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표심 잡고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 고립 목적
미국에서 잘 나가던 현대차 불똥
인플레이션 완화, 기후 변화 대응, 의료비용 절감, 대기업 증세, 중국 견제 등 미국이 직면한 주요 현안이 촘촘하게 엮여 있는 법안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8월 16일(현지 시간) 이 법안에 서명하면서 법안은 즉시 효력이 발생했다.
바이든 대통령 회심의 카드, 인플레 감축법 발효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4400억 달러 규모의 정책 집행과 3000억 달러의 재정 적자 감축으로 구성된 총 7400억 달러 규모의 지출 계획을 담고 있다.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2005년 대비 40% 감축한다는 목표로 에너지 안보와 기후 변화 대응에 3750억 달러, ‘오바마 케어’라고 불리는 전국민건강보험(ACA)에 2년간 640억 달러를 투입하는 내용이 골자다.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10억 달러 이상의 연매출을 올리는 기업에 최소 15% 이상의 법인세를 부과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바이든 대통령이 역점적으로 추진해 온 ‘더 나은 재건(BBB)’ 법안의 축소판이다.
당초 바이든 대통령은 BBB 법안이라는 이름으로 기후 변화 대응과 건강보험 복지 확대 등에 3조5000억 달러(약 4600조원)의 예산 투입을 목표로 했지만 야당인 공화당과 조 맨친 등 민주당 내 보수 성향 상원의원들이 지출 규모가 너무 크다고 반대하면서 장기간 표류했다. 결국 유치원 무상 교육, 유급 가족 간병 휴가 등 일부 복지 정책이 빠지면서 합의가 이뤄졌다.
BBB 법안보다 예산 규모가 축소됐지만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바이든 대통령의 중요한 정치적 승리라는 평가가 나온다. 법안의 이름이 인플레이션 감축법인 이유는 치솟는 물가로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던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이 공화당에 맞서는 회심의 카드이기 때문이다. 기후 변화 대응, 저소득층·고령층 의료 보장을 확대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 민주당 핵심 지지층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평가다.
미 정부는 이 법안이 통과되면 재정 적자와 물가 억제를 도모할 수 있어 치솟는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는 미국인들의 고통이 줄어들 것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인플레이션 감축법의 실효성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도 많다.
2002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버논 스미스, 미 경제자문위원회(CEA) 의장을 지낸 케빈 해싯 등 경제학자 230여 명은 인플레이션 감축법이 역효과를 낼 것이라는 성명문을 미 의회 상·하원에 보냈다.
이들은 “정부 지출은 수요 진작을 통해 즉각적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을 더 키울 수 있고 법인세 인상은 기업의 투자를 위축시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제 신용 평가 기관인 무디스와 피치도 이 법안으로 단기간 내에 물가 안정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봤다. “중국산 원재료·부품 쓰지 마” 으름장
이 법안의 진짜 핵심은 따로 있다. 기후 변화 대응과 관련, 전기차 보급을 확대하기 위해 2023년 1월부터 일정 요건을 갖춘 중고차에 최대 4000달러, 신차에 최대 7500달러의 세액 공제 혜택을 주는 내용이다.
하지만 전기차 보조금 혜택을 받기 위한 요건을 충족하기가 까다롭다. 혜택을 받으려면 북미에서 차량을 조립해야 한다. 또 전기차 배터리에 들어가는 핵심 광물의 40% 이상이 미국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에서 생산된 경우에만 세액 공제를 받을 수 있다. 이후 1년마다 10%씩 상향해 2029년에는 100% 요건을 맞춰야 한다.
전기차와 전기차 배터리 주요 부품의 원자재가 미국과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에서 나오기 때문에 사실상 이 법안의 타깃은 중국이다. 미국이 반도체에 이어 배터리와 신재생에너지 분야에서도 중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주요 부품과 광물의 생산지에 제한을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핵심 산업 원자재의 중국 의존도가 높은 한국 기업들은 비상이 걸렸다. 아이오닉5와 EV6 등 전기차 전량을 한국에서 만들어 미국으로 수출하는 현대차와 기아는 인플레이션 감축법 발효로 전기차 신차 구매 시 제공되는 최대 7500달러(약 980만원)의 세액 공제 대상에서 제외되며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현대차 아이오닉5와 기아 EV6가 미국 시장에서 선전하며 친환경차 시장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조금을 받지 못하면 가격 경쟁력이 크게 떨어져 현지 판매량 감소가 불가피하다.
현대차·기아의 7월 미국 전기차 점유율은 7.6%로 테슬라(54%), 포드(10.4%), 폭스바겐(8.5%)에 이어 4위다. 보조금을 받지 못하면 순위가 더 밀릴 가능성이 높다. 현대차는 2025년 완공을 목표로 미국 조지아 주에 전기차 전용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는데 보조금 혜택을 받으려면 공장 증설을 최대한 앞당겨야 한다.
미국 현지에서 전기차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노조를 설득해야 하는 과제도 있다. 미국에서 전기차를 생산하더라도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따라 중국산 배터리를 탑재하면 보조금 혜택을 받지 못하므로 소재·부품 공급망을 미국 중심으로 재편해야 한다.
현대차그룹은 기아의 신형 니로 EV에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중국 CATL의 배터리를 탑재하면서 최종 소비자 가격을 낮췄는데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CATL의 배터리는 국산 배터리보다 최소 25%에서 40%까지 가격이 저렴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조금 제외된 현대차…배터리 탈중국 고심
미국 자동차 업체와의 합작법인을 앞세워 현지 생산 공장을 늘리고 있는 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 등 배터리 3사는 인플레이션 감축법의 반사 이익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됐지만 중국산 원재료 의존도를 낮추고 새로운 공급망을 구축하기가 쉽지 않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장정훈 삼성증권 애널리스트는 “사실 한 개의 배터리에서 국가별 주요 광물들의 채굴 비율과 각각의 정제 비율, 리사이클 비율의 합을 따지는 것은 어렵다”면서 “예를 들어 천연 흑연은 중국이 글로벌 생산량의 82%를, 정제 물량으로 보면 100% 공급을 지배하고 있어 중국을 배제하고 비율을 맞추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한국 배터리 업체의 중국 의존도는 수산화리튬 83%, 코발트 87%, 황산망간 99%에 달한다. 2022년 2월 1일 발효된 중국과의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으로 관세가 인하되면서 배터리 소재의 중국 의존도는 더 심화됐다. RCEP 발효로 배터리 핵심 소재인 산화리튬과 수산화리튬 수입액이 올해 상반기에만 11억7000만 달러(약 1조5306억원)로 역대 최대 수입액을 기록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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