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 사관학교② 서울대 가치 투자 동아리 ‘스믹’
[비즈니스 포커스]증권 사관학교로 ‘대우증권’이 있었다면 최근 떠오르는 사관학교로는 이곳이 있다. 한국 금융 투자업계의 파워 하우스로 자리 잡은 서울대 경영대학 소속 학술 동아리 ‘스믹(SMIC)’이다. 동아리 주린이가 업계 거물로 한진가와 날을 세우며 한국 최초 행동주의 펀드로 이름을 날린 강성부 KCGI 대표, 4조원대 수탁액(AMU) 규모로 자산 운용업계의 핵으로 자리한 황성환 타임폴리오운용 대표, 한국 글로벌 투자의 선두로 꼽히는 목대균 케이글로벌자산운용 대표, 가치 투자를 지향하며 한국의 ‘워런 버핏’으로 불리는 최준철·김민국 VIP투자자문 공동 대표….
최근 금융 투자업계에서 맹위를 떨치는 이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다. 서울대 주식 투자 동아리 ‘스믹’ 출신이란 점이다. 스믹은 서울대 경영대학 소속 학술 동아리로, 투자를 연구하는 모임이다.
이 학술 동아리가 심상치 않다. 리서치센터는 물론 주식 운용, 채권 자문, 투자은행부문(IBD), 브로커리지, 은행, 국내외 연기금까지 여러 기관에 스믹 출신 졸업생들이 분포하며 한국 금융 투자업계의 만만치 않은 인맥으로 떠오르고 있다. 스믹 출신의 유수한 인재들이 금융 투자업계에서 맹활약하다 보니 업계에선 우스갯소리처럼 이런 말도 나온다. “5년 후쯤이면 스믹 출신이 증권사의 절반은 차지하지 않을까.”
지금은 투자업계의 거물들을 배출한 곳으로 알려졌지만 ‘스믹’의 시작은 단출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로 한국 증시가 요동치던 1998년 주식에 관심을 가진 청년들이 하나둘 모여 주식 투자를 공부하기 위해 동아리를 발족했다. 한국 최초의 주식 투자 대학 동아리 1호의 탄생이다.
강성부 KCGI 대표는 창립 멤버 중 한 명이다. “정보기술(IT) 버블(닷컴 버블)이 만들어지면서 증시가 고점을 찍을 때였어요. 제가 경제·경영을 공부하니까 어머니가 한번 투자해 보라며 당시 큰돈을 맡기셨죠. 그런데 그걸 하루아침에 다 날린 거예요. 원금이라도 회복해야겠다 싶어 ‘스믹’에 들어갔어요.”
창립 초기엔 좌충우돌이었다. 그때만 해도 고고한 진리를 추구하는 상아탑에서 학생들이 주식 투자를 한다는 것에 대해 인식이 좋지 않았고 학생들 역시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래도 투자에 대한 열의는 남달랐다. “밤새 발표 자료를 만들어 토론하고 그랬어요. 선배나 멘토도 없고 주식 투자에 대한 노하우도 없으니까 서로 하나하나 배워 가면서 좌충우돌했죠. 그때 결국 원금을 만회했어요. 15배 넘게 벌었죠. 인식은 별로 좋지 않았어요. ‘돈에 눈이 멀었다’고 했죠.”
강 대표의 동기는 목대균 대표, 박진호 NH아문디운용 주식운용1본부장, 이의섭 전 메릴린치증권 리서치센터 부문장, 황성환 대표 등이다. 지금은 업계를 주름잡는 핵심 인사들이지만 25년 전엔 주식 투자 공부에 열의를 불태운 ‘주린이’였다. “다양한 투자 방법과 노하우를 서로 배우고 교환했어요. 특히 황 대표는 그때도 남달랐죠. 매달 수익률을 ‘더블’로 만들었어요.”
학업과 동아리 생활을 동시에 해야 하다 보니 동아리가 문 닫을 위기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한국 주식 시장의 굴곡과 궤를 함께하며 스믹 역시 성장을 거듭했다.
1998년 발족한 이후 25년간 스믹은 현재 활동하는 44기를 포함해 지금까지 총 477명의 회원을 배출했다. 역사적인 1기를 시작으로 인재들이 줄지어 나왔다.
가치 투자의 대표 주자인 VIP자산운용의 최준철·김민국 대표는 3기 출신이다. 이들은 스믹 활동을 통해 쌓은 기업 분석 능력에 가치 투자를 접목해 ‘가치 투자 명가’로 자리 잡았다. 4월 30일 기준 수탁액만 3조9266억원에 달한다.
스믹 5기에는 김두용 머스트자산운용 대표가 있다. 김 대표는 2006년 가치 투자를 실천하는 머스트인베스트먼트를 설립한 뒤 2016년 지금의 자산 운용사로 회사를 키웠다.
그의 동기(5기)는 강대권 라이프자산운용 대표다. 강 대표는 대학 졸업 후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에서 펀드매니저로 일한 뒤 2016년 35세의 나이에 유경PSG자산운용의 최고투자책임자(CIO)로 활약했다. 당시 ‘최연소 CIO’로 유명세를 탔다. 208.58%포인트 수익률, 인적 네트워크 강점 스믹이 이처럼 한국 금융 투자업계의 사관학교로 발돋움한 데는 체계적인 커리큘럼과 인적 네트워크에 그 배경이 있다. 김지헌 스믹 회장(43기)은 “1988년 발족한 이후 25년간 세워진 탄탄한 커리큘럼과 네트워크를 통해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초반 주식 투자 토론과 학습에 그쳤던 커리큘럼은 어느새 기업 분석 리포트를 발간할 정도로 성장했다. 스믹에 따르면 이 동아리의 교육은 보고서 작성 등으로 기초를 다진 후 진로를 위한 실무 교육을 1년간 진행한다.
이때 다양한 산업과 기업을 분석해 투자 보고서를 작성하고 외부에 이를 발표하는데 학기당 팀별로 4개의 보고서를 써야 한다. 이후 자산 운용사 시스템을 활용해 모의 주식 투자를 진행한다. 팀별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해 한 학기 동안 코스피 대비 수익률이 가장 높은 팀을 선발하는 등 투자 감각을 키우는 데 주력한다. 이들이 발표하는 보고서는 여느 증권사 리서치센터의 리서치 보고서 못지않다. 기업 개요, 실적 분석, 재무 분석, 주가 분석, 시장과 기업의 미래 전망 등이 담겼다. 업계 관계자는 “기업을 탐방하면서 어떨 땐 증권사 애널리스트보다 더 깊이 있게 분석하는 것 같다”며 “발표하는 리서치 보고서만 봐도 군침이 도는 인재들이 많다”고 말했다.
1년간 이 같은 과정을 공부하면 회원들의 자금을 운용하는 펀드팀에서 활동할 수 있다. 동아리 내 리서치팀의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실제 투자를 집행하는데, 올해 1월 3일 기준으로 설정 대비 코스피보다 208.58%포인트 웃도는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동아리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스믹에 들어가기 위한 입회 경쟁률도 치열하다. 매년 3월과 9월 학기 초마다 서류 전형과 면접을 거쳐 신입 회원을 모집하는데 일각에선 ‘동아리에 들어가기 위해 재수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재학생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실제 동아리 활동이 취업으로 연결되기도 하기 때문에 휴학 후 동아리 활동에 집중하는 학생들도 있다.
인적 네트워크도 스믹의 강점이다. 매년 홈커밍데이(모교 방문 행사) 등 행사를 개최하는데 기라성같은 선배들이 멘토로 참여해 후배들의 투자 보고서를 지도하거나 투자 인사이트에 방향성을 제시한다. ‘돈 주고도 못 살’ 현직 멘토들의 강연이자 그 어떤 유인책보다 확실한 동기 부여의 장이다. 김지헌 회장은 “보고서 작성 후 발표할 때 선배들이 직접 피드백을 해주기도 한다”며 “재학생끼리 할 때보다 양질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업계에선 앞으로 더 많은 스믹 출신이 금융 투자업계에 자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체계적인 커리큘럼과 탄탄한 인적 네트워크가 바탕이 됨은 물론이다. 스믹 출신들이 스믹 출신들을 선호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취업을 하는 쪽에서도 같은 훈련을 거치며 정서를 공유하는 선배가 있는 회사를 선호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다만 최근 스믹에 대한 관심이 스믹 출신 졸업생들도, 재학생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이 바친 열정과 노력이 혹여 ‘학연’으로 비춰질까 우려해서다. 스믹 출신 한 인사는 “스믹 출신 졸업생, 재학생이 어느새 500명에 가깝다”라며 “역사가 길고 인원 수가 많기 때문에 유독 조명을 받을 뿐, 여타 동아리와 크게 다를 게 없다”고 말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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