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와 향상의 모호한 관계…이미 증강되고 있는 세속의 트랜스휴먼들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이란 생경한 단어 앞에 위축되지 마시길…. 그 단어를 세 토막으로 나눠 트랜스+휴먼+이즘으로 이해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다. 사람이란 뜻의 휴먼(human)과 이념이란 뜻의 이즘(ism)을 제하고 트랜스(trans) 부분만 잘 이해하면 될 터.교통을 뜻하는 트랜스-포테이션(trans-portation)과 더 선명하게는 트랜스-젠더(trans-gender)라는 용어에서 감지되는 이동·전환의 의미소를 떠올리자. 쉽게 말해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이란 생물학적 조건을 바꾸려는 일련의 움직임을 지칭한다. 누가, 왜, 어떻게, 무엇을 위해서, 그리고 그렇게 바뀐 인간의 실체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핵심은 ‘왜’인데 그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생물체로서의 인간 그 자체로는 부족하고 부실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트랜스휴머니즘 옹호자들은 질병과 노화, 장애와 고통, 유전적 한계와 인지적 제한 등 인간 신체가 지닌 본원적 취약성을 극복하자고 말한다.
그렇다면 트랜스휴머니즘 옹호자들은 다윈 같은 진화론자들일까. 예스 앤드 노(yes and no). 두 집단은 공히 인간의 신체 구조가 끊임없이 변해 왔고 따라서 인간이란 개념도 고정적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양자가 단호하게 결별하는 지점은 여기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생물학적 진화가 아닌 인위적 설계를 옹호한다. 어떻게? 현대 과학 기술과 테크놀로지와의 접목으로…. 즉, 트랜스휴머니즘은 자연 결정력에 따른 결과적 변화(즉 진화) 대신 인간 의지에 따른 인간 조건(human condition)의 기술적 재구성을 추구한다.
◇인간 의지에 의해 변한 인간들
그렇게 해서 바뀐 인간은 무엇이라고 칭할까. 혹자는 포스트휴먼(posthumans)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법적·기술적·문화적 제약을 고려해 필자는 ‘휴먼 플러스(human+)’가 더 적절한 용어라고 본다. 과거 생물학적 인간을 완전히 정리하고 새 출발하는 종(種)으로서의 포스트휴먼 보다는 이전 인간의 확장적 재구성으로서 휴먼플러스, 그래서 위키피디아에 게재된 심벌 ‘H+’가 매우 적절해 보인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슈퍼맨 혹은 슈퍼 휴먼으로 해석되는 위버멘시(Übermensch)라는 개념을 인류의 지향으로 밝힌 바 있다. 물론 신체적 요소보다 인지적 차원에 방점을 두기는 했지만 더 우월한 종(種)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트랜스휴머니즘 지향과 맞물려 있다.
카를 마르크스도 강력한 지원군이다. 그는 플라톤 계열의 이상주의 철학에 반해 인간의 본성(human nature)은 보편적이고 영구할 수 없으며 사회적 관계에 의해 변동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사회적 관계는 계급·노동·상품·자본·기계·기술 등을 포괄한다.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힘으로 인간 신체와 존재(human being)의 급진적 재구성을 꿈꾸는 트랜스휴머니즘에 적절한 연합 세력이 된다.
인간의 마음·정신과 관련해서도 트랜스휴머니즘의 원군이 많다. 타고난 원죄를 중심으로 본성 불변론을 주장하는 일부 기독교 철학 또는 본성이 악하거나(홉스·순자) 선하다고 설정한(루소·맹자) 소수 결정론적 주장에 비해 상대적 유연론과 ‘백지 원판(라틴어로 Tabula Rasa, 영어로 clean slate)론’을 고수하는 사상적 조류가 휠씬 강하기 때문이다.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까지, 근대 데카크트와 존 로크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이르기까지 트랜스휴머니즘의 마음·정신 중립론은 지지 기반이 넓다.
여기에서 타고난 생물학적 조건을 넘어 더 우수한 인간을 지향하는 운동으로서의 트랜스휴머니즘에 굳이 강력한 반대가 있을지 의문이 생길 법하다. 하지만 반발과 저항은 의외로 거칠다. 트랜스휴머니즘 저지 최전선에 선 두 대표 집단은 창조론을 옹호하는 범기독교 세력과 ‘생명 보수주의자들(bio-conservatives)’이다.
보수 성향의 기독교 창조론에 트랜스휴머니즘이란 사탄이 구상한 유토피아다. 인간 스스로가 자기 존재를 디자인하고 심지어 생명의 생성과 사멸까지 주관하겠다니 21세기의 바벨탑이 아닐 수 없다. 자연 진화를 주장한 다위니즘(Darwinism)보다 훨씬 더 도발적인 신성 모독이며 종말적 오만으로 여긴다.
보다 체계적인 저항은 생명 보수주의자들에게서 나온다. 사실 생명 보수주의자들의 정치적 스펙트럼은 상당히 넓어 보수 우파와 중도·진보 좌파를 모두 아우른다. ‘역사의 종언’으로 잘 알려진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2002년 저서 ‘우리의 포스트휴먼 미래(Our Posthuman Future)’에서 인간 향상(human enhancement)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인간에 대한 보편적 합의를 교란시킨다고 지적한다. 디스토피안적 상상력을 지닌 그는 생명공학이 ‘다른 종류의 인간’을 만드는 ‘존재론적 비약(ontological leap)’이라고 규정하며 그것이 인간 본연(human nature)과 연동된 존엄성·인격·인권·자유 등 근본 가치를 잠식한다고 맹공한다.
한편 공론장(public sphere)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위르겐 하버마스는 자유와 평등에 관한 정치 이슈로 논의의 축을 옮긴다. 트랜스휴머니즘이 리버럴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들 것이라고 경고한 그는 유전적 편집과 기획이 타자에 의한 생득권(birthright) 조작이자 위반이라고 주장한다. 신체와 주체적 삶에 대한 자기 결정권은 불가침 주권이고 이를 우생학적 기술(eugenics)로 조작하는 것은 사회적 평등을 유린한다고 경고한다. 사실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우생학의 상관관계를 떠올리면 하버마스의 우려를 간과할 수만은 없다.
‘정의란 무엇인가’ 그리고 ‘공정에 대한 착각’으로 잘 알려진 마이클 샌델도 생명 보수주의의 대표 주자로 꼽힌다. 2007년 저서 ‘완벽에 대한 반론’에서 생명공학의 조작적 능력과 그것의 사회적 결과 그 자체보다 완벽에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허영과 교만이 더 본질적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는 유전 공학적 신체 향상(body enhancement)은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 존재를 부정하고 무결점 조제물로 대체하려는 허영의 부산물이라고 꾸짖는다.
하지만 생명 보수주의 거인들의 거대 담론에는 틈새가 많다. 치료(therapy)와 향상(enhancement) 간의 모호한 경계가 대표적 사례다. 금세기 초 미국 대통령 직속 생명윤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리온 카스에 따르면 치료는 ‘정상’ 상태로의 복원(예를 들어 장기 교체·이식)을 뜻하는 반면 향상은 자연 신체에 인공 첨가(예를 들어 수명 연장)된 부당 이득(advantage)이라고 불렀다. 카스는 양자 식별의 불명확성을 인정하면서도 자연적 신체의 유전 기술적 향상은 ‘의심스러운 방향과 목표’를 향한다며 경계 수위를 높였다.
◇무엇이 원형이고 정상적 신체일까 하지만 모든 개인이 각기 다른 신체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고 그 신체는 끊임없이 변하는데 무엇이 ‘원형’이고 무엇이 ‘정상적 신체’인지 정의하기는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전 인류의 평균치를 내거나 다수성을 기준으로 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의 정상이 남의 비정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다원주의 사회의 기초 원리 아니던가.
원형 복원과 신체 향상을 대립시킨 것도 문제적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피부 개선 혹은 혈류 개선은 오직 원형 복원까지만 허용돼야 하는 것일까. 여드름 제거는 되지만 피부 체질 개선은 안 되고 모발 이식도 탈모 전 보유 수까지는 허용하되 더 풍성한 볼륨은 ‘부당 이득’에 해당하는지, 또 매일 아침 장 속에 투여하는 프로바이오틱스(유익균)는 향상일까, 복원일까. 설령 신체 향상이라고 해도 유전자 기법이 아니고 알약 투여라 무방한 것인지, 몇 계단 오를 때마다 수명 몇 초씩 늘어난다는 지하철역 스티커는 생명 연장 조장인지 단순 건강 캠페인인지…. 미국 대통령 직속 생명윤리위원회에 문의할 목록이 자꾸 길어진다.
이런 느슨한 틈새를 헤집고 ‘세속의 트랜스휴머니즘’은 진격한다. 임플란트, 인공 관절 수술, 스텐트 시술, 안내 렌즈(삽입 렌즈), 보톡스와 필러, 각종 실리콘 삽입 등으로 무장한 사이보그들이 우리 주변에 차고 넘친다.
세속의 트랜스휴머니즘은 포스트 휴먼 같은 거추장스러운 라벨에 무관심하다. 더 젊어지고 더 예뻐지고 더 건강해지겠다는 신성불가침의 행복추구권 앞에 초월적 담론, 윤리적 성찰 그리고 정치적 함의는 뒷전일 수밖에 없다. 세속 트랜스휴먼니즘의 진격은 바로 치료(therapy)와 향상(enhancement)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나온 증강(augmentation) 개념과 직결된다.
최정봉 전 NYU 영화이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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