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독일 바이오에너지 자립 마을 탐방
[ESG 리뷰] 원전도 석탄도 없이 에너지 자립을 이룬 마을이 있다. 마을을 움직이는 것은 축산에서 나온 분뇨로 만든 바이오 가스다. 마을 근처에서 발전기가 돌아간다는데 소음은 물론 퇴비로 인한 불쾌한 냄새도 나지 않는다. 비밀은 이격 거리에 있다. 마을 입구에서 약 1.6km 시설을 떨어뜨려 놓은 것이다. 차를 타고 5분 정도 올라가니 흰색 돔 지붕으로 덮인 거대한 바이오 가스 시설을 발견할 수 있었다. 140여 가구가 사용할 수 있는 열과 전기를 생산하는 베를린 인근 작은 마을 슐뢰벤(Schlöben)의 에너지 발전소다.지난 9월 14일 슐뢰벤 에너지 설비 회사 직원인 폴커 베이어에게 에너지 자립의 의미를 묻자 그는 “슐뢰벤에서는 현재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 에너지 위기로 인한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설명했다.
슐뢰벤은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약 3시간 떨어진 튀링겐 주 초입에 자리한 작은 마을이다. 마을의 80% 이상이 농경 및 삼림 지역으로, 마을 규모(15.89㎢) 대비 넓은 경작지를 보유하고 있다. 바이오 에너지로 쓸 수 있는 작물 공급이 원활하게 이뤄지는 지형 조건이다. 실제로 슐뢰벤에서 생산하는 목초와 옥수수 등은 근처 축산 분뇨와 함께 바이오 가스 시설의 주요 에너지원이다.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소똥’의 화려한 변신이다.
주민 수익에 탄소 감축까지
슐뢰벤은 마을에서 생산하는 목초와 옥수수, 소 분뇨를 일대일 비율로 섞어 바이오 가스를 생산한다. 바이오 가스는 열병합 발전소로 옮겨 열과 전기 에너지로 재생산된다. 각각 국내 기준 약 800가구, 1880가구가 사용할 수 있는 양이다. 지난해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발간한 ‘농어촌 지역 에너지 전환 해외 사례’ 보고서에 따르면 슐뢰벤 에너지 발전소는 140여 가구와 공공 및 상업 건물 등 행정구역 내 열 공급의 80%를 담당하고 있다. 이들 설비에서 생산하는 재생 에너지 전력은 마을 소비량의 700%에 달하고 초과분은 전력망을 통해 판매된다. 연간 2000톤의 이산화탄소 감축 효과가 있다.
에너지 안정성도 확보했다. 바이오 가스 에너지뿐만 아니라 우드칩 보일러도 보조 전원으로 가동 중이기 때문이다. 우드칩 보일러는 동절기 난방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때를 대비해 인근의 열병합 발전기와 함께 유동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열 공급을 담당하는 열 배관망뿐만 아니라 광역 통신망과 바이오 가스관, 하수관 등 지역 인프라의 현대화도 함께 진행됐다는 것이다. 각 건물 곳곳에는 태양광 시설도 설치돼 있다. 독일 경제수출통제청(BAFA)이 지원한 에너지 효율화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추가적 부가 가치를 창출한 사례다. 슐뢰벤을 작은 마을의 사례로만 분류하기는 이르다. 독일은 슐뢰벤처럼 바이오 에너지 자립 마을로 분류된 마을이 118곳이나 된다. 에너지 자립 전환 중인 마을도 53개에 달한다.
슐뢰벤을 에너지 자립 마을로 이끈 바이오 가스는 주로 축산 분뇨나 음식 폐기물에서 발생하는 에너지원이다. 혐기성 소화조 내에서 발효, 소화가 이뤄지면서 발생하는 가스를 포집해 활용한다. 바이오 가스는 열과 전기를 생산하는 재생 에너지원일 뿐만 아니라 정제를 거쳐 수소를 생산하는 차세대 에너지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바이오 가스 발전소는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악취와 기반 시설 확보 등의 문제 때문에 설치를 기피하는 혐오 시설이기도 하다.
슐뢰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이격 거리다. 마을과 바이오 가스 시설 간 거리는 1.6km. 분산된 열병합 발전소가 마이크로 가스관을 통해 마을에 열과 전기를 공급하기에 냄새로 인한 피해는 없다. 실제로 마을 입구에서 창문을 열고 근처 언덕에 올라갈 때까지 분뇨로 추정되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지형적 조건이 충족돼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민의 동의를 거쳐야 한다. 슐뢰벤에서는 재생 에너지 보급에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주민 수용성이나 입지 선정 등으로 인한 주민 갈등이 없었다. 슐뢰벤을 든든한 에너지 자립 마을로 이끈 것은 바로 마을 주민이기 때문이다. 정부 주도로 사업을 구상한 후 주민 의견 수용과 설득에 나서는 경우가 많은 한국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슐뢰벤 바이오 가스 시설은 마을 협동조합에서 시작했다. 슐뢰벤 주민들은 2006년부터 마을 내 자원을 이용한 에너지 자립을 고민했다. 이후 2009년 지자체, 지역농업회사와 함께 마을 협동조합을 결성하고 바이오 가스 설비 구축에 나섰다. 실제로 바이오 가스가 마을의 에너지를 책임지기까지는 3년의 시간이 더 걸렸다. 첫 가동한 2012년 이후 현재까지 10여 년간 아무런 문제 없이 운영됐다는 점은 놀라운 성과다. 아래에서부터 재생 에너지 확산의 좋은 사례다.
토마스 윙클만은 처음부터 슐뢰벤의 에너지 자립 프로젝트에 참여한 책임자다. 그는 “우리에게도 가장 큰 과제는 프로젝트에 다른 주민을 참여시키고 설득하는 과정이었다. 처음 시작한 2009년만 해도 유가가 낮은 편이었고 재생 에너지에 대한 인식도 지금 같지 않았다”며 “주민들은 에너지 위기나 기후 변화 같은 큰 문제보다 현실적으로 자신이 내야 하는 에너지 비용 문제에 더 민감하다”고 말했다.
지역 내 자원에서 얻을 수 있는 저렴하고 지속 가능한 에너지가 있다면 당연히 그것을 주요 에너지원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 주민들은 기존 에너지보다 바이오 가스로 만든 에너지를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이해했고 큰 갈등 없이 바이오 가스 시설을 슐뢰벤의 메인 에너지원으로 만들 수 있었다. 독일 에너지전환 주체는 ‘주민’
독일에너지협동조합연합회(DGRV) 역시 에너지협동조합의 역할을 강조했다. DGRV 측은 독일 에너지 전환의 역사는 에너지협동조합이 함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독일에는 지난 9월 기준 총 5071개의 에너지협동조합이 있다.
2006년 8개의 에너지협동조합이 출범한 이후 2021년까지 누적 914개의 에너지협동조합이 등장했다. 조합원은 실제 조합 운영에 의결권을 행사하거나 재생 에너지 사업 운영 이익을 나눠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경제적 이익만이 에너지협동조합의 성공 요인은 아니다. 마을의 에너지 전환을 이끈 주역이라는 자부심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한국과 유사하게 독일 역시 대부분의 재생에너지 사업이 농어촌을 중심으로 운영되기에 협동조합의 등장은 수용성 개선에도 큰 도움이 됐다.
베냐민 다네만 DGRV 홍보대변인은 “에너지협동조합은 사업 참여를 통해 재생 에너지에 대한 주민의 인식 변화를 이끌어 내는 좋은 방안”이며 “조합원은 수익 참여 주체일 뿐만 아니라 에너지를 공급받는 쪽이기도 해 더욱 중요한 이해관계인”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협동조합이 모든 에너지 갈등을 없애는 해결책은 아니다. 반대하는 주민도 있고 정부와 마찰이 생길 수도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에는 재생 에너지 관련 갈등을 전문적으로 해결·조정하는 기구가 있다. 환경보전과 에너지전환역량센터(KNE)는 연방 환경부의 지원을 받지만 중립적 역할로 갈등을 중재하는 민간 기관이다.
KNE는 지역 주민을 비롯한 다양한 이해관계인의 갈등 해결, 정책 지원 및 기술 상담 등을 통해 갈등을 해소해나간다. 티나 베어 KNE 조정관은 “재생 에너지는 기술적으로만 접근하면 안 된다. 법적·정책적 이슈가 함께 얽혀 있기에 민주적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며 “반대 목소리는 종종 시민 참여를 요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지역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결정에 관여하기를 원한다”고 설명했다. 한국도 전환 첫발…진정한 순환 경제
한국에서도 바이오 에너지 자립 마을의 대표적인 사례가 등장했다. 충남 홍성군에 자리한 원천에너지전환센터다. 원천에너지전환센터는 지난 9월 한국에너지공단에서 신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를 발급받았다. 슐뢰벤 사례처럼 잉여 전력 거래가 가능해진 것이다. 연간 예상 세외 수입액은 1200여만원(1일 생산 전력 4000kWh 기준)이다.
홍성군은 여러모로 슐뢰벤 사례와 유사한 점이 많다. 전국에서 돼지 사육량이 가장 많은 곳인 홍천은 양돈장이 밀집한 만큼 악취와 관련한 민원이 자주 발생했다. 따라서 분뇨를 다른 장소로 옮기거나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그대로 두고 이용하는 바이오 가스 플랜트가 환영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홍성의 수용성 문제도 주민의 ‘자발적 참여’가 해결의 열쇠가 됐다.
2014년 33가구의 72명 주민들이 농사를 짓던 원천마을은 자체적으로 ‘원천마을 발전 종합 계획’을 수립하고 에너지 전환 사업에 뛰어들었다. 농가 주택에 태양광을 보급하고 에너지 실태 조사를 진행했다. 패시브 하우스 개념의 스마트 축사를 건축해 에너지 효율을 높이기도 했다. 2018년 농림수산식품부에서 ‘가축 분뇨 에너지화 사업’ 대상지로 선정돼 총사업비 118억원(국비 98억원, 자부담 20억원)을 들여 원천에너지전환센터도 완공했다. 같은 해 ‘머내’라는 이름의 협동조합을 설립해 실질적 순환 경제 수립에 나섰다. 실제로 운영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슐뢰벤과 큰 차이가 없다.
독일의 에너지 싱크탱크인 ‘아고라 에네르기벤데’의 드미트리 페시아 프로그램 리더는 “농촌은 여전히 바이오에너지를 중심으로 한 시설은 중요하다. 마을 내 폐기물을 새로운 자원으로 자체 순환할 수 있는 경제적 창구”라고 설명했다.
[현장 돋보기]
도시에도 번지는 에너지 자립 바람 베를린에 위치한 ‘Efficiency House Plus(에피션시 하우스 플러스)’는 2011년 완공 후 4년간 실제로 2가구를 거주하게 하는 실증 실험을 마친 ‘플러스 에너지 건물’이다. 건물 외벽과 지붕에 설치한 태양광 패널을 통해 에너지를 발전하고 화재 방지 처리한 재활용 종이를 단열재로 사용했다. 태양광 패널은 일반 주택 설비라는 점을 감안해 기존 남동향에서 동쪽과 서쪽으로 설치 방향을 바꾸었다. 아침과 저녁 시간대에 전기가 많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또 전기차를 충전할 수 있는 충전소도 마련했다.
건물의 열은 히트펌프가 담당한다. 주거용 주택에 필요한 온수, 난방부터 환기 기능까지 담당한다. 외부 공기를 데워 실내로 들여보내는 열교환 시스템을 설치해 에너지 효율성을 높였다. 덕분에 두 번째 실험 가구부터는 에너지 플러스를 달성할 수 있었다. 이 건물은 지속가능한 건물 평가 시스템(BNB) 기준에 따라 골드 인증을 받았으며, 현재 전시 공간으로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건물 자체가 에너지 자립을 달성하면 건축물이 소비하는 탄소나 생애주기 비용이 절감된다는 점에서 큰 이점이다.
베를린 솔라 센터는 같은 건물 1층에 입주한 태양광 상담 센터다. 베를린에서는 에너지 기후 보호 플랜의 일환으로 2023년 1월부터 신축 건물 태양광 설치 의무화, 기존 건물의 지붕 리모델링 시 태양광 패널 의무화 등 조항을 마련했다. 최근 유럽을 강타한 에너지 위기도 한몫해 시민의 상담 건수가 늘고 있는 추세다. 지난해 한 달 기준 30건 내외였던 상담이 현재 90건까지 늘어났다. 로라 페레리 솔라 센터 홍보 담당은 “상담 신청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에너지전환에 따른 경제적 비용 절감을 고려한다. 에너지 자립을 위한 많은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민들의 움직임도 적극적이다. 유럽 내 에너지 위기의 여파가 거세지자 에너지 자립을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브란덴부르크주 텔토우에 거주 중인 크리스티안 젠프트레벤 씨는 한화큐셀을 통해 지난 5월 집 지붕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했다. 규모는 8.69kWp(킬로와트피). 설치한 태양광과 ESS를 통해 연간 70∼80%까지 에너지 요금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1403호와 국내 유일 ESG 전문 매거진 ‘한경ESG’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더 많은 ESG 정보는 ‘한경ESG’를 참고하세요.)
베를린·슐뢰벤(독일)=조수빈 기자 subin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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