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함 대신 '10대 문화' 겨냥한 아이돌
레드벨벳, 블랙핑크, 에스파 누르고 걸그룹 데뷔 앨범 초동 판매 1위
'BTS 군대리스크' 구원 투수? 데뷔 직후 하이브 주주들 기대 한몸에

'로우 텐션' 시대 왔다…뉴진스는 어떻게 K팝 판도를 바꿨나
평균 연령 16세. 긴 생머리에 통 넓은 바지를 입고 등장한 ‘중딩’들이 K팝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이들은 데뷔 3주 만에 음악 방송 1위를 차지했다. 무려 ‘걸그룹의 바이블’ 소녀시대와 맞붙어 거둔 승리다.

데뷔 앨범 초도 판매량(발매 직후부터 1주일간 판매량)은 역대 신인 걸그룹 중 가장 높은 44만 장을 찍었다. 신인 걸그룹 ‘뉴진스(NewJeans)’가 데뷔와 동시에 쓴 기록이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등 소셜 미디어와 각종 커뮤니티를 열면 뉴진스 얘기로 떠들썩하다. 특히 타이틀곡 ‘어텐션(Attention)’은 발매 8일 만에 빌보드 차트에 진입하며 세계 무대에도 이름을 알렸다.

뉴진스의 소속사 어도어는 BTS 소속사인 하이브 산하 레이블이다. 뉴진스의 활약에 하이브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BTS 군대 리스크’를 잠재울 괴물 신인이 등장했다는 기대감이 나온다. 실제 토스나 네이버의 하이브 종목 토론방에서는 뉴진스에 거는 장밋빛 전망이 가득하다. 뉴진스의 첫 뮤직 비디오가 공개된 7월 22일 하이브의 주가는 전날 대비 6.47%(1만원) 상승한 16만7000원을 기록했다. 이후 8월 18일까지 하이브의 주가는 12.6% 올랐다.

뉴진스의 흥행 돌풍은 우연이 아니다. 소녀시대부터 에프엑스·샤이니·레드벨벳 등 K팝 열풍을 주도한 아이돌을 기획해 온 민희진 어도어 대표가 전략적으로 선보인 그룹이다. 또래를 공략하며 얻은 ‘중딩 파워’와 완벽함 대신 ‘편안함’을 내세운 전략은 신인 걸그룹 뉴진스를 단숨에 대세 아이돌로 만들었다.
'로우 텐션' 시대 왔다…뉴진스는 어떻게 K팝 판도를 바꿨나
완벽함 대신 '편안함' 내세운 전략 “튜닝의 끝은 순정이다.”
뉴진스 무대 영상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댓글이다.

많은 이들이 공감하듯이 뉴진스의 가장 큰 성공 비결은 ‘편안함’이다. 뉴진스 무대에서 화려한 스타일링이나 ‘메타버스’ 같은 색다른 콘셉트는 없다. 노래에서도 보컬 실력을 뽐낼 수 있는 고음 파트나 화려한 랩도 빠졌다. 안무는 K팝 아이돌의 핵심인 ‘칼 군무’ 대신 전체적인 리듬감만 맞춘 자유로운 안무가 핵심이다. 완벽한 보컬이나 독특한 콘셉트는 없지만 편안하게 노래하고 편한 옷을 입고 춤을 추는 모습은 오히려 새로움으로 다가왔다.

이전까지 K팝 걸그룹의 성공 공식은 ‘여전사’나 ‘걸크러시’였다. 힙합을 기반으로 하는 블랙핑크가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블랙핑크처럼 화려한 콘셉트는 곧장 K팝 걸그룹의 성공 공식이 됐다. 이런 걸크러시 경쟁 속에서 뉴진스는 10대다운 풋풋함을 내세우며 여성 팬덤을 그러모았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는 뉴진스의 ‘편안함’ 전략이 시대상과 맞아 떨어졌다고 분석한다. 강 교수는 “지난해까지는 ‘기생충’, ‘오징어게임’, ‘지옥’ 등 모든 콘텐츠가 극적으로 흘러가는 ‘과잉’의 시대가 정점을 찍었다면 올해부터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나 뉴진스처럼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각광받는 ‘로우 텐션(낮은 긴장감)’의 시대가 왔다”고 설명했다.
오빠 대신 또래 공략한 ‘중딩 파워’
'로우 텐션' 시대 왔다…뉴진스는 어떻게 K팝 판도를 바꿨나
편안함을 내세운 뉴진스는 ‘우상’이 되는 대신 10대다움을 내세우며 ‘새로운 세대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뉴진스 이전 걸그룹들이 천편일률적으로 ‘걸크러시’ 콘셉트를 들고나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기존 엔터테인먼트업계에서 소위 ‘돈 되는’ 아티스트는 남성 아이돌이었다. 콘서트를 예매하고 굿즈를 사기 위해 결집하는 팬덤은 주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랙핑크·에스파·(여자)아이들·아이브 등 3~4세대 걸그룹은 남성에게 어필하는 대신 완벽한 무대와 화려한 스타일링으로 무장해 여성 팬덤을 사로잡았다.

블랙핑크는 힙합을 기반으로 하는 YG엔터테인먼트 소속 걸그룹답게 탄탄한 보컬과 랩 실력을 자랑한다. 여기에 멤버 모두가 샤넬·디올·불가리·셀린느·입생로랑 등 각종 럭셔리 브랜드의 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뮤직비디오나 무대 역시 대규모 자본이 투입돼 K팝 트렌드를 선도하는 역할을 해왔다.

SM엔터테인먼트의 4세대 아이돌 에스파는 ‘메타버스’에서 싸우는 여전사 세계관을 들고나왔다. 멤버들의 외모 역시 ‘인공지능(AI) 아바타보다 더 AI 같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화려하다.

또 다른 걸그룹 아이브 역시 ‘우상’에 가까운 완성형 아이돌이다. 엠넷의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48’에서 경쟁을 통해 승리한 12인에 속해 ‘아이즈원’으로 데뷔했던 장원영과 안유진이 아이브의 핵심 멤버다. 이들 역시 여성 팬덤이 강력하다는 특징이 있다.

뉴진스 역시 여성 팬덤과 10대들에게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지만 기존 걸그룹과 달리 ‘동질감’을 내세운 걸그룹이다. 평균 연령 16세 소녀들이 긴 생머리를 하고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나와 10대 소녀가 느끼는 풋풋한 사랑을 노래한다.

하재근 평론가는 “뉴진스는 10대 소녀들이 특정 콘셉트에 맞추거나 남성들에게 어필하는 느낌보다 10대의 자연스러운 매력을 있는 그대로 살리는 방법을 택하며 K팝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했다.

안무나 노래, 스타일링만 10대스러운 건 아니다. 공식 홈페이지나 앨범에도 10대 문화를 입혔다. 공식 홈페이지는 2000년대 휴대전화 화면에서 유행하는 폰트와 이미지를 입혀 제작됐다. 전용 소통 애플리케이션(앱) ‘포닝’도 2000년대 채팅 앱처럼 디자인했다. CD 앨범은 동그란 모양에 알록달록한 그림을 그린 ‘뉴진스 백’으로 제작해 판매했다.

이러한 전략은 기성세대의 문화를 ‘힙하게’ 여기는 10대에게 통했다. 실제 10대 사이에서는 ‘Y2K(2000년대)’ 문화가 유행하고 있다. 10대가 주 소비층인 패션 플랫폼 에이블리에서는 ‘Y2K’ 검색량이 전년 대비 160배 정도 증가했다. 상의는 짧고 하의는 넓은 통이나 펑퍼짐한 와이드 팬츠 스타일이 다시 유행했다. 에이블리에서 ‘와이드 팬츠’ 키워드 검색량은 한 달에 10만 건에 달한다.

강유정 교수는 “뉴진스의 가장 큰 무기는 ‘10대 문화’”라며 “기존에는 아이돌이 캐치프레이즈를 선언하면 팬덤이 이를 따라가는 느낌이었다면 뉴진스는 10대에게 우리 또래끼리 우리 문화를 만들어 가자는 콘셉트로 나왔다”고 말했다. 크리에이터 민희진의 ‘정반합’ 뉴진스가 내세운 10대 문화가 전혀 새로운 개념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만 13세 나이로 데뷔한 보아나 1세대 걸그룹인 SES와 핑클 역시 데뷔 초 10대다운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와 싱그러움과 청량함을 어필했다. 시대가 돌고 돌아 이 같은 콘셉트가 다시 새로워졌을 뿐이다.

이런 흐름을 읽어낸 건 민희진 어도어 대표다. 민 대표는 SM엔터테인먼트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며 소녀시대·샤이니·에프엑스·엑소·레드벨벳 등 K팝 대표 그룹의 앨범 디렉팅을 도맡은 경력이 있다.

특히 음악에 시각적 요소인 ‘콘셉트’와 ‘세계관’을 입혀 K팝의 정체성을 형성한 주역이다. 소녀시대가 ‘지(Gee)’로 활동하며 입었던 컬러 스키니 진, 샤이니가 선보인 ‘콘셉티브’ 개념, 감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로 당시 파격이라고 불렸던 f(x)의 ‘핑크 테이프’ 앨범 아트, 레드와 벨벳 두 가지의 콘셉트를 오간 레드벨벳 모두 민 대표의 아이디어였다.

K팝의 이정표를 세워 온 민 대표는 또 한 번 자신이 만든 정체성을 깼다. 민 대표는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를 헤겔의 ‘정반합’ 개념에 빗대 설명했다. 주류에 싫증 난 사람들이 다시 비주류를 찾게 되고 비주류가 다시 주류로 올라선다는 의미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