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 수탁자 B 씨가 실소유주 A 씨 몰래 매각
대법 “처벌은 못 하지만 민사 배상해야”

[법알못 판례 읽기]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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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실소유주에게 명의를 빌려준 사람이 임의로 그 부동산을 처분하면 형사 처분할 수는 없지만 실소유주에게 민사상 배상은 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2016년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이 같은 경우 횡령죄가 아니라고 판결을 내린 뒤 민사상 책임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기준을 내놓은 판례가 됐다는 평가다.

배상 책임 없다는 원심 깬 대법원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토지 실소유주 A 씨가 명의상 소유주 B 씨를 상대로 낸 손해 배상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고 2022년 6월 28일 밝혔다. 1‧2심에선 모두 피고인 B 씨의 손을 들어줬다.

A 씨는 2011년 C 씨로부터 토지를 매입하면서 등기는 B 씨 명의로 하는 명의 신탁 약정을 맺었다. 약정에는 ‘토지에 대한 모든 매매 권리는 A 씨에게 있고 B 씨는 명의 이전만 돼 있을 뿐 돈을 투자한 사실은 없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 약정을 바탕으로 매매 계약이 진행됐고 C 씨는 B 씨 앞으로 소유권 이전 등기를 마쳤다.

그런데 B 씨가 2014년 A 씨의 동의 없이 해당 토지를 팔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B 씨는 D 씨를 상대로 토지를 14억원에 매각하고 소유권도 이전했다. D 씨가 이 토지에 잡힌 9억8000만원 규모 근저당 채무를 인수한다는 조건이 함께 따라붙었다. 이 같은 거래로 B 씨는 4억2000만원을 손에 쥐었다.

자신의 동의 없이 거래가 이뤄진 것을 알게 된 A 씨는 곧바로 B 씨를 상대로 “토지 매각으로 획득한 4억2000만원을 돌려달라”는 내용의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A 씨는 “매매 권리가 없는 B 씨가 임의로 토지를 처분한 것은 불법 행위”라고 주장했다.

A 씨 주장과 달리 1심에선 B 씨가 손해 배상을 할 책임이 없다고 판단했다. “3자 간 등기 명의 신탁을 한 경우에는 명의 수탁자가 부동산을 임의로 처분해도 횡령죄가 되지 않는다”고 본 6년 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판단 근거로 내세웠다.

다만 재판부는 B 씨가 토지를 팔아 이익을 얻은 것은 부당 이득이라고 보고 B 씨가 토지 거래로 획득한 금액 중 2억7000만원을 A 씨에게 반환하라고 명령했다.

2심도 B 씨의 토지 처분이 민사상 불법 행위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2심 재판부는 “A 씨와 B 씨 사이에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신임 관계가 있다거나 B 씨가 A 씨에게 각 토지를 상당한 가격에 처분해 그 매매 대금을 지급할 의무를 부담한다고 볼 수 없다”며 “3자 간 등기 명의 신탁에서는 부동산의 매수 대금이 아니라 처분 대금이 부당 이득으로 문제될 여지가 있을 뿐”이라고 밝혔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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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 없이 팔면 민사상 책임져야”

B 씨로 기울던 승부의 추는 대법원에서 확 뒤집혔다. 대법원은 과거 전원합의체 판례를 인용하면서도 형사 책임과 민사 책임은 지도 이념과 증명 책임의 부담, 증명의 정도에서 서로 다른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대법원 재판부는 “전원합의체 판결은 명의 수탁자의 임의 처분 행위에 대해 횡령죄를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지 명의 신탁 관계에서 명의 신탁자의 소유권 이전 등기 청구권을 보호할 수 없다는 취지는 아니다”며 “형법상 범죄로 인정되지 않는 행위더라도 민사상으론 불법 행위가 되는지를 별개 관점에서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B 씨의 토지 매각은 민사상 불법 행위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3자 간 등기 명의 신탁에서 명의 수탁자의 임의 처분으로 제삼자 앞으로 소유권 이전 등기를 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제삼자는 유효하게 소유권을 취득하고 매도인의 명의 신탁자는 부동산 소유권을 이전받을 수 없게 된다”며 “명의 수탁자가 명의 신탁자의 채권인 소유권 이전 등기 청구권을 침해한다는 사정을 알면서도 명의 신탁받은 부동산을 마음대로 처분했다면 사회 통념상 사회 질서나 경제 질서를 위반하는 위법한 행위”라고 판단했다.

이어 “임의 처분으로 명의 신탁자의 채권이 침해된 이상 형법상 횡령죄의 성립 여부와 관계없이 명의 수탁자는 명의 신탁자에 대해 민사상 불법 행위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이번 판결은 부동산 실소유주에게 명의를 빌려준 사람이 마음대로 해당 부동산을 팔았을 때 민사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기준을 세웠다는 평가다.

법조계 관계자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후 이번 사건과 같은 사례에는 횡령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논리가 견고해졌지만 민사상 책임도 물을 수 없는지에 대해선 서로 다른 의견들이 충돌해 왔다”며 “이 같은 상황에서 대법원이 다시 한 번 명확하게 판단을 내리면서 민사상 책임을 둘러싼 논란이 정리됐다”고 설명했다.


[돋보기]
“횡령죄 아니다” 기준은 6년 전 세워져

7~8년 전만 해도 부동산 실제 주인에게 명의를 빌려준 사람이 그 부동산을 마음대로 팔아버리면 횡령죄로 처벌받았다. 법원의 이 같은 잣대는 2016년 “횡령죄가 될 수 없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결 이후 싹 바뀌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6년 5월 공동 소유 토지에 저당권 등기를 설정해 준 혐의로 기소된 A 씨의 상고심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무죄 취지로 대전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

A 씨는 2004년 B 씨 등 3명과 함께 충남 서산시에 있는 논 9292㎡의 절반을 4억9000만원에 샀다. 매입 비용은 A 씨가 1억9000만원, 다른 3명이 3억원을 냈다. 논의 소유권은 모두 A 씨 명의로 했다. 나중에 논을 되팔 때 편하게 매매하기 위한 취지였다.

하지만 A 씨가 이 논에 대한 근저당권을 설정해 주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A 씨는 2007년 C 씨에게 6000만원, 2008년 농협은행에서 5000만원을 빌리면서 이 논에 근저당권을 설정하고 등기까지 해줬다.

검찰은 A 씨가 공동 매입자들이 가진 논 지분 약 61%를 횡령했다고 보고 A 씨를 재판에 넘겼다. A 씨는 1‧2심에서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1‧2심 재판부는 “수탁자인 A 씨는 B 씨 등을 위해 보관하는 자이기 때문에 횡령죄 주체가 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전원합의체 재판부는 “부동산을 산 실제 소유자가 다른 사람 이름을 빌려 등기하는 ‘중간 생략 등기형 명의 신탁’은 불법”이라며 “이에 따른 소유권 이전 등기 역시 무효이기 때문에 신탁 부동산의 소유권은 매도인이 그대로 갖는다”고 판시했다. 이어 “수탁자는 횡령죄의 주체인 ‘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자’로 볼 수 없기 때문에 횡령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했다.

재판부는 또한 “중간 생략 등기형 명의 신탁과 매도인이 전후 사정을 아는 계약 명의 신탁이 비슷한 데도 계약 명의 신탁에는 아무런 형사 처분을 하지 않고 중간 생략 등기형 명의 신탁에서만 횡령죄로 처벌하는 것은 법적 안정성을 해치고 일반 국민의 법 감정에도 맞지 않다”고도 지적했다.

대법원은 A 씨를 형사 처분하는 것이 오히려 부동산 실명법 취지에 반한다는 판단도 내놓았다. 재판부는 “명의 수탁자를 형사 처분하면 부동산 실명법에서 금지하는 명의 신탁 관계를 오히려 유지·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타당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김진성 한국경제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