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체가 디폴트 선언하자 금융시장 경색...강원도 “12월까지 전액 조기상환 하겠다"
레고랜드發 위기를 이해하는 4가지 궁금증
“지금은 아무것도 안 되는 상황이다. 사업성이나 우수한 입지도 다 의미가 없어졌다. 모든 자금 조달 창구가 유동성 확보 차원에서 돈을 회수하려고만 하고 있다”(B증권사 PF 관계자)
강원도가 사실상 레고랜드의 채무불이행을 선언한 이후 시장에 ‘돈줄’이 마르고 있다. 가뜩이나 투자 심리가 냉각되고 있는 와중에 강원도가 지급 보증한 레고랜드 채권이 부도 나면서 자금 경색이 심각해지고 있다.
시장에 불안이 확산되자 강원도는 “12월 15일까지 보증채무 2050억원 전액을 상환하겠다”고 계획을 번복했지만 시장에 번진 우려는 쉽게 잠재워지지 않았다.
정부도 ‘50조원+알파’ 규모의 유동성 지원책을 내놓았다. 회사채와 기업어음(CP) 등을 기관이나 투자자 대신 사들여 자금이 필요한 기업에 돈을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새로운 사업이나 부동산 개발 등을 진행해야 하는데 자금을 조달해 주는 창구가 모두 문을 걸어 잠그고 있어 정부가 대신 자금 수혈에 나선 것이다.
한국은행이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며 시장에 풀린 유동성을 거두고 있는 통화 정책 기조와는 상충하는 지원책이다. 기업들이 연쇄적으로 자금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 정부가 50조원에 달하는 긴급 처방을 내렸지만 한 번 흔들린 시장의 중심은 여전히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레고랜드는 어떻게 채권 시장을 흔들었을까. 레고랜드에 얽힌 몇 가지 궁금증을 정리했다. Q. 레고랜드와 채권이 무슨 상관인가요. 부동산을 개발하거나 특정 사업을 시작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이때 사업을 하는 주체가 기업이라면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유상 증자를 통해 주식을 발행한다. 둘째, 은행에서 돈을 빌린다(대출). 셋째, 직접 채권을 발행해 기관이나 투자자에게 돈을 빌린다.
채권은 돈을 빌려 쓸 때 발행해 주는 일종의 차용 증서다. 일정 기간 동안 빌려 쓰고 만기가 도래하면 원금과 함께 이자를 지급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레고랜드도 첫 삽을 뜨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레고랜드의 사업 주체는 강원도다. 강원도는 춘천시에 레고랜드 조성 사업을 위해 2012년 강원도중도개발공사(GJC)라는 부동산 개발·시행·분양 회사를 설립했다. GJC가 레고랜드 프로젝트의 개발 주체이고 강원도는 GJC의 지분 44%를 보유하고 있다. 레고랜드 운영사인 멀린엔터테인먼트그룹(멀린)과 증권사 등이 나머지 지분을 갖고 있다. GJC는 늘어난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해 특수목적법인(SPC)인 아이원제일차를 세운다. SPC는 레고랜드처럼 특정 사업이나 프로젝트를 위해 자금을 조달하거나 자산을 매각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우는 법인이다. GJC는 아이원제일차에 ‘돈을 갚을 의무(대출 채권)’를 담보로 2050억원을 빌렸고 아이원제일차는 이 대출 채권을 담보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을 발행해 다수의 증권사에서 자금을 조달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투자자들의 지적에 강원도가 ABCP에 지급 보증을 섰다. 만약 GJC가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하면 강원도가 대출 만기일에 대출금 상환에 필요한 지급금을 아이원제일차에 지급하겠다는 내용이다.
지난 9월 29일 이 대출 채권의 만기일이 도래했다. 아이원제일차가 상환해야 하는 돈은 2050억원이다.
하지만 강원도는 지급금을 내놓는 대신 법원에 GJC를 기업 회생 절차에 넣어 달라고 신청했다. 법정 관리 신청이다. 김진태 강원도지사는 “회생 절차를 신청한다고 했지 채무 불이행이라고 한 적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GJC가 채권자와 쓴 계약서에는 ‘기한 이익 상실 사유(EOD)’라고 해서 만기 연장이 안 되면 채무 불이행으로 본다는 내용이 적시돼 있다. Q. 강원도지사 한마디에 채권 시장이 출렁였다고? 채권 시장의 근간인 ‘신뢰’에 금이 갔다. 레고랜드의 사업 주체가 발행한 ABCP의 신용 등급은 ‘A1’이었다. 지급 의무를 부담하는 강원도가 국가에 준하는 지방 자치 단체인 만큼 강원도의 높은 신용도가 반영됐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시장은 ‘정부가 지급 보증한 채권이 부도났다’고 받아들였다.
지방 자치 단체가 보증을 서니 낮은 금리에 자금을 조달하게 해 줬는데 도지사가 바뀌면서 약속도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혔다.
김진태 지사는 강원도의 재정 부담을 원인으로 들었다. 레고랜드뿐만 아니라 미시령터널·알펜시아리조트 등 전임 도지사가 벌여 놓은 사업들이 너무 많다는 이유에서다. 전임 최문순 지사의 사업을 지우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강원도가 지급 보증을 이행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신용 평가사들은 일제히 레고랜드 대출 채권의 신용 등급을 낮췄다. ‘A1’이었던 ABCP의 신용 등급은 9월 말 ‘C’로, 10월 4일에는 채무 불이행을 의미하는 ‘D’로 강등됐다. 신용 등급은 채권의 핵심이다. 돈을 빌리고 갚겠다는 약속을 기반으로 이뤄지는 시장이기 때문이다. 신용 등급이 낮은 채권은 그만큼 위험이 크기 때문에 금리도 높다.
강원도의 약속을 믿고 투자한 채권자들뿐만 아니라 채권 시장 전체가 경악했다.
“지방 정부도 돈을 갚지 않겠다는데 시공사나 증권사는 어떻게 믿나.”
레고랜드에서 시작된 공포로 투자자들의 투자 심리는 더 강하게 얼어붙었다.
증권사 프로젝트 파이낸싱(PF) 관계자는 “결국 정부 보증도 정치적 논리 때문에 채무 불이행이 날 수 있겠구나라는 불안감을 시장에 심어 주면서 다른 채권까지 타격을 주는 도화선이 됐다”며 “이런 우려는 지자체 확약물뿐만 아니라 모든 부동산 사업 대출과 시공사 보증물, 증권사가 확약해 진행하는 채권까지 연쇄적으로 타격을 받게 됐다”고 말했다. Q. 실제 채권 시장이 받은 영향은. “레고랜드 사태는 채권 시장이 울고 싶을 때 뺨 때려준 역할을 했다.”
채권 시장은 레고랜드 사태가 터지기 전에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금리 인상의 여파로 시중에 유동성이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방 정부의 ABCP 부도는 채권 시장의 연쇄적인 자금 경색을 확대시켰다.
시장에서는 최상위 신용을 보장하는 ‘AAA’급 채권마저 유찰되는 사태가 반복되고 있다.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신용 등급이 ‘AAA’급인 한국전력공사는 2년 만기 채권 2000억원과 3년 만기 2000억원에 대한 입찰을 진행했지만 3년 만기 채권은 투자자를 찾지 못했다. 2년 만기 채권도 목표 물량을 채우지 못하고 800억원어치를 발행하는 데 그쳤다. 6%에 육박하는 고금리에 안정성까지 보장하는 데도 돈은 흘러가지 않았다.
신용 등급이 ‘AAA’급인 인천공항공사 역시 채권 만기 구조를 짧게 재편하면서 목표 물량을 겨우 채웠다. 전날 ‘AAA’급인 한국가스공사는 목표 물량을 전부 소화하지 못한 채 2년 만기가 유찰됐다.
신용 등급이 낮은 기업들은 자금 조달이 더 어렵다. 초우량 등급의 채권 금리가 높아진 상황에서 위험도가 더 높은 중간 등급 채권은 설 자리가 없다. KIS채권평가에 따르면 10월 14∼20일 신용 등급이 우량과 비우량 사이의 경계에 있는 ‘A’등급인 회사채의 유통 금액은 705억원으로 집계됐다.
한 달 전인 9월 16∼22일 유통된 3655억원에 비해 무려 80.7% 감소했다. ‘A’등급 회사채의 발행 감소에는 금리 인상과 경기 침체가 근본적 원인으로 작용했지만 최근 레고랜드 디폴트 사태에 따른 회사채 시장 경색도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다.
최근 채권 시장에서는 발행 금리가 급등하고 투자 수요가 위축되면서 신규 회사채를 발행해 만기 회사채를 갚는 ‘차환’ 발행도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올해 상반기 월별로 8조원 안팎이었던 회사채 발행액은 8~9월 5조3000억원 수준으로 줄더니 10월 들어 1조4000억원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Q. 건설사들은 왜 비상이죠? 레고랜드 프로젝트처럼 부동산을 개발할 때는 대규모로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 레고랜드처럼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 부동산 사업장은 프로젝트파이낸싱(PF)을 통해 돈을 빌린다. 이때 담보는 미래 수익성이다. 하지만 최근 부동산 시장은 가격 하락과 금리인상이 맞물린 동시에 물가 상승 영향으로 건설비까지 증가하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건설사들이 추가로 돈을 빌리기 어려워지거나, 갑자기 돈을 갚아야 할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대표적인 장면이 있다. 최근 단군 이후 최대 재건축 사업장이었던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 PF가 차환에 실패했다. 발행했던 채권의 원금을 상환하기 위해 채권을 새로 발행하려고 했는데 이를 사겠다는 투자자를 구하지 못한 것이다.
자금을 구하지 못하면서 보증을 선 시공사가 보증한 사업비 7000억원을 대신 갚기로 했다. 건설사별 보증액은 현대건설 1960억원, HDC현대산업개발 1750억원, 대우건설 1645억원, 롯데건설 1645억원이다.
건설업계에 따르면 롯데건설은 10월 18일 롯데케미칼·호텔롯데 등을 대상으로 2000억원의 주주 배정 유상 증자를 결정했다. 유상 증자로 자금을 조달한 데 이어 롯데케미칼에서 5000억원을 빌리기도 했다. 둔촌주공 상환에 필요한 자금 외에도 올해 안에 만기가 도래하는 PF ABCP가 3조1000억원에 달해 이에 대응하려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이 같은 사업장은 둔촌주공뿐만이 아니다. PF 대출 규모는 150조원에 달한다. 내년 상반기까지 만기가 도래하는 증권사나 건설사가 지급 보증한 PF 관련 ABCP의 만기 금액은 약 90조원에 달한다. 둔촌주공 사업장처럼 한 사업의 만기가 도래했는데 상환하지 못하면 지급 보증한 증권사나 건설사가 결국 빚을 대신 갚아 줘야 한다.
업계에서는 중소형 규모의 건설사나 증권사가 먼저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고 있다. 금리 인상의 여파로 인한 부동산 경기 침체와 자금 경색이 맞물려 부동산 PF가 금융 시장을 다시 한 번 뒤흔들 뇌관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정부가 지원하기로 한 사업은 기존에 이미 벌려져 있는 부동산 PF가 대상이기 때문에 지금 이후로 새 판을 벌리려는 부동산 PF에 대해서는 엄격한 기준이 적용돼 대출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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