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 수지 적자 행진 이어 가는 일본 경제… 2014년부터 순채권국 된 한국

[글로벌 현장]
일본 도쿄의 일본은행.(사진=연합뉴스)
일본 도쿄의 일본은행.(사진=연합뉴스)
‘월급쟁이 한국이 왜 건물주 일본을 걱정하나.’

일본 경제가 위기라는 분석이 나오면 어김없이 따라붙는 반응이다. 400조 엔(약 3883조원)이 넘는 해외 자산에서 이자와 배당만으로 매년 20조 엔을 벌어들이는 일본을 건물주에 비유할 수 있다면 월별 무역 수지에 울고 웃는 한국은 월급쟁이라는 것이다.

반면 최근 들어서는 대기업에 다니는 월급쟁이가 빌딩 유지·보수료를 감당하지 못해 허덕이는 건물주를 걱정할 수도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30년 장기 불황으로 일본 경제가 추락하는 동안 한국 경제의 위상이 크게 높아진 결과다.

2010년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한국과 비교가 불가능한 경제 대국이었다. ‘건물주와 월급쟁이론’에 비유하자면 당시 일본은 초일류 대기업에 다니는 건물주였기 때문이다. 많을 때는 연간 10조 엔이 넘는 무역 흑자(월급)를 올리는 동시에 매년 20조 엔씩을 이자와 배당(건물 임대료)으로 벌어들였다.

일본 무역 수지, 13개월 연속 적자

400조 엔이 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대외 자산은 이렇게 벌어들인 경상 흑자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결과다. 하지만 2010년 이후 일본 경제를 떠받치던 두 기둥 가운데 하나인 무역 수지가 무너지면서 상황이 변했다.

일본 재무성이 9월 15일 발표한 8월 무역 수지는 2조8173억 엔 적자로 역대 최대 규모였다. 지난해 연간 무역 수지도 2조5615억 엔 적자였다. 일본의 무역 수지는 13개월 연속 적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10년 이후 엔화 가치 급등을 피해 일본 기업들이 생산 시설을 해외로 옮기면서 수출 비율이 낮아진 영향이다. 여기에 원자재 값 급등과 엔화 약세로 수입이 급증하면서 무역 수지가 기록적인 적자 행진을 벌이고 있다.

무역 흑자가 막을 내렸다는 것은 대기업에 다니던 건물주였던 일본이 정리 해고를 당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회사에서 잘렸더니 그동안 월급 믿고 쓴 마이너스 통장과 할부금(무역 적자)이 임대료(배당·이자소득)를 넘어설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이 일본 경제의 현주소다. 무역 수지와 배당·이자 소득 등을 모두 반영한 경상 수지가 올해 42년 만에 적자로 돌아설 것이라는 전망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임대료로 마이너스 통장과 할부금을 갚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면 건물을 팔 수밖에 없다. 일본이 자랑하는 31년 연속 세계 1위 규모의 대외 자산이 흔들리는 것이다.

2020년 말 일본의 순대외 자산은 356조9700억 엔으로 2019년보다 약 50조 엔 감소했다. 한때 2배 이상 벌어졌던 독일과의 차이가 24조 엔까지 좁혀지면서 2021년에는 역전될 것이라고 예상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5월 일본 재무성이 발표한 2021년 일본의 대외 순자산은 411조1841억 엔으로 전년 동기 대비 15.8% 증가했다. 역전될 것이라던 2위 독일(315조7207억 엔)과의 격차도 다시 100조 엔 가까이 벌어졌다. 31년 연속 세계 최대 대외 순자산 보유국의 지위도 유지했다.

수치상으로는 일본의 대외 자산이 불어난 것으로 보이지만 엔저(低)로 인한 착시 효과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작년 말 달러당 엔화 가치는 115.12엔으로 1년 동안 10엔 이상 떨어졌다. 엔저로 인한 평가 이익이 81조8000억 엔에 달했다.

지난해 대외 자산 증가 규모는 54조2141억 엔이니 엔저로 인한 평가 이익 부분을 빼면 일본의 대외 자산은 2년 연속 감소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일본은 해외 자산의 70% 이상을 외화로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엔화의 가치가 떨어질수록 보유 금액이 늘어나 보인다.

급락한 엔화 가치…늙어 버린 일본

경상 적자와 대외 자산 축소는 일본 경제 역시 ‘국제 수지 발전 단계설’의 숙명을 피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국제 수지 발전 단계설은 국제 수지와 대외 자산 구조의 변화로 국가의 흥망성쇠를 단계별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경상 수지와 이를 구성하는 무역 수지, 해외 자산에서 벌어들이는 이자·배당 소득 수지 등 3개 항목이 각각 흑자인지, 적자인지에 따라 국가의 성장 단계를 미성숙 채무국, 성숙 채무국, 채무 변제국, 미성숙 채권국, 성숙 채권국, 채권 소진국 등 여섯 가지로 분류한다.

미성숙 채무국은 산업 발전을 막 시작한 나라다. 산업을 발전시키려면 원자재를 수입하고 해외에서 자금을 차입해야 한다. 따라서 무역 수지는 물론 이자를 지급하느라 소득 수지까지 모두 적자가 된다.

성숙 채무국은 산업이 발전하고 수출 경쟁력이 향상돼 무역 수지가 흑자로 전환한 단계다. 다만 경상 수지는 적자가 계속되는 상태다. 막대한 해외 차입에 따른 이자 지불 금액(소득 수지 적자)이 무역 흑자를 웃돌기 때문이다.

채무 변제국은 산업이 한층 성장해 무역 흑자가 소득 수지 적자를 웃도는 단계다. 경상 수지가 흑자로 돌아서면서 대외 채무 상환이 가능해진다. 자본 수출국이 되는 것이다. 미성숙 채권국은 무역 수지가 정체 상태에 접어들지만 늘어난 대외 자산 덕분에 소득 수지가 흑자로 전환하는 단계다. 무역 수지와 서비스 수지가 ‘쌍끌이 흑자’를 나타내는 시기다.

성숙 채권국은 산업의 국제 경쟁력이 떨어져 무역 수지가 적자로 돌아서지만 대외 자산이 더욱 늘면서 소득 수지 흑자도 확대되는 단계다. 경상 흑자가 유지되는 한편 대외 자산도 계속 늘어나는 상태다.

최종 단계인 채권 소진국은 무역 적자 규모가 소득 수지 흑자 규모를 웃돌아 경상 수지가 적자로 돌아서는 단계다. 쌓아 뒀던 대외 자산을 헐어 쓰는 단계이기 때문에 대외 자산도 감소하게 된다.

무역 수지와 소득 수지가 쌍끌이 흑자를 기록하던 2010년까지 일본은 미성숙 채권국이었다. 무역 수지가 적자로 돌아선 2010년부터 코로나19 사태 이전까지 일본은 성숙 채권국으로 변했다.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이자와 배당으로 무역 적자를 채워 경상 흑자를 유지하는 국가가 됐다.

코로나19 사태 확산 이후 일본은 엔화 가치 급락에 따른 무역 적자 확대로 채권 소진국의 경계에 들어서고 있다. 불과 10여 년 만에 일본 경제가 발전 단계설의 두 단계를 건너뛰며 급격히 늙어 버린 것이다.

일본의 고민은 지금이라도 산업 구조를 신속하게 전환하지 않으면 노화가 더욱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일본이 부러워하는 나라는 같은 제조 강국 독일이다. 독일은 브랜드 가치가 높은 고급차와 고부가 가치 제조업을 끌어안았다. 동독과 통일하면서 풍부한 노동력도 확보했다.

가라카마 다이스케 미즈호은행 수석 시장 이코노미스트는 “독일 내에 주력 제조업의 생산 설비가 남아 있는 덕분에 국가의 젊음을 상징하는 무역 흑자국의 간판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은 부가 가치와 노동 생산성을 높이는 대신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전 총리의 대규모 경기 부양책)의 엔저 유도를 통해 기업 실적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엔저로도 생산 연령이 1995년을 정점으로 급격히 감소하는 인구 변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기업들은 생산 거점을 해외로 옮겼고 현지에서 벌어들인 수익을 일본에 가지고 들어오길 꺼린다. 산업 경쟁력이 떨어진 일본은 외부 환경이 나빠지면 곧바로 무역 적자국이 되는 허약 체질이 됐다.

국제 수지 발전 단계설에 따르면 한국도 조만간 건물주가 된다. 2014년부터 한국은 대외 채무보다 대외 채권이 많은 순채권국이 됐다. 막대한 대외 자산을 보유한 건물주까지는 아니지만 ‘미니 임대업자’가 된 셈이다. 산업화 이후 한국은 인구와 산업 구조가 유사한 일본과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한·일 양국 경제 전문가들이 월급쟁이가 이웃의 건물주를 걱정할 때가 왔다고 진단하는 이유다.

도쿄(일본)=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