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전장 군단, 전기차 TF 출범
르노와 완전 결별 후 전장 사업 강화 포석
삼성에 자동차 사업은 못다 이룬 꿈으로 남은 아픈 손가락이다. 삼성이 최근 다시 자동차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삼성카드가 보유하고 있는 르노 지분(19.9%) 매각을 추진 중인 가운데 이 지분 매각이 완료되면 삼성의 전장 사업이 더욱 속도를 낼 전망이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삼성SDI·삼성전기·삼성SDS 등 전기차 관련 사업을 하는 계열사의 핵심 인력들을 모아 전기차 시장에 대응하기 위한 태스크포스(TF)를 발족한 것으로 알려졌다. TF가 테슬라의 모델Y를 분해하는 등 전기차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 중이라는 소식도 전해졌다.
삼성전자·삼성SDI·삼성전기·삼성디스플레이 등 ‘삼성의 전장 군단’은 전장 사업에서 세계적인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전기차·자율 주행차의 두뇌에 해당하는 시스템 반도체를 만들고 삼성SDI는 전기차의 심장인 배터리를 생산하고 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차량용 디스플레이를 만들고 삼성전기는 차량용 적층 세라믹 콘덴서(MLCC), 카메라 모듈 등을 만들고 있다. 완성차 진출이 아닌 테슬라를 염두에 둔 행보라는 해석에 힘이 실린다.
‘바퀴 달린 스마트폰’ 800조 전장 시장 야심
삼성의 전장 군단은 세계 전기차 시장 1위인 테슬라와 지속적으로 협력을 이어 가고 있다. 삼성전기는 테슬라에 전기차용 카메라 모듈을 공급하는 계약을 따낸 것으로 알려졌다. 계약 규모는 수조원대로 전해진다.
테슬라 전기차 1대당 8개의 카메라 모듈이 장착된다. 테슬라는 모델S(세단), 모델3(세단), 모델X(SUV), 모델Y(SUV)와 아직 출시하지 않은 전기 트럭 등에도 부품을 적용할 예정이다.
삼성SDI는 충남 천안공장에 4680 배터리(지름 46mm, 길이 80mm) 수준의 원통형 배터리를 양산할 수 있는 파일럿 라인 증설을 검토 중이다. 업계에서는 삼성SDI의 원통형 배터리 생산이 테슬라를 겨냥한 것으로 추정한다.
테슬라는 자체 개발한 4680 배터리를 적용한 전기차를 생산하고 있지만 수율(완성품 중 양품 비율) 부족으로 LG에너지솔루션과 파나소닉 등에 4680 배터리 생산을 요청했다.
그동안 삼성은 미래 먹거리 중 하나인 배터리에 대한 투자에 소홀하다는 시선을 받았다. 하지만 최근 이재용 부회장은 유럽 출장길에 최윤호 삼성SDI 사장과 동행해 주요 고객사를 방문하며 배터리 사업과 전장 사업을 적극적으로 챙기고 있다.
이 부회장은 6월 7~18일 유럽 출장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취재진과 만나 “헝가리의 배터리 공장, BMW 고객 등을 만났다. 전장 회사인 하만카돈에도 갔다”며 “몸은 피곤했지만 자동차업계의 변화와 급변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경쟁자 되자 최대 고객 애플 잃어
삼성의 전기차 TF 출범과 관련해 일각에선 전기차를 개발 중인 애플과 소니처럼 삼성이 완성차 제조에 나설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지만 확률은 매우 낮아 보인다.
그런데도 과거 삼성이 ‘르노삼성’이란 이름으로 자동차 사업을 했던 경험 때문에 완성차 진출설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그때마다 삼성의 대답은 한결같다. 올해 1월 ‘세계 가전 전시회(CES) 2022’에서도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DX부문장)은 자동차 사업 진출 여부에 대해 완성차 진출 계획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삼성의 승부처는 전장이다. 미래차 시대에는 내연기관 자동차 시대의 핵심 역량이었던 제조 기술보다 배터리·소프트웨어·반도체 등 소프트웨어 기술을 가진 기업이 우위에 설 수밖에 없다.
자동차가 ‘바퀴 달린 스마트폰’으로 바뀌면서 소프트웨어 개발 능력이 자동차의 상품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고 있다. 전기차 시장에선 기존 완성차 강자들이 아닌 소프트웨어 기술력을 가진 테슬라가 돌풍을 일으킨 것과 같은 이치다.
자동차 산업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면서 전기차에 들어가는 전장 부품의 비율은 평균 30%에서 최대 70%까지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6년 뒤엔 800조원 시장이 열린다. 시장 조사 업체 스트래티지애널리틱스(SA) 등에 따르면 세계 전장 사업의 시장 규모는 2024년 4000억 달러, 2028년 7000억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추정된다.
업계에서는 삼성이 완성차에 진출하지 않는 이유를 ‘파트너와 경쟁하지 않는다’는 원칙에서 찾고 있다. 삼성이 완성차에 뛰어든다면 수많은 고객사가 삼성을 경쟁자이자 위협 요인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파트너였던 삼성이 경쟁자가 되면 고객사들이 삼성과 거래를 끊거나 핵심 부품을 무기화하는 방식으로 사업에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은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애플과 경쟁하고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시장에선 퀄컴과 경쟁하고 있다.
삼성에 교훈을 준 사건도 있었다. 삼성전자는 애플이 아이폰의 폭발적 인기를 얻은 후 가장 중요한 부품이었던 AP 공급을 독식해 왔는데 삼성전자 스마트폰의 글로벌 시장점유율이 올라가면서 애플의 최대 경쟁자가 됐다.
2015년에는 삼성전자가 만든 아이폰6S·6S플러스용 프로세서인 A9 칩셋이 TSMC가 만든 제품보다 수명이 짧고 발열이 심하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이른바 ‘칩 게이트’ 논란에 휘말렸다. 당시 미국 컨슈머리포트가 자체 테스트한 결과 삼성과 TSMC 제품 간 성능 차이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결과가 나오며 사태가 일단락됐지만 사건 이후 삼성전자는 애플의 공급 업체에서 제외됐다. 삼성전자의 자리를 꿰찬 것은 TSMC였다.
삼성과 세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대만의 TSMC는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해 세계 1위에 올랐다. 철저한 기밀 유지와 신뢰 확보로 애플·퀄컴·ARM·엔비디아 등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업체뿐만 아니라 세계 대부분의 반도체 업체를 고객으로 두게 된 비결이다.
1000여 개의 반도체 관련 기업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웨이퍼 설계 분야에서 설계도의 기밀 유지는 기업의 생사가 달린 일이다. 삼성이 파트너사와 경쟁하지 않는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돋보기]
삼성에서 ‘자동차’가 한동안 금기어가 됐던 이유
삼성은 1995년 자동차 산업에 진출했다가 2000년 르노에 매각한 후 내부적으로 ‘자동차’라는 단어를 금기시해 왔다. 2016년 글로벌 자동차 전장 기업인 하만을 인수했을 때도 ‘전장 사업’이라는 표현을 강조했다.
삼성은 이병철 창업자 때부터 자동차 사업 진출을 타진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현실화하지는 못했다. 자동차 마니아였던 고 이건희 회장이 1987년 회장 취임 직후 자동차 사업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1995년 삼성자동차(현 르노코리아자동차)를 설립하고 자동차 사업에 진출해 한때 현대차그룹과 경쟁 구도를 형성하기도 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로 부도 상황에 몰렸던 기아자동차 인수도 추진했지만 현대차에 고배를 마셨다. 기아차 인수 실패와 IMF 관리체제를 거치며 4조원이 넘는 막대한 부채를 안게 된 삼성의 자동차 사업은 2000년 프랑스 르노에 매각되면서 오점으로 남게 됐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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