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내리는 세계화…딜레마에 빠진 제조 강국 코리아

팬데믹 ·전쟁으로 ‘자원 무기화’ ‘지역 경제 블록화’ 가속

한경비즈니스는 1년에 두 번 합본호를 냅니다. 추석과 설날 2주치를 한꺼번에 낸다는 말입니다. 기자들은 이때 약간은 숨을 돌릴 여유를 갖습니다. 물론 온라인 기사도 써야 하기 때문에 마냥 맘이 편할수 만은 없지만요. 이 정도로는 좀 아쉽다는 독자분들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한경비즈니스 편집진은 올해 썼던 기사 가운데 ‘시간의 간섭’을 받지 않는 기사들을 추려봤습니다. 공부해두거나 읽어두면 상식이 되거나, 트렌드를 이해할 수 있는 10개의 기사입니다. 이를 한곳에 정리했습니다. 연휴 기간 영상에서 벗어나 활자의 세계로 눈을 돌린 독자분들께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편집자 주>
러시아에 맥도날드 매장이 첫 개장한 1990, 러시아 국민들이 '자본주의의 맛'을 보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다. 사진=연합뉴스
러시아에 맥도날드 매장이 첫 개장한 1990, 러시아 국민들이 '자본주의의 맛'을 보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다. 사진=연합뉴스
맥도날드 햄버거 가격으로 각국 통화의 구매력이나 환율 수준을 측정하는 ‘맥도날드 빅맥지수’는 1986년 탄생했다. 영국의 ‘더 이코노미스트’의 작품이다. 글로벌 패스트푸드점인 맥도날드는 지구상 어느 곳에서나 판매되고 있기 때문에 ‘빅맥’이라는 하나의 상품을 통한 가격 비교가 가능했다. 이후 ‘스타벅스지수’와 ‘코카콜라지수’가 등장했다. 다시 말하면 ‘빅맥’과 ‘스타벅스’ 그리고 ‘코카콜라’는 세계화의 상징인 셈이다.

이 ‘빅맥지수’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게 됐다. 맥도날드가 5월 17일 러시아 시장에서 철수를 결정했다. 맥도날드는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예측 불가능한 경영 환경에 처해 러시아 사업을 접기로 했다. 1990년 모스크바 시내 푸시킨 광장에 문을 열었던 맥도날드가 32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맥도날드뿐만이 아니다. 스타벅스도 러시아에서 완전 철수를 결정했고 코카콜라도 ‘러시아 시장 보이콧’을 선언하며 영업을 중단했다.

“지난 30년간 우리가 경험해 왔던 세계화는 끝났다.”

세계 최대 자산 운용사인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은 지난 3월 주주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같이 말했다. 1990년대 이후 세계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글로벌 경제 또한 빠르게 성장해 왔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글로벌 기업들이 공급망과 함께 세계 경제도 빠르게 재편될 것으로 예상된다.

제롬 파월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은 지난 4월 “세계화의 종식을 말하기는 아직 불분명하다”면서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계화는 둔화될 것이고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올 것이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월가를 비롯한 글로벌 투자자들과 경제학자들을 중심으로 ‘세계화 종식’ 논란이 뜨겁게 불붙고 있다. 지난 30여 년간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화가 막을 내리고 있는 것일까. 대외 의존형 경제 구조를 가진 한국으로선 세계화 종식 논란은 더욱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지난 30여 년간 세계 경제를 움직여 왔던 패러다임인 세계화의 역사와 의미를 짚어 봤다.
2022년 맥도날드는 전쟁으로 인해 경영 환경을 예측하기 어려워졌다는 이유로 러시아에서 사업 철수를 결정했다. 사진=연합뉴스
2022년 맥도날드는 전쟁으로 인해 경영 환경을 예측하기 어려워졌다는 이유로 러시아에서 사업 철수를 결정했다. 사진=연합뉴스
성장과 번영을 누렸던 ‘세계화 3.0’ 시대
지난 3월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뉴욕타임스에 “푸틴이 세계화를 죽일 것인가?”란 칼럼을 게재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공포가 높아지는 현재의 상황을 1979~1980년 무렵과 비교하곤 한다. 크루그먼 교수가 보기에 지금의 상황은 1914년과 닮아 있다. 1914년은 이른바 ‘첫째 세계화(세계화 1.0)’가 끝난 때다. 당시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철도와 증기선, 전기 케이블 등이 발명되면서 세계 무역이 크게 증가했다. 런던에 거주하던 시민들은 전 세계의 다양한 제품을 자신이 원하는 만큼 쉽게 주문할 수 있었고 비교적 이른 시간 안에 자신의 집 문 앞까지 배달 받을 수 있던 시대였다. 하지만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며 ‘번영의 시대’는 막을 내렸고 이후 글로벌 경제는 1920년대 후반부터1930년대까지 길고 긴 대공황의 터널을 지나야 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것 또한 ‘세계화로 번영을 누렸던 한 시대의 종언’이라는 것이 크루그먼 교수의 주장이다.

세계경제포럼(WEF)에 따르면 세계화는 상품·서비스·기술·투자·사람·정보가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며 세계의 경제·문화 및 개인들 간에도 상호 의존성이 높아지는 현상이다. WEF는 역사적으로 세계화를 크게 세 단계로 구분했다. ‘첫째 세계화(세계화1.0)’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던 1914년 이전이고 ‘둘째 세계화(세계화2.0)’는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 주도의 세계화를 말한다. 그리고 1991년 소련의 해체로 시작된 지금의 세계화가 ‘셋째 세계화(세계화3.0)’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시작으로 싹트기 시작한 이 ‘셋째 세계화’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1년 소련의 해체를 거치며 본격화됐다. ‘냉전 시대의 종언’으로부터 싹을 틔운 만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전 세계의 모든 나라가 연결되는 세계화가 가능해진 것이다. 인터넷과 같은 기술의 발전도 세계화 물결의 강력한 촉매제가 됐다. 토대도 마련됐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설립됐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을 대체한 WTO 체제의 출범은 세계의 무역 질서가 WTO라는 하나의 규범 아래 움직이게 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2001년 중국이 WTO에 가입하며 세계화는 정점을 향해 달려간다.

이 과정에서 19세기 영국의 경제학자인 데이비드 리카도가 주장한 ‘비교 우위 이론’이 학문적 근거를 제공했다. 한 국가에서 모든 상품을 생산하는 것보다 다른 국가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유리한 상품을 상호 교역하게 되면 상호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이론이다. ‘기술’과 ‘정보’에 우위를 지닌 선진국들과 ‘인건비’와 같은 생산비에서 강점을 지닌 신흥국들의 무역은 양국 모두의 소득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얘기다.

지난 30년간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기업들은 유례없는 성장과 번영을 누렸다. 세계화된 체제 속에서 기업들이 고려할 것은 오직 가격과 생산의 효율성이었다.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다. 선진국의 기업들은 어디가 됐든 ‘가장 싼 가격’에 ‘가장 효율적으로 물건을 생산’할 수 있는 곳으로 빠르게 공장을 옮겨 가기 시작했다. 선진국은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생산할 수 있게 됐고 신흥국들은 경제 성장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특히 수혜를 본 국가들은 한국·중국·대만과 같은 아시아 국가들이었다. 특히 ‘세계의 공장’ 역할을 도맡으며 압축적인 경제 성장을 이뤄 낸 중국은 2001년 WTO 가입 후 20여 년이 채 안 돼 미국을 위협할 만큼 경제 규모가 커지며 존재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2001년 중국의 WTO 가입. 이후 세계화는 정점을 맞는다. 사진=연합뉴스
2001년 중국의 WTO 가입. 이후 세계화는 정점을 맞는다. 사진=연합뉴스
평평하던 세계에 나타난 균열, 트럼프와 브렉시트
미국의 유명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등을 책을 통해 세계화의 상징인 렉서스와 지역화의 상징인 올리브 나무의 대조를 통해 20세기 세계화가 어떻게 냉전 체제를 대체하는 새로운 국제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는지 설명했다. 그는 2005년 또 다른 책을 통해 세계화로 개인과 사회 모두가 연결된 지금을 ‘세계는 평평하다’고 표현했다. 중국과 인도,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두 나라의 중산층에 부를 안겨 준 세계화를 통해 그는 ‘멋진 신세계’가 열리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평평하기만 할 것 같던 세계화의 시스템에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 기업들의 공장이 신흥국으로 빠져나가면서 중산층이 무너진 것이 가장 큰 원인이 됐다. 세계화가 선진국 내 불평등과 빈곤층을 확산하고 있다는 회의적인 시각이 쏟아져 나왔고 이는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심화됐다. ‘평화와 번영’을 약속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여겨졌던 세계화의 뼈아픈 배신이었다.

‘세계화에 대한 반발’은 세계 각국에 등장한 포퓰리스트들의 화력을 높이는 불쏘시개 역할을 톡톡히 했다.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은 세계화에 대한 저항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들이었다. 미국 내에서 세계화로 가장 큰 피해를 본 ‘러스트 벨트’는 전통적 민주당을 버리고 트럼프 후보에게 표를 몰아줬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 흐름에 올라탔다. 2017년 대통령 취임 직후 ‘미국 우선주의(American first)’를 앞세우며 유럽연합(EU)·중남미·중국을 포함해 전방위적으로 무역 장벽을 높였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경제 협의체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탈퇴하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으로 개정했다.

2008년 금융 위기 때 미국 자본주의 체제의 약점을 본 중국은 공공연히 미국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이는 미국 내에서 “더 이상 중국을 이 상태로 내버려 두면 안 된다”는 여론을 확산시켰다. 미국이 관세 철폐라는 세계화의 무기를 내던지고 본격적인 중국과의 무역 전쟁을 시작한 것은 2010년대 중반이다.

미국의 치열한 관세 전쟁은 통화 전쟁으로 확전되는 양상을 보였다. 국제통화기금(IMF) 등에서는 “미국과 중국 간의 보복 관세 격화가 1년 뒤 세계 경제성장률을 0.5%까지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경고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경고에도 미국과 중국의 전쟁은 갈수록 격화돼 갔고 미국발 보호무역주의는 빠르게 전 세계 국가들로 확산돼 갔다.

세계화의 후퇴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세계 국내총생산(GDP)에서 상품 무역이 차지하는 비율은 2008년 정점을 찍은 이후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1960년 16.6%에서 2008년 51.2%까지 상승했지만 2020년 기준 42.1%까지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2017년 WEF는 세계화의 후퇴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WEF는 매년 초 스위스의 휴양지인 다보스에서 열려 ‘다보스 포럼’이라고도 불린다. ‘세계화의 전당’이라는 별칭을 얻고 있다. 세계적인 기업인과 경제학자 2000여 명이 모이는 국제 민간 회의로, 이 포럼에서 논의되는 주제는 국제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그해 다보스 포럼에 불참했다. 가장 주목을 끈 인물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었다. 지난 30여 년간 세계화의 주역이었던 미국이 불참한 이 포럼에서 시진핑 주석은 다자주의와 포용적 세계화를 옹호했다. 이 ‘아이로니컬한 장면’의 배경에는 세계화를 경제적 성장의 발판으로 삼고 있는 중국이 달갑지 않았던 미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는 것을 막아야 했던 중국의 서로 다른 의견 충돌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뒤집어진 사건이었다.
2016년 세계화로 피해를 입은 '러스트 벨트'의 지지를 업은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사진=연합뉴스
2016년 세계화로 피해를 입은 '러스트 벨트'의 지지를 업은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사진=연합뉴스
세계화의 약점 드러낸 팬데믹과 전쟁
글로벌 무역 전쟁이 확산돼 가는 와중에 2020년 발생한 팬데믹(감염병이 세계적 유행)은 표면적으로는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충돌을 잠재우는 듯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지난 2년여간의 팬데믹이 ‘탈세계화’를 앞당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지난 30년간의 세계화 속에서 기업들에 공장과 시장의 위치나 거리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팬데믹 상황은 세계화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다. 이 세계화를 떠받들고 있는 시스템의 치명적 결함이 노출된 것이다. 유럽과 북미 지역 그리고 아시아 지역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글로벌 공급망의 문제였다. 단순한 예로 미국의 글로벌 기업 애플이 생산하는 아이폰은 대만 기업과 계약하고 있는 중국의 공장에서 생산돼 미국과 유럽 등 전 세계 시장에서 판매된다. 반도체와 같은 핵심적인 부품의 대부분은 한국과 일본에서 생산된다. 이처럼 다양한 국가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호 의존적인’ 글로벌 공급망은 팬데믹과 같은 예상하지 못한 재난 상황에서 언제든지 붕괴될 수 있다는 것을 목격했다.

팬데믹이 끝나 갈 때쯤 불거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식량과 자원을 무기화하는 극단적인 보호무역주의로 이어졌다.

전 세계 밀 수출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우크라이나가 전쟁으로 파종을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 세르비아와 헝가리 등 인근의 소규모 생산국들은 ‘식량 안보’를 이유로 잇따라 밀과 옥수수 등의 농작물들이 해외로 나가지 못하게 문을 걸어 잠갔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현재 우크라이나 밀 생산 면적 가운데 20~30%는 수확이나 봄 파종을 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밀뿐만이 아니다. 우크라이나의 흑해산 해바라기씨유 수출이 끊어지면서 글로벌 식용유 시장도 대란을 겪고 있다. 지난 4월 팜유 수출국 1위인 인도네시아가 팜유의 수출을 금지하며 필수 식자재인 팜유 가격이 전년 대비 40~50% 정도 급등했다. 러시아는 전쟁의 책임을 묻는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의 경제 제재에 ‘천연가스의 무기회’로 대응했다. 미국과 유럽 등에 원유를 공급하는 카스피 송유관을 차단하고 나섰고 유럽 지역 내 가스 값과 전기 값은 전년 대비 4배 이상 치솟았다. 유럽 내에는 내년 겨울 ‘에너지 대란’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벌써부터 높아지고 있다.아이로니컬한 것은 이 와중에 러시아 에너지 기업 가즈프롬은 지난 1분기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는 점이다.

문제는 더 많은 국가들이 ‘자원 전쟁’에 참전을 준비 중이라는 점이다. 세계 희토류 공급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은 ‘자원 무기화’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나라다. 희토류는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광물이다. 2010년 일본과 마찰을 빚자 희토류 수출을 금지했다. 언제든 희토류를 ‘자원 무기화’할 수 있다는 의미다. 배터리의 핵심 원료인 리튬도 자원 전쟁이 치열한 대표적인 광물이다. 멕시코·칠레 등 중남미 국가들이 리튬 광산을 국유화하는 추세로, 멕시코는 현재 중남미 국가들의 ‘리튬 연합체’ 결성을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전쟁이 갈수록 격화되고 있다. 사진은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화상 정상회담 장면. 사진=연합뉴스
미국과 중국의 패권전쟁이 갈수록 격화되고 있다. 사진은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화상 정상회담 장면. 사진=연합뉴스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 ‘프렌드쇼어링’ 부각
‘자원의 무기화’가 가속화되면서 글로벌 기업들에는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되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과 관련해 가장 많이 언급되는 용어는 ‘온쇼어링’이다. 생산 기지를 자국 내에 두도록 유도하거나 혹은 자국 내 기업에 아웃소싱하는 것을 뜻한다. 기업의 생산 시설을 인건비 등이 비교적 저렴한 국가로 옮겨 가는 ‘오프쇼어링’과 반대되는 말이다. 보호무역주의의 강화와 함께 자주 언급됐던 ‘리쇼어링(생산 시설을 다시 본국으로 이전하는 것)’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온쇼어링’ 전략이 강조되고 있는 추세지만 자국 내에만 생산 시설을 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그 연장선상에서 최근 자주 들리는 용어들도 있다. ‘니어쇼어링(본국으로의 이전이 어려울 경우 인접 국가로 생산 시설을 옮기는 것)’과 동맹 국가들 간의 공급망을 구축하는 ‘프렌드쇼어링’이다.

용어는 다양하고 복잡하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공통점은 명확하다. 글로벌 기업들에 ‘그저 싼’ 지역은 더 이상 생산 기지로서의 매력이 없다는 점이다. 재난 상황 혹은 정치적인 갈등 상황의 위험을 피하는 것이 기업들에는 가장 중요한 고려 사항이다.

이미 동맹국 혹은 우호국들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공급망의 분리 현상은 노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5월 21일 한국을 찾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바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이었다. 미국 정부는 현재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첨단 반도체 기술과 관련해 한국·일본·대만 등으로 구성된 ‘칩4(Chip 4) 동맹’ 결성을 추진 중이다. 한국은 딜레마에 빠졌다. 한국 반도체를 가장 많이 사 가는 국가가 중국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번 방한 중 이뤄진 한·미 정상회담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가장 공을 들인 의제 또한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였다는 것도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올해 초 아세안 10개국과 한국·중국·일본·호주·뉴질랜드 등 총 15개국이 참여한 자유무역 협정인 역내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ECP)을 주도해 출범시킨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 당시 미국이 탈퇴했던 TTP의 남은 회원국들의 합의를 거쳐 재탄생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도 중국은 현재 가입을 신청한 상태다.

IPEF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커져 가는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대응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온라인에서 개최된 동아시아 정상회의에서 ‘미국과 아시안의 새로운 시대’를 강조하며 처음 제안했다. 미국은 ‘미국과 주변국이 참여하는 경제 협력체’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결국 경제 안보 관점에서 중국을 첨단 기술과 부품 공급망에서 배제하는 것이 핵심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떠난 직후 박진 외교 장관이 ‘중국의 IPEF 참여 유도’를 밝힌 데 대해 왕이 중국 외교부 부장이 “미국 패권의 앞잡이”라며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선 것은 이 때문이다. 중국은 바이든 대통령의 IPEF 구상에 대해 “자유와 개방의 기치를 내걸고 있지만 미국이 패거리 소그룹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래픽 디자인=박명규 기자
그래픽 디자인=박명규 기자
달아오르는 ‘세계화 종식’ 논란, 인플레이션 가속화할 것
글로벌 공급망의 블록화는 전 세계 자유 무역 시스템의 근간 역할을 했던 WTO 체제를 무력화하고 있다. 1995년 출범 이후 불과 27년 만이다.

월가 투자자들과 경제학자들은 ‘세계화가 끝나 가고 있다’는 경고를 쏟아내고 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을 필두로 월가의 대표적인 ‘투자 구루’로 일컬어지는 하워드 막스 오크트리캐피털매니지먼트 회장은 “지난 30년간 세계화는 자동차와 가전제품 등의 값싼 제품을 생산할 수 있도록 했지만 제조업 공동화와 민간 노조 부문의 약화를 초래하는 등 부작용도 드러났다”며 “이제 기업들은 가장 싸고 쉬운 공급망보다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공급망’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는 로컬 소싱을 강화할 것”이라며 세계화의 종식을 전망했다.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경제 전문가인 아담 포센 피터슨국제연구소(PIIE) 소장은 지난 3월 포린어페어스에 ‘세계화의 끝?’이라는 칼럼에서 세계화가 2000년 이전 수준으로 회귀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앞으로의 세계 경제는 ‘블록으로 분열’될 것이고 각 블록은 다른 블록에서 고립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지난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개최된 WEF에서도 ‘세계화의 종식’은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지난 2년여간의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전 세계 공급망이 혼란을 겪으며 세계화가 끝나 가고 있다는 경고다. 실제 WEF 포럼을 앞두고 글로벌 기업들 사이에서는 탈세계화(deglobalization)에 대한 언급이 부쩍 늘고 있다. 데이터 분석 업체인 센티에오에 따르면 올 1분기 실적 발표와 콘퍼런스콜 기간 동안 온쇼어링·리쇼어링·니어쇼어링 등에 대한 언급이 2005년 이후 17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각에서는 ‘신냉전 시대’가 도래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마틴 울프 파이낸셜타임스의 수석 칼럼니스트는 과거의 신냉전과 현재의 상황은 근본적인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못 박는다. 과거 미국과 소련의 경쟁이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한 패권 다툼이었고 군사적 안보 경쟁이 중심이었다. 물론 양측 모두 경제적 경쟁에 참여했고 그 결과 소련이 졌다. 하지만 둘의 세계는 서로 분리돼 있었다. 이와 비교해 현재 미국과 중국은 이미 여러 측면에서 경제적으로 연결돼 있고 얽혀 있다. 세계화의 단절, 혹은 후퇴는 글로벌 경제에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충격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많은 이들이 가장 크게 우려하는 바는 ‘인플레이션 공포’다. 래리 핑크 회장은 “글로벌 공급망의 대규모 재편은 본질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경제를 짓누르고 있는 인플레이션이 ‘세계화의 종식’과 함께 더욱 심화할 가능성이 높다. 아담 포센 PIIE 소장은 “세계화가 종식되면 가계와 기업의 실질 투자 수익률이 모두 하락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세계화에 기반한 경제 주체들의 상호 연결성이 낮아짐에 따라 각 국가와 기업들의 성장률이 낮아지는 것은 물론 글로벌 경제의 성장을 이끌어 왔던 혁신 또한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지난 20일 방한한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이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20일 방한한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이었다. 사진=연합뉴스
가속화되는 탈세계화, 시험대 오른 한국 경제
세계화가 종식되면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될 나라들은 단연 ‘세계화로 가장 큰 수혜를 본 나라’들이다. 한국도 그 대표적인 나라들 중 하나다. 1990년 2830억 달러였던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2020년 기준 1조6310억 달러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같은 기간 수출은 680억 달러에서 5130억 달러로, 수입은 740억 달러에서 4680억 달러로 급증했다. 무역을 바탕으로 성장해 온 한국에 ‘세계화의 종식’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위기일 수밖에 없다. 이미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기업들은 준비 태세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포드자동차는 최근 미국과 주변 우호국들을 중심으로 원자재 확보부터 최종 배터리 생산까지 공정 라인을 새롭게 구축 중이다.

중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공급망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한국은 원하지 않아도 이미 전쟁의 한가운데 휘말려 있다. 최근 표면화되고 있는 IPEF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양국의 편 가르기가 더욱 노골화되는 와중에 경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등거리 외교’의 중요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사안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세계화 종식’과 관련한 논의조차 제대로 시작하지 못한 상황이라는 데 있다.

유승민 삼성증권 연구원은 “과거 냉전기에는 국가 간 경쟁에서 안보 영역의 우위가, 지난 30년간의 세계화 시대에는 경제 영역의 우위가 중요했던 시대였다면 앞으로는 안보와 경제가 구조적으로 결합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며 “미·중 경제 패권이 격화될수록 각국과 글로벌 기업들의 셈법 또한 복잡해질 수밖에 없는 만큼 앞으로 달라질 세계 질서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