 자본 시장이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까’에 대한 답을 구하는 데 한국 자본 시장의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것보다 정확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주관식으로 주어진 질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증권사·자산 운용사 최고경영자(CEO)들이 느끼는 자본 시장의 문제점은 분명했다. ‘시장 참여자 간의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게 우선돼야 한다’는 점이었다.
설문에 참여한 한 CEO는 “한국 주식 시장은 미국과 비교해 장기 추세적 상승을 보이지 않으므로 위험하다는 광범위한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기업은 배당을 포함한 주주 환원율을 대폭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으로 해외 은행들의 배당률이 90%인 것과 비교해 한국 은행들은 30% 선이라는 점을 들었다. 또 과거와 비교해 상당 부분 개선되고 있지만 아직 대부분의 중견·중소기업 오너들의 전횡과 내부 감시 장치가 없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자본 시장의 투명성’을 높이는 것이다. 자본 시장은 기본적으로 신뢰를 바탕으로 움직이는 시장이다. 문제는 자본 시장 내 기업과 주주 간의 ‘정보 비대칭’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자본 시장이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해 기업 정보 공개가 강조되는 이유다.
상당수의 CEO들이 미국 등 다른 자본 시장에 비해 기업들의 경영 실적과 가이던스에 대한 정보 제공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정보의 비대칭성이 심화되고 미공개 정보나 내부 거래, 각종 루머가 난무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기업의 펀더멘털이 자본 시장에서 적절히 평가받지 못하는 사례가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또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요 원인으로 기업의 부실한 지배 구조와 주주 환원에 대한 인식 부족을 언급하는 의견들이 다수 눈에 띄었다. 특히 최근 주식 시장을 뜨겁게 달군 물적 분할 논란 등과 관련해 ‘소액 주주의 이익 보호 및 투자자 보호’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설문에 참여한 한 CEO는 “기업 성장을 돕는 친기업 정책을 통해 상장 기업의 성장성·수익성이 확대되고 배당 확대로 연결돼 투자자들이 장기 투자가 가능한 구조로 변화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돋보기 2> 한국 자본 시장의 선진화, 개인들의 역할은? 최근 2~3년간 한국 주식 시장은 개인 투자자들의 직접 투자 비율이 빠르게 높아지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사태 이후 비대면으로 손쉽게 금융 상품에 투자할 수 있는 플랫폼이 증가함에 따라 20~30대 젊은 투자자들이 주식 시장에 대거 진입했다. 2019년 기준 한국의 20~30대 전체 인구 중 주식 투자자는 각각 5%, 15%에 불과했지만 2020년 이 비율이 각각 15%, 25%로 크게 높아졌다.
이는 주식 시장 투자자의 저변이 확대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하지만 개인 투자자가 주식 직접 투자를 통해 수익을 거두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 코로나19 사태 이후 한국 개인 투자자들의 투자 성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2021년 자본시장연구원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20년 3월 이후 주식 시장에 진입한 신규 투자자 중 60%는 손실을 본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설문 응답에서도 나타나듯이 자본 시장의 가장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는 ‘투자자의 자산 증식’이다. 이를 감안할 때 주식 시장에 참여한 개인 투자자들의 저조한 성과가 지속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1000만 명에 달하는 개인 투자자들은 이미 한국의 자본 시장이 한 단계 도약하는 데 시장 참여자로서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고 그 역할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 투자자 1000만 명 시대’에 대한 기대감은 낮았다.
28명(58.3%)의 CEO들이 ‘자본 시장에 미미한 개선은 있겠지만 한국 자본 시장의 문제점이 해결되는 등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의견을 표했다. 반면 ‘바람직한 한국식 주주 자본주의가 시작될 것’이라며 낙관적인 의견을 표한 이들은 18명(37.5%)이었다.
이는 다시 말해 1000만 명을 넘어선 개인 투자자들이 한국 자본 시장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이냐에 따라 한국 자본 시장 역시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갈림길에 서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번 설문에 참여한 CEO들 역시 개인 투자자들의 ‘단타 위주’의 투자 문화와 관련해 우려를 나타낸 이유다. 실제 자본시장연구원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 개인 투자자들의 평균 주식 보유 기간은 약 8일에 불과하다.
한국 증권사들과 자산 운용사를 이끄는 수장들은 ‘주식 투자를 대박의 기회로 바라보는 분위기(34명, 70.8%)’를 그 주범으로 꼽았다. 최근 요동치는 글로벌 시장의 영향으로 ‘예상치 못한 잦은 악재 출현으로 장기 투자에 대한 신뢰도 부족(13명, 27.1%)’을 원인으로 언급한 이들 또한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은 투자 풍토는 더욱 불확실성이 높아진 글로벌 금융 시장 상황과 장기 투자를 가로막는 한국 주식 시장의 불합리한 세제 등이 복잡하게 얽혀 나타난 결과인 셈이다. 한국 주식의 양도세가 해외 주식 과세보다 크다는 점에서 해외 투자 가속화로 한국 주식 시장의 저평가가 심화되고 있다는 우려다.
이와 함께 개인 투자자는 물론 자산 운용사의 상품 개발 과정에서 시장의 단기 전망에 의존하는 투자 풍토, 이를 부추기는 언론 기사 등을 지적하는 목소리 또한 날카로웠다. 투자자들에게 좋은 상품이 아니라 ‘인기 있는 상품’을 중심으로 금융 상품이 유통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언급되기도 했다.
김민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주식 투자의 편의성이 높아지고 투자를 위해 고려해야 할 금융 환경이 복잡해질수록 장기적으로 좋은 성과를 내는 개인 투자자들이 주식 시장에 유입되기는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며 “특히 한국 주식 시장처럼 개인 투자자의 비율이 높을수록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우려가 커질 수 있는 만큼 개인 투자자의 금융 교육을 강화하고 충분히 전문성을 갖춘 자문 서비스에 대한 활용도를 높이는 등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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