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테크의 등장 등으로 30년 전과 상황 많이 달라…결국 성공 가능성은 50 대 50

폴 볼커 전 Fed 의장 / 사진=연합뉴스
폴 볼커 전 Fed 의장 / 사진=연합뉴스
올해 하반기 들어 길게는 금융 위기, 짧게는 코로나19 사태 대처 차원에서 추진됐던 저금리 정책의 숙취(hangover) 현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각국의 고민은 ‘고물가’와 ‘고부채’라는 제약 요건 속에 갈수록 침체 국면에 빠져들고 있는 실물 경기를 어떻게 끌어올리느냐 하는 점이다. 올해 잭슨 홀 미팅에서 제롬 파월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은 물가 안정을 택했다.
제롬 파월이 강조한 ‘볼커 모멘텀’이 해답 맞나[한상춘의 국제 경제 심층 분석]
Fed는 1913년 물가 안정 목표로 설립됐다. 하지만 설립 이후 제1차 세계대전, 금본위제 집착, 1차 산품 과잉 생산 등으로 초래된 대공황으로 이 목표는 뒷전에 밀렸다. 테네시강 유역 개발로 상징되듯이 국가 주도로 경기 부양과 고용 창출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뉴딜 정책의 근간이 됐던 케인스 이론도 탄생됐다.

그 후 베트남 전쟁, 1차 오일 쇼크 등의 시험대가 있었지만 Fed는 전성시대를 맞았고 케인스 이론도 주류 경제학으로 부상했다. 케인스 이론의 총수요 관리 방식대로 금리를 내리기만 하면 침체되는 경기가 살아났고 반대로 금리를 올리면 경기 과열에 따라 오르는 물가도 잡혔기 때문이다.

케인스 이론의 첫 시련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생했다. 1979년 2차 오일 쇼크의 여파로 경기가 침체되는 속에 물가가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닥치자 케인스 이론은 무력화됐다.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재정 지출을 늘리면 물가가 더 오르고 물가를 잡기 위해 재정 지출을 줄이면 경기가 더 침체됐기 때문이다.
‘오일 쇼크’로 흔들린 케인스 이론
Fed 내부에서도 고민에 빠졌다. 전통대로 ‘물가 안정에 우선순위를 둘 것인가’ 아니면 전통을 깨고 ‘경기를 부양하는 데 우선순위를 둘 것인가’를 놓고 난상 토론이 벌어졌다. Fed의 통화 정책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이 설전은 후일 ‘볼커 모멘텀’과 ‘역볼커 모멘텀’ 간 대혈투로 비유된다.

평행선을 달리던 끝에 Fed는 볼커 모멘텀을 선택해 힘겹게 ‘물가 안정’이라는 설립 목표를 지킬 수 있었다. 역볼커 모멘텀의 경기 부양 과제는 미국 재무부로 넘어갔다. 재정 정책도 케인시언의 총수요 관리 대책이 한계에 봉착하자 세율 감소 등을 통해 경기를 부양시키는 공급 중시 대책으로 선회됐다.

Fed의 통화 정책 여건에 커다란 변화를 예고했던 것은 정보기술(IT) 발전과 금융 위기였다. 수확 체증의 법칙이 적용되는 IT 발전으로 ‘고성장·저물가’라는 골디락스 신경제 신화를 낳았지만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또 다른 디스토피아 현상이 발생했다. 고용 사정은 2008년 이후 금융 위기가 겹치면서 더 악화됐다.

볼커 모멘텀도 흔들렸다. 고민 끝에 Fed는 2012년 ‘고용 창출’ 목표를 양대 책무로 설정했다. 그 이후 10년 동안 Fed의 통화 정책은 물가 안정보다 고용 창출에 더 우선순위를 둬 운영했다. 역볼커 모멘텀을 따르는 일부 Fed 인사들은 고용 창출을 1선 목표로 명확히 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제시됐다.

뒷전에 물러날 뻔했던 볼커 모템텀이 다시 힘을 얻은 것은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면서 Fed의 통화 정책 여건이 또 한 차례 격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성장과 물가 간에는 종전의 ‘고성장·저물가’에서 ‘저성장·고물가’로, 고용과 성장 간에는 ‘고용 없는 성장(jobless recovery)’에서 ‘고용이 풍부한 저성장(jobfull downturn)’으로 바뀌었다.

올해 잭슨 홀 미팅에서 인플레이션 마케팅 상향 조정 주제가 그 어느 해보다 주목을 끌었다. 성장·고용·물가 간 트렐레마 속에 인플레 타기팅을 현행 2%를 고수한다면 금리 인상과 경기 침체 우려가 겹치면서 증시에 대형 악재가 될 수 있는 반면 4%로 상향 조정되면 두 부담이 완화되면서 대형 호재가 될 수 있는 양면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를 미리 알 수 있었던 파월 의장의 올해 잭슨 홀 미팅 발언에서 볼커 모멘텀을 지킬 뜻을 밝히면서 증시를 중심으로 국제 금융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과연 Fed는 금리를 얼마나 더 올릴까. 앞으로 미국과 한국을 포함한 세계 증시 흐름을 좌우할 최대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Fed와 파월 의장의 대응 방식으로 코로나19 이후 3대 난제를 풀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인플레를 안정시키기 위해 ‘긴축’을 단행하다가는 고부채에 따른 원리금 상환 부담이 증가하고 실물 경기는 더 침체된다. 반대로 실물 경기를 살리기 위해 ‘완화’ 정책을 고집하면 인플레가 증폭되고 부채가 급증하기 때문이다. 제3의 대안을 모색해야 할 이유다.

30년 전 각국이 지금과 같은 상황에 봉착됐을 때는 IT 산업으로 풀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IT 산업은 두 가지 새로운 현안을 해결해야 한다. 하나는 기업 권력이 국가 권력을 넘보는 과정에서 발생하고 있는 ‘테크래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테크래시(techlash)는 ‘기술(technology)’과 ‘반발(backlash)’의 합성어로, 각국 정부와 빅테크 기업 간에 힘 겨루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쌍방향 의미의 용어다.

또 다른 하나는 IT 기업이 시장을 독점하는 과정에서 고착화되는 ‘K’자형 양극화 구조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횡재 효과’와 ‘상흔 효과’가 뚜렷한 IT 산업이 발전될수록 빈곤층이 두터워짐에 따라 노조 활동이 강해지고 자살 등 각종 사회 병리 현상이 심하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재정 정책 면에서는 페이 고(pay go), 간지언(간 나오토 전 일본 총리의 성 간과 케인시언의 합성어), 예비 기금(rainy day fund) 등과 같은 제3의 대안이 꾸준히 모색돼 왔다. 하지만 통화 정책 면에서는 제3의 대안이 있느냐 하는 점이다. 조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금리 결정권을 가진 Fed 인사들의 학문적 토대를 보면 케인시언과 통화론자들이 적절하게 안배돼 있다.

Fed의 최대 현안인 인플레와 관련해 총수요 관리를 중시하는 케인시언이 가져갈 수 있는 대책은 금리 인상, 양적 축소 등과 같은 긴축 정책이다. 하지만 공급측 인플레 요인과 국가 채무라는 제약 요건 속에 이 대책을 추진하면 인플레 안정 효과가 적은 대신 실물 경기를 침체시킬 확률이 높다.

합리적(혹은 적응적) 기대 가설에 따르면 통화론자들이 인플레 대책으로 기대 심리를 차단하는 데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증폭된 인플레 기대 심리를 차단하지 못하면 임금과 인플레 간의 악순환 고리가 형성돼 물가 안정은 고사하고 실물 경기까지 침체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플레 기대 심리를 차단하는 최선책은 통화 정책의 생명인 ‘선제성’을 유지하는 길이다. 이번처럼 조기 진단에 실패해 선제성을 잃은 상황에서도 금리를 올릴 때 초기에 대폭 끌어올려야 인플레 기대 심리를 차단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지난 3월 이후 회의 때마다 Fed가 금리 인상 폭을 한 단계씩 끌어올려 왔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조치다.

인플레 기대 심리를 차단하는 것이 실물 경기 회복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 통화론자의 시각이다. 인플레 기대 심리가 안정되면 기업은 실질 비용 개선, 국민은 실질 소득 증대 심리로 설비 투자와 소비를 늘리면 침체 국면에 빠지는 실물 경기를 끌어올릴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통화 정책 측면에서 제3의 부양책이다. 과연 3대 난제를 풀 수 있을 것인지 현재로서는 반반(fifty fifty)이다.
제롬 파월이 강조한 ‘볼커 모멘텀’이 해답 맞나[한상춘의 국제 경제 심층 분석]
한상춘 국제금융 대기자 겸 한국경제신문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