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 감각 뛰어난 발렌시아가 영향 받아…오트 쿠튀르 디자이너로는 처음 기성복 출시

류서영의 명품이야기/지방시 ②
매건 마클(오른쪽)이 영국 해리 왕자와의 결혼식 때 입은 지방시의 웨딩 드레스. (사진 ②)
사진출처 : instagram  meghan_harry_ br
매건 마클(오른쪽)이 영국 해리 왕자와의 결혼식 때 입은 지방시의 웨딩 드레스. (사진 ②) 사진출처 : instagram meghan_harry_ br
지방시는 1952년 첫 컬렉션의 성공으로 세계 최고의 명품 브랜드인 샤넬·에르메스·루이뷔통 등과 같은 반열에 오르며 프랑스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1954년 패션계의 최대 뉴스는 샤넬의 컴백이었다. 하지만 샤넬은 크리스찬 디올의 명성에 가려져 디올이 사망(1957년)하고서야 정상에 오르게 된다. 샤넬의 패션 철학이 편안함과 실용성에 바탕을 둔 기능주의를 표현하고 있었다면 지방시의 스타일은 깨끗한 라인으로 표현되는 최고급 원단을 사용해 지극히 매혹적인 프랑스식 우아함과 순수함·심플함으로 명성을 얻었다.

지방시는 발렌시아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발렌시아가는 지방시에게 스승과 같은 존재였다. 지방시는 발렌시아가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1953년 미국 뉴욕의 한 파티에서 만났을 때 지방시는 젊은 디자이너에 불과했고 발렌시아가는 지방시에게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지방시는 발렌시아가의 디자인을 연구하기도 했고 발렌시아가의 컬렉션 피팅에 조수로 참여해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스페인 출신의 발렌시아가는 당시 이미 오트 쿠튀르의 유능한 디자이너로 명성을 날렸다. 발렌시아가는 커팅 기술과 색채 감각이 뛰어났고 그의 패션 작품에는 늘 창의성이 돋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디올이 장식을 배제한 소재의 특성을 살려 다트·턱·주름으로 신체의 자연미를 살린 기능적인 조형미와 낭만에 대한 여성의 도피적 갈망을 표현했다면 발렌시아가의 의상은 모던한 매력을 풍겼다. 발렌시아가는 자신이 추구한 심플한 라인의 의복으로 장인으로서 높이 평가받았다. 또한 그는 자신만이 갖는 비례의 구조를 창조하기 위해 여성의 체형과 신체의 선을 철저하게 연구하기도 했다.

격조 높고 우아한 패션, 귀족들에게 인기

지방시는 귀족 출신답게 격조 높은 우아한 패션 감각을 잘 표현했다. 그의 패션 작품들은 모나코 왕족, 오드리 헵번, 재클린 케네디, 윈저 공작 부인, 마리아 칼라스, 그레이스 켈리, 그레타 가르보 등 전 세계 귀족과 유명 인사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1953년에는 이탈리아 로마, 스위스 취리히,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지방시 부티크’를 열었고 1956년에는 오트 쿠튀르의 디자이너로서는 최초로 ‘지방시 유니버시티’라는 기성복을 출시했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 증가로 1960년대 초부터 유럽에서는 기성복이 확장하기 시작했다. 활동적인 여성들이 편안함을 즐기게 되면서 고급 기성복은 유럽에서 새로 떠오르는 단어가 됐다. 지방시 역시 이 흐름에 발맞춰 1968년 기성복 부티크인 ‘지방시 누벨 부티크’를 열었다.

지방시는 향수와 화장품으로도 사업을 확장시켜 나갔다. 1958년 파르팽 지방시(Parfums Givenchy)를 설립해 첫째 여성 향수인 ‘드(De)’를 내놓은 뒤 오드리 헵번에게 바치는 ‘랑테르디(L’interdit)’도 잇달아 선보여 향수의 대명사가 됐다. 이처럼 지방시는 의상만이 아니라 향수·화장품·보석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재능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포드 자동차의 내부 디자인, 싱가포르와 워싱턴 힐튼 호텔의 실내 장식을 담당했을 만큼 종합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보여 줬다.
지방시(오른쪽)와 오드리 헵번.
사진출처 : instagram  voguekorea
지방시(오른쪽)와 오드리 헵번. 사진출처 : instagram voguekorea
오드리 헵번과 지방시가 처음 만난 것은 영화 ‘사브리나’에서였다. 헵번은 자신이 주연으로 나온 영화 ‘로마의 휴일’의 의상 담당이었던 에디스 헤드의 디자인에만 의존하지 않고 오트 쿠튀르 디자이너를 찾아 프랑스로 향했다. 처음 찾았던 디자이너는 거장 발렌시아가였다. 하지만 그의 거절로 이제 막 떠오른 지방시를 만났다. 지방시는 그들의 첫 만남을 이렇게 기억한다.

“내 바로 앞에 매우 젊은 여자가 서 있었습니다. 머리에 베니스라는 글자가 가로로 쓰여진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옷은 티셔츠에 발목 길이의 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랐어요. 그녀는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지는지 설명했습니다. 나는 그녀의 영화를 위해 디자인할 시간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내 스타일이 정말 마음에 든다고 말했고 그래서 나는 원한다면 영화에서 입을 몇 벌의 의상을 컬렉션에서 골라 봐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우정과 협력은 성공적인 오트쿠튀르 패션과 영화의 만남으로 인정받으며 평생 지속됐다. 완벽하지 못한 체형에 대한 헵번의 불안감을 이해한 지방시는 그녀가 오히려 패션모델로 적합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녀와 협력해 보이시한 체형을 돋보이게 해 줄 의상을 창조했다. 영화 속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헵번은 지방시의 편안하면서 우아한 의상을 애용했다. 1969년 헵번이 안드레아 도네티와의 둘째 결혼식에서 지방시가 선물한 핑크색 미니드레스에 헤드 스카프를 두른 모습은 사랑스러움 그 자체였다(사진 ①).

레지옹 도뇌르 훈장 받아…LVMH에 매각

지방시는 1978년 프랑스 패션업계에서 최고의 디자이너에게 수여하는 황금바늘상을 수상했고 1979년 공로를 인정받아 ‘올해의 인물’에 선정됐다. 1983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슈발리에 등급을 수여받았다. 이후 지방시는 1988년 다국적 명품 기업 LVMH에 쿠튀르 하우스를 매각했고 1995년 지방시 수석 디자이너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지방시 하우스를 인수한 LVMH 경영진은 지방시 은퇴 후 하우스를 다시 성장시키기 위해 당시 떠오르던 젊은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를 수석 디자이너로 임명했다. 1년 후 알렉산더 매퀀(재임 1996~2000년)을 영입했고 그들의 과장된 디자인을 통해 큰 이슈를 만들려고 했다.
오드리 헵번(오른쪽)이 두 번째 결혼식 때 입은 지방시의 핑크  드레스(사진 ①)
사진출처 : getty images
오드리 헵번(오른쪽)이 두 번째 결혼식 때 입은 지방시의 핑크 드레스(사진 ①) 사진출처 : getty images
이후 줄리앙 맥도널드(2001~2004년)는 하우스의 전통에 대한 접근을 시도했는데 특히 헵번 스타일에 집중했다. 리카르도 티시(2005~2017년)는 본인의 디자인 특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하우스 전통을 재해석해 다시 하우스를 발전시켰다. 끌로에의 디렉터 경력을 가진 영국 출신의 클레어 웨이트 컬러(2018~2020년)는 영국 해리 왕자와 결혼한 매건 마클에게 지방시의 웨딩 드레스를 입힌 것으로 유명하다(사진 ②). 지방시는 “몸에 옷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몸에 맞게 옷이 흘러가야 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2018년 3월 10일 91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참고 자료 : ‘디자이너 지방시의 영화 의상에 관한 연구’, 이재연,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