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경제 제재‧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는 국제 통상 질서로 자리 잡아
바이든 행정부, 첨단 기술 분야에 대해 중국을 글로벌 공급망에서 제외
범용 상품에 대한 중국 의존도도 대폭 축소
미국은 10월 7일 일정 수준 이상의 ‘미국산’ 첨단 반도체, 반도체 개발·생산 장비와 소프트웨어를 중국에 수출할 때 미 상무부 경제보안국(BIS)의 수출 허가 심사를 받도록 공표했다.
여기에서 핵심 사항은 ‘미국산’의 정의다. 수출 국가에 따라 비율이 다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미국의 부품·기술·소프트웨어가 10~25% 이상 포함되면 미국산으로 간주하게 된다. 따라서 제삼국도 영향을 받게 된다. 다분히 미국의 일방적인 조치이고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국제 사회의 반발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반도체 생산에 참여하고 있는 국가가 주로 선진 우방국이므로 미국의 처지를 이해하는 편이고 미국에 이의를 제기하기보다 예외 조치 등을 통해 피해 최소화 전략을 추구하고 있을 수도 있다.
현 상황에서 미국산 장비와 소프트웨어 없이는 첨단 반도체를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반도체 굴기를 추진해 온 중국은 격앙할 수밖에 없고 중국에 반도체 생산 기지를 운영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현지 공장 운영에 차질을 빚지 않을까 우려했다. 한국의 산업 통상 및 외교 당국은 미국과 사전 협의를 통해 현재 운영 중인 시설에 필요한 기자재는 앞으로 심사를 통해 중국으로 조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4년 뒤인 1949년 미국은 서방 세계(초기에는 주로 유럽 국가)를 설득해 ‘대공산권 수출 통제 제도(일명 코콤)’를 통해 구소련과 위성 국가에 대한 전략 물자 수출을 통제했다. 1991년 소련이 공식 붕괴되자 우방국들은 코콤의 자진 해체를 요구했고 늘 안보 위협을 우려했던 미국은 또다시 우방국들을 설득해 1996년 코콤 후속으로 바세나르 체제를 출범시켰다.
바세나르 체제에는 한국을 포함해 40여개 국가가 회원국으로 참여하고 있다. 미국과 달리 우방국들은 바세나르 협정을 소극적으로 준수했다. 하지만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면서 미국은 독자적인 수출 통제 체제를 강화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 미·중 갈등이 격화하면서 미국은 기존 다자간 수출 통제 제도와는 대상 범위, 적용 방식, 처벌 등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화된 포괄적 수출 통제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했다. 행정부가 결심만 하면 의회의 별도 승인 없이 상무부의 산업보안국이 관리하는 수출 통제 규정을 변경하면 전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조치를 발동할 수 있게 됐다. 이번 중국에 대한 조치도 행정부의 판단에 따른 수출 통제 규정 개정으로 가능했다.
첨단 기술 분야에 대해서는 중국을 글로벌 공급망에서 제외하고 범용 상품에 대한 중국 의존도를 대폭 줄인다는 것이 바이든 행정부의 중국 정책이다. 일전에 조 바이든 대통령은 중국에 대한 정책은 향후 ‘10년 전쟁’이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동안 미국은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으로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고 무역 자유화와 수출 확대라는 권리만 누린 것으로 비판해 왔다. 심지어 마이크 폼페이오 전 국무장관은 중국의 WTO 가입을 지지한 전임 클린턴 행정부가 결정적인 실책을 했다고 밝혔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몇 년 후 내수규모가 세계 최대 규모가 될 중국과의 거래를 변경하기 어렵고 이미 중국은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을 공급망에서 배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컨센서스(사실상 만장 일치)를 의사 결정의 원칙으로 하는 WTO에서 중국을 퇴출시킬 수 없다. 이미 WTO를 무기력하게 만든 미국은 WTO를 대체할 새로운 국제 통상 질서를 만들어야 하지만 미국의 리더십이 약화된 상황에서 이것 역시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전략가들은 자국의 포괄적 수출 통제 제도를 국제화할 것으로 생각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무고한 인명이 살상되고 1000만 명에 가까운 실향민이 고국을 떠나 인근 국가로 대피하는 전쟁 참상이 미국에게 유리한 여건을 만들었다. 미국이 주도한 대러시아 경제 제재에 포함된 강력한 수출 통제 방식을 우방국들이 수용했다.
수출 통제 체제 강화는 이미 미·유럽연합(EU) 간 무역기술이사회(TTC)에서 논의했고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IPEF)에서도 논의 대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와 중국에 대한 반도체 수출 통제는 이미 국제 통상 질서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포괄적 수출 통제 체제는 미국이 생각하는 새로운 국제 통상 질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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