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대표 리스크’ … 국민의힘 대표직 둘러싸고 끝없는 싸움·민주당은 대표직 ‘방탄’ 활용
홍영식의 정치판지금 여야가 처한 공통적인 현상이 있다. 내용과 형식은 다르지만 모두 ‘대표 리스크’를 안고 있다는 점이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이준석 전 대표를 둘러싸고 내분에 휩싸여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대표직을 대표 개인의 사법 리스크 방탄용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은 대선 승리 이후 4개월 넘게 우왕좌왕이다. 지난해 4·7 재·보궐 선거와 올해 대선·지방선거에서 짜릿한 3연승을 이뤘다. 하지만 환희는커녕 갈 길 잃은 어린양과 다름없다. 선거 3연승한 정당이 두 번이나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린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법원이 이 전 대표가 낸 가처분 신청을 인용하면서 주호영 체제가 무너진 뒤 국민의힘은 정진석 비대위가 출범했다. 하지만 ‘비대위 시즌2’가 순탄하게 운영될지는 미지수다. 이 전 대표가 정진석 비대위도 무효 가처분 신청을 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내분의 중심엔 중앙당 대표직을 둘러싼 당권 싸움이 있다. 이 전 대표는 어떻게든 대표직을 되찾기 위해 혈안이다. ‘윤핵관’들은 당권 장악을 위해 이 전 대표를 밀어내면서 분란이 끝이 없다.
민주당은 ‘이재명=민주당’ 체제가 완성됐다. 그 과정은 온갖 무리수로 점철됐다. 대선 패배 두 달 만에 ‘셀프 공천’으로 연고도 없는 지역구(인천 계양을)에서 의원직 도전에 나섰고 국회 입성 석 달도 안 돼 대표 자리에 올랐다. 계양을에서 5선을 한 송영길 전 의원은 이 대표에게 자리를 물려줬다. 당 내 친이재명계 의원들은 ‘이재명 대표’를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당헌까지 개정해 이 대표 방탄을 두텁게 만들었다. 선출직 최고위원 5명 가운데 4명이 강골 친명계로 짜여졌다. 마치 치밀하게 짜여진 각본대로 움직이는 것 같다. ◆인물이 정당 만들고 당은 黨首 개인 소유물化돼
대표가 뭐길래 여야 모두 이럴까. 한국 정당은 다른 어느 나라에 비할 바 없이 대표를 정점으로 한 강한 중앙당 중심의 정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3김 정치에서 봐 왔듯이 중앙당의 ‘빅 보스’인 대표가 당을 좌지우지해 온 게 우리 정당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은 대표 개인 소유물처럼 돼 왔다. 보스의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수시로 당 문패를 바꿔 달거나 이합집산을 거듭해 왔다.
영국 철학자이자 정치인이던 에드먼드 버크는 “제대로 된 공익 실현을 위해선 정책 일관성이 중요하고 일관성을 유지하게 하는 확고한 이념과 철학이 정당의 기초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당 활동에 지속성이 있어야 그 이념과 철학이 축적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이념과 철학보다 선거 유불리에 따라 서커스단 가설(假設)무대처럼 세웠다가 접기를 반복해 오다 보니 1948년 제헌국회가 출범한 이후 지금까지 국회의원을 당선시킨 정당의 평균 수명은 2년 6개월에 불과한 실정이다. 정당 체제의 허약성을 잘 말해준다. 10년 이상 같은 이름을 유지한 정당은 4개(자유당·민주공화당·신민당·한나라당)에 그친 실정이다. 100년 정당은 말뿐인 셈이다.
정치 선진국처럼 정당이 인물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인물이 정당을 만들고 당수(黨首)의 정치적 운명에 의해 정당 존립이 좌우되면서 떴다방 정당이 돼 버렸다. 절대적 권한을 가진 총재 시스템 유산이 여전히 우리 정치권에 남아 국민의힘은 대표직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고 민주당에선 대표의 위상을 더 높여 개인 방패막이로 활용하는 퇴행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중앙당 대표 중심의 수직적 구조는 여러 폐단을 낳았다. 의원들은 대표 개인을 위한 돌격대 역할을 하면서 정당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한다.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당론 중심이 어떤 부작용을 낳았는지는 우리 정당에서 익히 봐 왔다. 계파 정치의 폐해도 뿌리 깊다. 보스를 중심으로 한 계파 간 생사를 건 다툼, 공천 학살, 잇단 탈당과 창당 등이 횡행했다. 의원들은 보스에 줄을 서고 보스는 당권을 차지하기 위해 이들의 도움을 받고 앞날을 챙겨 주는 ‘담합 정치’에 다름 아니다. 공정한 시스템에 의한 당 운영이 작동되기 어려운 구조다.
보스의 말을 거스르는 것은 역적이나 다름 없고 배신으로 낙인 찍히기 십상이다. 지금도 팬덤에 의해 좌표 찍혀 조리돌림 당하기 두려워 소신 발언을 내기 무서운 게 현실이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계파 해체 선언이 나왔지만 말뿐이었고 지금도 윤핵관·이핵관·친명·비명 등 편 가르기 단어들이 횡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계파 정치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관건은 어떤 목적을 추구하느냐다. 이념적·정치적 소신에 따른 정치적 결사체라면 정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 문제는 한국의 계파 정치는 공익적 이익보다 계파를 확장하거나 선수(選數)를 늘리기 위한 것 등 개인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데 있다. 대표직을 둘러싼 국민의힘 내분도 2024년 총선 공천권을 누가 가지느냐의 싸움이다.
민주당의 이 대표도 총선에서 당내 세력 확장, 이를 통해 대선으로 가는 길을 넓힐 필요가 있다. 3김 시대는 민주화를 위해 강한 구심이 필요했다고 하더라도 다원화된 지금도 계파 투쟁과 사당화(私黨化)를 부르고 대표를 대선 징검다리로 여기는 중앙당 시스템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다. 중앙당에 수많은 당직은 필시 정치 과잉을 부를 수밖에 없다.
◆중앙당 ‘빅 보스’ 체제, 私黨化·계파 투쟁 불러 이런 행태는 아직도 퇴행적이고 권위적인 대표 체제를 추구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정치 선진화를 위해 이런 중앙당 대표 중심의 대중 정당 체제를 바꿀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제 우리 정치 시스템도 원내 정당화를 본격적으로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원내 정당화는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손잡았던 문재인·안철수 후보, 국민의힘의 전신 정당인 한나라당과 자유한국당이 정치 개혁 차원에서 추진했다. 하지만 번번이 중앙당 빅 보스들에 밀려 좌절됐다.
원내 정당화는 세계적인 추세다. 의회주의가 발전한 나라는 물론 한국처럼 대통령제인 미국은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중앙당도, 대표도 없다. 역시 대통령제인 프랑스는 중앙당은 있지만 당은 원내대표가 실질적으로 이끈다. 이들 나라에선 대표가 없으니 선거에 졌다고 대표를 대행하는 비상대책위원장도 없다. 원내 정당은 입법이라는 국회의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중앙당 대표 중심의 정당은 입법보다 선거 공천 등에 무게 중심을 두다 보니 권력 투쟁에 빠지기 쉬운 반면 원내 중심으로 돌아가면 민생을 위한 입법에 집중할 수 있다.
원내 정당화가 되면 의원들은 빅 보스 대표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소신 정치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병폐인 빅 보스 체제가 약화된다. 원내 정당화가 되면 중앙당 공천 대신 상향식 공천이 자리 잡게 되고 공천권을 둘러싼 계파 간 싸움도 잦아들 것이다. 계파 정치가 해체로 이어져 정당 민주화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다. 물론 중앙당 폐지는 정당 체제 약화를 부를 수 있다. 하지만 그 폐해가 장점보다 크다면 그 폐해를 줄이는 방안을 찾으면서 원내 정당화를 위한 논의를 본격 시작할 때가 됐다.
홍영식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한경비즈니스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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