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유의 ‘감정적 역동성’이 토대…정부 지원과 대기업 자본 만나며 세계로 가다
“자유로운 상상력과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관객을 단번에 현혹시킨다. 그리고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느낌을 주는 순간, 사정없이 마음을 흔들며 심장을 무너뜨린다.”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 대한 미국 매체 뉴욕타임스(NYT)의 평가다. 영화가 가진 매력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이 정도면 최고의 극찬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상상력·미장센(시각적 요소를 배열하는 작업)·반전까지 영화 주요 요소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고 봤으니 말이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이어 2년 만에 오스카의 영광이 재현될 것이란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10월 14일 북미에서 개봉된 ‘헤어질 결심’에 호평이 쏟아지고 많은 관객이 몰리고 있다. 이 작품은 내년 3월 열릴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도전한다. 한국 영화 대표로 아카데미상 국제 장편 영화 출품이 확정됐다. 개봉을 시작으로 오스카 수상에 유리한 여론을 만들기 위해 대대적 홍보전인 ‘오스카 레이스’에도 본격 돌입한다. NYT뿐만 아니라 영화 전문 매체인 인디와이어, 연예 매체 버라이어티 등 많은 외신들은 이 작품이 아카데미 주요 부문의 후보에 대거 오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K-무비의 확산을 단순히 ‘열풍’이라고만 부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대중적 인기를 얻는 게 전부가 아니라 뛰어난 작품성까지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K-무비는 최고 권위의 시상식과 영화제를 휩쓸고 있다.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칸 국제영화제’에서 박 감독은 ‘헤어질 결심’으로 감독상을 받았고 ‘브로커’에 출연한 송강호 배우는 남우 주연상을 차지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특정 국가의 작품·감독·배우 모두가 골고루 인정받는 경우는 과연 얼마나 될까. 미국·프랑스·영국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하곤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 영화는 어떤 힘을 가졌기에 전 세계에 이토록 강력하고 튼튼한 닻을 내리게 된 것일까.
감정적 역동성과 통렬한 시선 그 답을 찾는 과정은 미국 영화계 거장으로 꼽히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얘기에서 출발할 수 있다. 영화 ‘아이리시맨’과 ‘휴고’ 등 명작을 만들어 온 그는 영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영화는 무엇이 프레임 안에 있고 무엇이 프레임 밖에 있는지의 문제다.” 영화란 인간의 다양한 감정과 현실에 있는 각양각색의 소재 중 카메라 안에 무엇을 담을지 또는 담지 않을지에 대한 선택으로 만들어 낸 결과물이란 의미다.
그렇다면 ‘한국 영화는 무엇을 담아 왔나’가 K-무비가 가진 힘에 대한 답이 될 것 같다. 한국 영화의 역사는 100여 년에 달한다. 1919년 나온 김도산 감독의 ‘의리적 구토’가 한국 최초의 영화다. 이 작품은 의붓어머니에게 핍박 받던 주인공 송산이 힘들어도 참고만 살다가 마침내 복수한다는 내용이다. ‘권선징악’이라는 간단명료한 주제처럼 보이지만 ‘복수’라는 행위엔 온갖 감정이 담겨 있다. 인고의 세월을 거치며 겪었을 폭풍같은 고뇌, 복수에 나설 때 터져 나오는 울분과 한 그리고 일종의 카타르시스적인 마음의 정화와 안정까지 휘몰아친다.
1926년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은 이 감정들을 개인에서 민족으로 확장해 나간다. 작품의 주인공은 3·1운동 때 체포돼 극심한 고문으로 정신 이상자가 된 영진이다. 영진은 친일 행위를 일삼는 기호에게 여동생 영희가 겁탈당할 뻔하자 낫으로 기호를 죽인다. 그리고 그가 일본 순사에게 붙잡혀 가던 중 ‘아리랑’ 노래가 구슬프게 흘러나온다.
이렇듯 초창기 영화만 보더라도 K-무비 힘의 근원을 짐작할 수 있다. 봉 감독의 얘기처럼 한국 영화엔 특유의 ‘감정적 역동성’이 담겨 있다. 봉 감독은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한 외국 언론이 “한국이 독창성으로 인정받는 소감이 어떤가”라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한국에서 멋진 아티스트들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감정적으로 역동적인 나라다.” 즉, 한국 영화는 개인과 민족 내면에 있는 감정의 응어리를 카메라에 담고 그 감정들이 프레임 안에서 마음껏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분출될 수 있도록 한다.
카메라가 꾸준히 응시해 온 소재와 주제의 힘도 크다. 봉 감독이 ‘기생충’을 만들 때 오마주한 김기영 감독의 ‘하녀’를 떠올려 보자. 1960년 개봉된 이 작품은 당시 중산층으로 올라선 서울의 한 가정과 이들의 집에 들어간 하녀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 가정에 깊숙이 침투하려는 하녀의 욕망, 하녀로 인해 다시 하층민으로 전락할까 두려워하는 가족의 불안이 다층적으로 겹쳐 흐른다. 작품은 이를 통해 한국 사회에 만연한 계층 문제를 통렬히 담아냈다.
현실을 응시하는 날카로운 시선, 이를 세련되게 풀어내는 탁월한 감각은 오늘날 ‘기생충’의 밑거름이 됐다. 그리고 마침내 K-무비 역사에 길이 남을 최고의 명장면을 만들어 냈다. ‘기생충’이 아카데미 최고상인 작품상을 포함해 4관왕을 휩쓰는 모습을 바라보며 국민들은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그동안 차근차근 쌓아 온 한국 영화만의 시간과 공력을 인정받는 순간이었으니까.
‘미나리’처럼 뿌리 내리고 자라나는 K-무비
K-무비가 세계적으로 뻗어 나갈 수 있었던 바탕엔 한국 시장에서 마련된 탄탄한 산업적 토대가 있었다. 그 토대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때는 한국 영화의 전성기를 이끌고 있는 감독들이 대거 배출된 1990~2000년대다. 당시 이창동 감독부터 봉 감독, 박 감독 등이 잇달아 데뷔했다. 기발한 아이디어와 도전 정신으로 중무장한 감독들이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엔 정부 지원, 대기업 자본의 유입 등 다양한 요인이 맞물려 작용했다. 정부는 1995년 ‘영화진흥법’을 제정해 영화 제작부터 상영·수출 등에 대한 지원 시스템을 구축해 나갔다. 영화가 하나의 명실상부한 산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기업들도 생겨났다. 1990년대 들어 삼성영상사업단 등 대기업이 영화 산업에 진출했다. 1995년 한국 최초 멀티플렉스인 ‘CGV 강변’이 세워지면서 관람 환경도 크게 바뀌었다.
오랜 시간 영화 사업에 꾸준히 투자하고 감독들을 지원한 기업도 있다. CJ ENM이 대표적이다. CJ ENM은 한국 영화에 대해 전혀 알지도, 관심도 없던 글로벌 시장에 계속해 문을 두드리고 네트워크를 쌓는 데 앞장서 왔다.
그 결과 이제 K-무비는 글로벌 시장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특정 영화 한두 편에만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 아니다. 다수의 한국 영화에 대한 판권 구매 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다. ‘기생충’ 등을 통해 한국 영화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고 넷플릭스와 같은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한국 작품을 접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덕분이다.
이를 기반으로 K-무비는 영토 확장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헤어질 결심’엔 중국 배우 탕웨이가, ‘브로커’엔 일본 출신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참여해 글로벌 프로젝트로 진행됐다. 한국 영화계에 먼저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글로벌 제작사들이 늘어나고 있는 만큼 앞으로 더욱 많은 글로벌 합작이 이뤄질 예정이다.
지난해 아카데미에서 여우 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 배우가 출연했던 영화 ‘미나리’가 떠오른다. ‘미나리’는 한국계 미국인 정이삭 감독의 작품으로 미국 영화에 해당하지만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냈다. 그 안에 담긴 대사들도 마치 K-무비의 힘을 보여주는 것 같아 곱씹게 된다.
영화 속 캐릭터 순자(윤여정 분)는 이렇게 말한다. “미나리는 어디에 있어도 알아서 잘 자라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누구나 건강하게 해줘.” K-무비가 걸어온 길은 분명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어떤 환경에서도 잘 자라났고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발전해 왔다. 그리고 이젠 그 범위를 넓혀 해외에서도 씩씩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앞으로도 K-무비는 글로벌 시장을 무대로 무한히 뻗어 나가며 쑥쑥 자라날 것 같다.
김희경 한국경제 문화부 기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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