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엔팔 · 필라스, 영국의 옥토퍼스 에너지 급성장…한국에선 식스티헤르츠 등 두각
[비즈니스 포커스] “지금 에너지 위기가 1970년대 에너지 위기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파티 비롤 국제에너지기구(IEA) 사무총장이 지난 6월 한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이다. 석유·가스·전기의 위기를 동시에 겪고 있는 현재의 에너지 위기는 과거 그 어느 때와 비교해도 훨씬 더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것이 그의 경고다.장기간 지속된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 여파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충격까지 더해지며 ‘에너지 위기’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특히 전쟁의 직격탄을 맞은 유럽이 몸살을 앓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 충격은 전 세계를 가리지 않고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스 요금에 이어 최근에는 전기요금까지 치솟고 있는 상황이다. 프랑스는 9월 13일 치솟는 전기요금에 대처하기 위해 에펠탑을 비롯한 기념물들의 조명을 1시간 일찍 끄는 것으로 결정했다. 지금 인류가 겪고 있는 ‘에너지 위기’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역사는 반복된다. 1973년과 1979년, 두번의 오일 쇼크를 거치며 각 국가와 기업들에는 에너지 절약과 효율성이 최우선 순위가 됐다. ‘비화석 연료(non-fossil energy)’를 포함한 재생에너지 관련 연구에 투자 자금이 몰리기 시작했다. 위기가 혁신의 씨앗이 된 것이다.
심각한 에너지 위기를 겪고 있는 요즘, 전 세계 투자 자금이 몰리는 곳은 바로 ‘에너지 스타트업’이다. 영국의 스타트업 스케일업 전문 기관인 테크네이션에 따르면 글로벌 에너지 기술에 대한 벤처캐피털(VC) 투자는 2021년 222억 달러(약 30조원)에 도달했고 이는 2020년에 모인 99억 달러(약 13조원)에서 124% 증가한 것이다. 에너지 위기가 시작된 2021년 같은 기간 동안 투자된 금액보다 8% 정도 증가했다. 지금의 에너지 위기가 다시 한 번 ‘에너지 혁신’의 씨앗을 심을 수 있을까. 에너지 위기의 해결사로 나선 글로벌 에너지 스타트업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에너지 혁신’ 촉발하는 유럽의 에너지 위기
그 어느때보다 심각한 상황이 예고된 위기 앞에서 특히 유럽을 중심으로 최첨단 기술을 통해 지금의 위기를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독일 베를린과 영국의 런던 등이 대표적인 유럽의 에너지 스타트업 허브다. ‘에너지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시급한 나라들을 중심으로 더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독일의 스타트업인 엔팔(Enpal)은 태양광을 이용한 에너지 사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유럽은 이미 상당수의 주택이 태양광을 설치해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 엔팔은 이때 주택 소유자가 비싼 값을 들여 태양광 패널을 구매하는 대신 ‘임대’를 통해 태양광 패널을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태양광 패널 구매와 설치에 필요한 높은 비용으로 인해 망설였던 이들까지 더욱 저렴하면서도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 서비스다. 고객들은 이 회사와 ‘임대 계약’을 거쳐 약 20년간 태양광 패널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 기간 동안 지불하는 임대료에는 태양광 패널의 설치는 물론 유지·보수와 보험까지 모두 포함돼 있다. 20년 동안 사용한 뒤에는 1유로에 패널을 구입할 수도 있다. 현재는 독일에서만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지만 시장에서는 잠재력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지난해 소프트뱅크의 주도로 2억5000만 유로(약 3400억원)를 투자 받은 바 있다.
영국의 신재생에너지 스타트업 ‘옥토퍼스에너지(Octopus Energy)’는 이미 글로벌 신재생에너지업계의 대표 주자로 자리 잡으며 ‘신재생에너지업계의 공룡’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회사다. 2015년 영국 자산 운용사인 옥토퍼스그룹에서 투자 받아 설립됐다. 2021년 기준 기업 가치를 50억 달러(약 6조원)로 평가받고 있다. 주로 태양열을 통해 전력을 생산하는 옥토퍼스에너지는 다른 곳에서 구매한 전력을 되파는 ‘리셀러’에서 출발했지만 태양열 발전소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현재는 영국 내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전력 공급 업체’로 변신했다. 최근에는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일본·독일 등에도 서비스를 시작했다. 옥토퍼스에너지의 가장 큰 무기는 클라우드 기반의 에너지 플랫폼 크라켄(Kraken)이다. 최첨단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전력을 생산하고 있는 발전소를 통해 ‘방대한 데이터’를 모으고 이를 분석함으로써 에너지 사용 패턴을 찾아낸다. 이를 통해 에너지 소비량을 예측하고 공급을 최적화하도록 지원하는 시스템이다. 지난 7월 이 회사에서 그러모은 투자 자금만 5억5000만 달러(약 7600억원)에 달한다.
독일의 필라스(Phelas) 역시 최근 주목받고 있는 스타트업이다. 태양열과 풍력 같은 신재생에너지의 가장 큰 단점으로 여겨지는 것이 간헐성이다. 전력 생산량이 날씨와 같은 외부 요인에 의해 좌우되는 특성을 의미한다. 필라스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풍력과 태양열 등을 저장하는 특별한 저장 장치를 구축하고 있다. 이 업체는 최근 주목받고 있는 ‘액화 공기 에너지 저장(LAES) 기술’을 활용하고 있는데, 이는 기체를 낮은 온도에서 액화해 에너지를 보관하는 것이다. 극저온에서 기체가 액체로 변한다는 것을 이용한 기술로, 전력을 활용해 기체를 액화한 후 보관하다가 액체가 기화할 때 팽창하는 힘으로 터빈을 돌려 전기를 만든다. 이 기술은 현재 에너지 저장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리튬 이온 배터리와 함께 향후 에너지 저장 시장을 이끌어 갈 경쟁력 있는 ‘대안 기술’로 평가받고 있다.
LAES 기술과 함께 신재생에너지의 필수 요소인 에너지 저장 문제를 해결해 줄 것으로 각광받고 있는 또 다른 재료가 있다. 바로 ‘소금’이다. 2001년 설립된 스웨덴의 대표적 에너지 기술 스타트업인 솔트엑스(Salt X)는 나노 코팅 처리가 된 소금을 사용해 열에너지를 저장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소금은 수천 번 다시 충전할 수 있어 재활용이 간편한 데다 배출되는 유해 물질 없이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각광받고 있다. 하지만 에너지 변환 효율이 떨어진다는 것이 단점이다. 솔트엑스는 최근 건축 자재 등으로 활용되는 석회석을 생산하는 데 신재생에너지와 함께 탄소 포집 기술을 활용한 ‘친환경 석회석’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며 다양한 친환경 에너지 분야에서 혁신을 이어 가고 있다.
<돋보기> 한국에서 활약 중인 ‘에너지 기술 스타트업’은?
‘신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은 에너지 위기를 가장 크게 맞닥뜨리고 있는 유럽 만의 과제는 아니다. 특히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 이후 탄소 중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한국에서도 최첨단 기술에 기반한 에너지 스타트업들의 활약이 눈에 띄고 있다.
그 대표 주자가 인공지능(AI)·사물인터넷(IoT)·5세대 이동통신(5G) 등의 최신 기술을 활용해 가상 발전소(VPP)를 개발한 식스티헤르츠다. 가상 발전소는 말하자면 ‘발전소 없는 발전소’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풍력·태양광 등 소규모의 신재생에너지 발전소를 클라우드 기반의 AI 소프트웨어를 통해 ‘가상의 발전소’에서 하나의 발전소처럼 통합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식스티헤르츠는 이를 위해 지난해 전국 10만 개 이상의 태양광·풍력 발전소를 조사해 미래 발전량을 예측할 수 있는 ‘대한민국 가상 발전소’ 기술을 개발했다. 에너지 전환에 필수적인 ‘에너지 효율’을 높임으로써 공공 데이터 활용의 우수 사례로 인정 받아 대통령상을, 소셜벤처 경연 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받기도 했다.
에이치에너지는 친환경 에너지 투자 플랫폼 모햇(모두의 햇살)과 태양광 모니터링 김태양(SolarKim) 서비스를 운영하는 업체다. 모햇은 특히 에너지 투자의 장벽을 낮춰 주는 플랫폼으로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에이치에너지의 공략 대상은 ‘옥상 태양광 시장’이다. 옥상과 같은 유휴 부지를 활용한 태양광 투자에 일반 시민들이 ‘모햇 플랫폼’을 통해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옥상 태양광 발전소를 통해 생산한 전력은 전력 시장과 한국전력공사 자회사에 판매해 수익을 내고 그 수익은 투자자들에게 배분하는 형식이다. 태양광 투자에 관심이 있는 에너지 소상공인은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누구나 손쉽게 투자에 참여하고 수익을 내며 친환경 에너지 생산을 통해 탄소 중립 목표 달성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엔라이튼은 쉽게 말해 ‘에너지 비즈니스 플랫폼’이다. 기존에 솔라커넥트라는 사명을 이용했지만 태양광 시장에 국한하기보다 신재생에너지 전반으로 사업 분야를 넓히기 위해 올해 사명을 ‘엔라이튼’으로 변경하고 새 출발했다. 태양광 발전 사업에 필요한 정보기술(IT)과 금융 관련 자문 서비스 등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신재생에너지는 소규모 발전소들이 적지 않다는 점을 감안해 발전소의 사업성 검토는 물론 모듈 인버터 등의 기자재 유통, 발전소 자산 관리 등의 부문에서 시장 참여자를 연결하며 정보 비대칭 문제를 해소하고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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