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 하락으로 ‘자본 도피’ 가능성 제기…1년 예산의 25%를 국채 원리금 갚는 데 쓰는 정부
[글로벌 현장] “1000조 엔(약 9800조원) 규모인 일본 국가 부채의 절반을 일본은행이 사들이고 있다. 일본은행은 정부의 자회사다. 만기가 돌아오면 다시 일본은행에서 빌려 막으면 된다. 국가 부채가 늘어나는 것을 걱정할 필요 없이 적극적으로 경제 대책을 펼쳐야 한다.”올해 7월 총격으로 사망한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5월 9일 오이타현의 한 강연에서 한 말이다. 법적으로 독립성을 인정받는 일본은행을 ‘정부 자회사’라고 표현한 것이 논란이 됐다. 아베 전 총리도 자신의 발언이 문제가 되자 “비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베 전 총리가 펼친 논리를 들어 일본은 걱정이 없다고 믿는다. 국가 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256%까지 늘었지만 부채의 절반 이상을 일본은행이 갖고 있으니 문제가 없다는 논리다. 일본은행이 자회사라 돈을 또 찍어 내면 된다는 것이다.
혹 일본은행이라는 방파제가 무너져도 2021년 말 2000조 엔이 넘는 일본 가계의 금융 자산이 있어 괜찮다고 한다. 일본이 부도 위기에 몰려도 갚을 빚은 총 1000조 엔 남짓이다. 2000조 엔의 금융 자산을 가진 일본인들이 국채를 사줄 테니 끄떡없다는 믿음이다.
일본의 최대 채권자는 일본은행
아베 전 총리의 발언대로 일본은행은 일본 정부의 최대 채권자다. ‘아베노믹스’를 주도한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가 취임하기 직전인 2013년 3월 말 일본 정부가 발행한 국채 가운데 일본은행의 보유 비율은 13%였다. 올해 3월 말 일본은행의 보유 비율은 43%로 3배 이상 높아졌다.
일본은행은 올해 6월 월간 기준으로 사상 최대 규모인 16조2000억 엔의 일본 국채를 매입했다. 그 결과 6월 말 기준 일본은행의 국채 보유 비율은 50%가 넘은 것으로 추산된다. 일본은행은 최근 수년간 일본 정부가 발행하는 국채의 절반 이상을 사들였다. 심할 때는 90%를 쓸어 담기도 했다.
중앙은행이 국채를 사들여 정부의 운영 자금을 대는 구도를 재정 파이낸스라고 한다. 일본은 재정 파이낸스를 법으로 금하고 있다. 군국주의 시절 일본은행이 일본 정부가 찍어낸 국채를 전쟁 자금으로 댔다는 반성에서 나온 법이다. 그러자 일본은행은 금융회사가 사들인 국채를 되사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사실상의 재정 파이낸스를 하고 있다.
일본은행이 국채를 쓸어 담으면 국채 가격이 오르고 가격과 반대로 움직이는 금리는 떨어진다. 금리가 ‘제로(0)’에 가까우니 일본 정부로서는 1000조 엔에 달하는 빚의 이자 부담을 줄일 수 있고 거리낌없이 새로 국채를 찍어 낼 수도 있다. 빚의 절반을 일본은행이 갖고 있으니 빚 독촉에 시달릴 일도 없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빚이 1000조 엔이나 되는데 부담이 없을 수 없다. 일본 정부는 지금도 1년 예산의 25%를 국채 원리금을 갚는 데 쓴다. 일본 재무성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앞으로 10년간 국채 이자로만 매년 8조 엔을 지불해야 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지금까지와 같은 초저금리가 계속된다는 전제를 토대로 분석한 수치다.
세계적인 금리 상승 국면에서 일본은행도 언젠가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는 때가 온다. 그렇게 되면 이자 부담이 더욱 무거워진다. 금리가 재무성 예상보다 1% 더 오르면 2025년부터 연간 이자 부담은 3조7000억 엔 더 늘어난다. 예상보다 2% 오르면 이자 부담이 7조5000억 엔 더 증가한다. 이자로만 매년 15조 엔 안팎을 내야 하는 것이다. 참고로 일본의 1년 방위비는 5조 엔이 조금 넘는다.
일본 정부의 빚쟁이가 일본은행과 일본 금융회사만인 것도 아니다. 2010년 5%를 조금 넘었던 외국인의 일본 국채 보유 비율은 지난해 13.4%까지 높아졌다. 일본 경제가 휘청거릴 때 외국인이 130조 엔이 넘는 국채를 한꺼번에 던질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일본을 버리는 일본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2000조 엔이 넘는 금융 자산을 갖고 있으니 괜찮다? 한국의 금 모으기 운동처럼 일본이 국가 부도 위기에 몰렸을 때 일본인들이 국민적으로 국채 사 주기 운동을 벌일지는 별개로 치자.
사 주고 싶어도 못 사 주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게 됐다. 일본의 부가 해외로 이탈할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행에 따르면 2021년 말 일본의 가계 금융 자산은 2023조 엔으로 처음 2000조 엔을 넘어섰다. 1000조 엔을 돌파한 1992년 이후 30년 만에 2배가 됐다. 이 가운데 절반이 넘는 1092조 엔을 일본인들은 현금과 예금으로 보유하고 있다. 여차하면 일본 국민들이 일본 국채를 사 주면 된다는 믿음은 이 두둑한 현금 보따리에서 나온다.
하지만 올 들어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지난 4월 이후 JP모간체이스은행과 미즈호은행 등 대형 은행들은 잇달아 일본 가계 부문의 ‘캐피털 플라이트(자본 도피)’ 가능성을 경고하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일본인의 자본 도피는 합리적인 행동이다. 올 들어 엔화 가치는 20% 넘게 급락했다. 미국과 일본의 국채 금리 차는 3%를 웃돈다. 일본인들은 가만히 앉아 20%를 손해 본 셈이다. 그 대신 엔화를 팔고 달러를 사 미국 국채에 투자했다면 20%의 환차익에 3%의 금리 차까지 얻을 수 있었다.
2016년부터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도입한 결과 일본의 예금 금리는 사실상 제로(0)다. 엔화를 끌어안고 있어봐야 이자 소득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30년 가까이 물가가 오르지 않던 시대에는 예금 금리가 제로여도 상관없었다. 엔화가 안전 자산이었기 때문에 그 차체만으로 보유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판이 바뀌었다. 엔저(低)가 수입 물가를 급등시켜 재화와 서비스 가격을 인상시키는 ‘나쁜 엔저’의 시대가 열리면서다. 주변의 일상 용품과 식품 가격이 일제히 오르기 시작하자 가지고 있어봐야 가치가 떨어지기만 하는 엔화는 ‘불안한 자산’으로 변했다.
일본의 부가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은 통계로 확인된다. 2022년 1분기 실질 GDP는 연율 환산 538조7000억 엔이었다. 다만 GDP 계산에 사용된 물가는 2015년 기준이었다. 2015년 이후의 가격 변동과 교역 조건 악화를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 변화를 감안한 실질 국내총소득(GDI)은 527조2000억 엔이었다. 실질 GDP와 실질 GDI의 차이인 11조5000억 엔 만큼이 해외로 유출된 소득이다.
주요국 가운데 심각한 부의 유출을 겪는 나라는 일본뿐이다. 엔화 가치가 유독 많이 떨어진 때문이다. 일본의 가계 자산이 본격적으로 해외로 빠져나가면 엔화 약세의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자본 도피의 유혹은 더욱 커진다.
가라카마 다이스케 미즈호은행 수석 시장 이코노미스트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한다. 그는 “대세를 따르는 경향이 강한 일본인들이 해외 자산을 사들이기 위해 엔화를 팔기 시작하는 것이 가장 무서운 ‘엔저 리스크’”라며 “가계 금융 자산의 10%만 외화 자산으로 이동해도 100조 엔어치의 엔화 매도가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2021년 일본 무역 적자(5조3700억 엔)의 20배에 달하는 규모다.
도쿄(일본)=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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