칩 설계 필요한 소프트웨어도 ‘수출 통제’…‘반도체 육성법’으로 자국 역량 높이기 시작
[글로벌 현장] 미국이 반도체 칩 설계에 꼭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수출 통제 리스트에 올렸다. 중국이 강점을 보여 온 인공지능(AI)과 자율 주행 등 미래 기술까지 본격 견제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다이아몬드와 산화갈륨’ 수출 허락 필요
미국 상무부는 반도체 소재용 다이아몬드와 산화갈륨, 가펫(GAAFET) 구조 반도체 전자 설계 자동화(EDA) 소프트웨어, 가스터빈 엔진 가압 연소 기술 등 4종의 품목을 ‘수출 통제 리스트’에 올리고 8월 15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수출 통제 품목을 수출하려면 상무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수출 통제 리스트는 모든 국가에 적용되는 조치로, 미국 상무부의 수출 관리 규정 가운데 가장 광범위한 효력을 미친다. 앨런 에스테베즈 미 상무부 산업안전국 부국장은 “새로 추가한 4종의 품목은 군사와 산업 부문에서 기존 질서를 흔들 수 있다”며 “미국은 국가 안보를 확보한다는 전제 아래 수출을 허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 상무부는 이번 조치에서 중국 등 특정 국가를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해당 품목들이 중국이 필요로 하는 기술인 데다 미국이 중국 견제의 핵심 수단으로 반도체를 활용해 왔다는 점에서 이번 수출 통제의 타깃 역시 중국으로 보인다.
다이아몬드와 산화갈륨은 고온·고전압을 견딜 수 있는 차세대 반도체의 핵심 소재다. 가스터빈은 로켓이나 극초음속 미사일 등 항공 우주 부문에 적용된다.
특히 3nm(10억분의 1m) 이상급 반도체 공정에 쓰이는 가펫 EDA 수출을 통제하는 것은 중국의 반도체 생태계를 통째로 흔들 수 있는 ‘비수’로 꼽힌다. EDA는 반도체 칩 자체의 구조와 기능부터 생산 방식, 검증까지의 전체 과정을 설계할 때 쓰는 소프트웨어다.
중국은 반도체 제조 경쟁력이 떨어지지만 설계에선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바이두와 알리바바 등은 이미 5~7nm 자율 주행 반도체를 개발했다. 그런데 설계용 EDA는 미국이 글로벌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중국에서도 미국산 EDA의 점유율이 80%에 육박한다. 미국의 EDA 수출 통제로 중국은 미래 기술 개발에 상당한 차질을 빚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통제 대상 EDA를 3nm 이상 반도체 칩에 쓰이는 가펫 구조용으로 한정했다. 가펫은 현재 5~7nm급에 쓰이는 핀펫(FinFET)의 후속 기술이다. 삼성전자가 지난 6월 세계 최초로 가펫을 적용한 3nm 공정 양산에 돌입했다. TSMC는 2nm 공정에 가펫을 적용할 예정이다.
중국의 유력 반도체 설계 전문 업체(팹리스)들은 이미 5~7nm급을 완성했다. 알리바바는 클라우드용 5nm 칩을 자체 개발했다. 바이두와 비런커지 등이 상용화한 자율 주행용 칩은 7nm급이다. 미국이 중국의 어떤 팹리스에 EDA 수출을 제한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3nm 이상급을 개발 중인 중국 팹리스들에는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반도체 설계 역량을 바탕으로 한 중국의 미래 산업도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반발 “글로벌 제조업 파행 이어질 것”
미국은 설계-제조-포장의 3단계 반도체 공정 가운데 수익성이 높은 설계를 남기고 나머지는 대부분 해외로 아웃소싱한 상태다. 제조 부문을 되살리려는 대표적 조치가 최근 조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한 ‘반도체 지원법’이다.
중국은 소규모 창업이 가능한 설계와 노동 집약적 포장에 강점이 있다. 제조에선 중국의 중신궈지(SMIC) 등 파운드리(반도체 수탁 생산)의 역량이 떨어져 대만 TSMC와 삼성전자 등에 의존해 왔다. 중국 1위, 세계 5위 파운드리인 중신궈지는 미국의 제재로 7nm 이상 공정 개발에 난항을 겪고 있다.
설계 부문에서 중국 팹리스는 대부분 미국의 시놉시스와 케이던스, 독일 지멘스의 EDA를 쓴다. 지멘스의 EDA 사업부도 미국 멘토그래픽스를 인수한 것이어서 글로벌 EDA 시장은 사실상 미국의 독점 체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메모리 부문에서 설계·제조·포장까지 일괄하는 종합 반도체(IDM) 기업이지만 EDA는 미국산을 쓴다.
케이던스와 시놉시스의 최근 분기 매출액 가운데 각각 13%, 17%가 중국에서 나왔다. 중국 EDA 시장점유율은 미국 3사가 합계 77%에 달한다. 중국 토종 1위인 화다주톈의 점유율은 5.9%에 불과하다.
미국은 이미 EDA 수출 통제로 중국 대표 기업인 화웨이의 날개를 꺾어 놓은 바 있다. 2019년 5월 화웨이의 반도체 설계 자회사인 하이실리콘을 화웨이와 함께 제재 대상에 올려 미국산 EDA를 쓰지 못하게 한 것이다. 하이실리콘은 화웨이 최고급 스마트폰에 적용하는 5nm급 칩을 설계할 정도의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제재 이후 하이실리콘의 핵심 인력은 쯔광그룹 등 중국 국유 기업으로 대부분 이동했다.
중국은 “미국이 탄압을 지속하면 글로벌 공급망의 파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반발했다. 공산당 관영 매체인 글로벌타임스는 사설을 통해 “미국이 반도체 지원법에 이어 또 반도체를 정치화하면서 중국을 글로벌 공급망에서 배제하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매체는 “중국이 반도체가 들어간 제품을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로 수출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을 배제하면 글로벌 제조업 파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화다주톈·카이룬 등 중국의 EDA 업체들은 일부 공정에서 3nm 설계까지 지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은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에도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8월 9일 중국의 위협을 견제하기 위해 반도체 산업과 연구·개발(R&D)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 ‘반도체 산업육성법’에 서명하고 공포했다.
이 법안은 미국의 반도체 산업 발전과 기술적 우위 유지를 위해 모두 2800억 달러를 투자하는 것이 골자다. 우선 미국 내 반도체 시설 건립 지원 390억 달러, 연구 및 노동력 개발 110억 달러, 국방 관련 반도체 제조 20억 달러 등 반도체 산업에 520억 달러가 지원된다.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에는 25%의 세액 공제를 적용한다. 이와 함께 첨단 분야 연구 프로그램 지출도 크게 확대, 과학 연구 증진 등에 2000억 달러를 투자하도록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연설에서 “손가락보다 작은 반도체가 스마트폰에서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며 “30년 전에는 미국에서 전체 반도체의 30%가 만들어졌지만 현재는 10%도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중국·한국·유럽은 반도체 산업을 유치하기 위해 수십억 달러의 역사적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면서 미국의 관련 산업 육성 의지를 거듭 확인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또 R&D와 관련해서도 “미국은 한때 세계 1위의 R&D 투자국이었지만 현재는 9위에 불과하다”며 “중국은 수십 년 전만 해도 8위였지만 현재는 2위다. 다른 나라도 근접하고 있다”며 기술 개발 필요성도 강조했다.
이번 법안에는 중국을 견제하는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이 포함돼 한국 기업이 부담을 느낄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이 법안에 따라 미국 정부가 주는 혜택을 받으면 중국 등에 10년 동안 신규 투자할 수 없게 된다. 워싱턴포스트는 “한국의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 같은 제조사는 이 법으로 인해 자신들의 중국 투자 전략이 복잡해졌다고 한다”고 보도했다.
중국 산업계 대표 기구들은 미국의 반도체 육성법을 비판했다. 중국 무역촉진회와 중국국제상회는 성명에서 반도체 영역에서의 미국의 우세를 강화하고 중국을 포함한 ‘주목하는 국가들’과 반도체 영역에서 불공정 경쟁을 하려는 것이 이 법의 취지라고 주장했다.
베이징(중국)=강현우 한국경제 특파원 hkang@hankyung.com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