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베이어 벨트 밖 생산 관리·포장 ‘간접 공정’ 노동자도 불법 파견으로 인정한 첫 사례

[법알못 판례 읽기]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의 승용차 생산라인 현장. 해당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으로 관련 없음.  사진=현대차 제공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의 승용차 생산라인 현장. 해당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으로 관련 없음. 사진=현대차 제공
현대차‧기아가 사내 하도급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현대차‧기아의 사내 협력 업체 소속 노동자 430명이 정규직 지위를 인정해 달라며 현대차‧기아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승소한 것이다.

이번 판결로 소송을 제기한 노동자들은 직접 고용됐을 때 받을 수 있었던 임금과 실제 지급 받은 임금과의 차액인 약 107억원을 지급 받게 됐다.

이 판결은 하도급 구조가 관행인 업계에 큰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추광호 경제본부장 명의의 성명을 내고 “이번 판결은 제조업에서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는 도급 계약을 무력화하는 것으로 산업 현장의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한국지엠·현대제철 등 유사한 사건에서 대법원 판결을 앞둔 기업도 상당수다.

사내 하도급 노동자, 도장‧생산 관리 등 업무

대법원 1부(주심 박정화 대법관)와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10월 27일 현대차‧기아 공장에서 도장·생산 관리 등 업무를 한 사내 하도급 노동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낸 노동자 지위 확인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기아 사내 협력 업체 소속 노동자들은 화성공장 등에서 도장·의장·생산 관리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업무 수행이 기아를 사용 사업주로 하는 노동자 파견 관계에 해당하므로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볍)’에 따라 기아에 직접 고용 의무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노동자 지위 확인 및 임금 차액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현대차 사내 협력 업체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울산공장 등에서 차체·도장·의장·생산 관리 등을 맡았다. 이들 역시 파견법에 따라 현대차의 노동자로 직접 고용으로 간주됐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현대차‧기아 사건을 맡은 각각의 1‧2심 재판부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사내 협력 업체 소속 노동자들과 현대차‧기아의 노동자 파견 관계 성립을 인정한 것이다. 다만 기아 사건을 맡은 재판부는 기아에서의 정년 도래 이후 계속 근로한 일부 원고들에 대해 노동자 지위 확인 청구를 각하했고 정년 이후의 임금 또는 손해 배상 청구를 기각했다.

현대차 사내 협력 업체 소속 노동자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재판부는 기존 사내 협력 업체가 폐업한 후 업무 승계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사내 협력 업체와의 근로 관계가 종료돼 근로를 제공하지 않은 일부 노동자들에 대해 그 부분 임금 청구를 기각했다.
경기 광명시 기아 소하리공장 전경. 사진=한국경제신문
경기 광명시 기아 소하리공장 전경. 사진=한국경제신문
대법 “간접 생산 공정도 불법 파견”

대법원에서도 사내 협력 업체 노동자들과 현대차‧기아 사이에 노동자 파견 관계가 성립하는지 여부가 두 사건의 공통 쟁점이 됐다. 대법원은 현대차‧기아가 사내 협력 업체에 실질적인 감독과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고 노동자 파견 관계가 성립한다고 판단했다.

이번 소송에서 대법원은 차체·도장과 같은 직접 생산 공정뿐만 아니라 생산 관리·출고·포장 등 컨베이어 벨트를 사용하지 않는 간접 공정도 불법 파견에 해당한다고 봤다.

대법원은 “간접 생산 공정은 작업 소요 시간에 따른 시간당 생산 대수, 세부 업무별 투입 인원 등을 전부 피고가 결정했다”며 “간접 생산 공정을 담당한 사내 협력 업체들도 피고가 정한 표준 정원에서 정해진 인원을 해당 작업에 투입해야 했다”고 했다.

대법원은 “(간접 생산 공정에서) 사내 협력 업체가 스스로 독자적인 지휘‧명령을 행사했다는 정황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했다. 대법원이 완성차 불법 파견 소송에서 간접 공정까지 불법 파견으로 규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법원은 현대차·기아가 원고들이 직고용됐을 때 받을 수 있는 임금과 실제 받은 임금의 차액을 지급하도록 했다. 현대차는 노동자들에게 57억원, 기아는 50억원을 임금 차액과 손해 배상금으로 지급하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대법원은 일부 노동자에 대해 “파견 노동자의 근로 제공 중단이 사용 사업주의 책임 있는 사정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경우 파견 노동자는 근로 제공 중단 기간 동안 근로 제공을 계속했더라면 받을 수 있었던 임금 상당액을 청구할 수 있다”고 했다.

대법원은 원고로 참여한 노동자 가운데 2차 협력 업체 소속으로 생산 관리 업무를 담당한 3명에 대해선 구체적인 심리가 필요하다며 파기 환송했다. 대법원은 정년이 지난 일부 원고의 청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법원 관계자는 “현대차·기아 생산 공장에서 사내 협력 업체 소속으로 일한 노동자에게 파견 관계가 성립하는지를 놓고 공정 전반의 성격을 광범위하게 판단한 최초의 대법원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파견법상 직접 고용 간주 효과 발생 후 파견 사업주인 협력 업체와 사이의 근로 관계 중단 또는 종료로 근로 제공을 계속하지 못한 경우 근로 제공 중단 기간에 대한 임금 청구 가부의 판단 기준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최초의 판결”이라고 말했다.


[돋보기]
포스코 기술자가 고로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포스코 제공
포스코 기술자가 고로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포스코 제공
포스코, 하청 직원의 노동자 지위 확인 소송 ‘패소’

이번 판결에 앞서 대법원은 지난 7월 포스코 사내 하도급 노동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낸 불법 파견 소송에서 포스코가 협력 업체 노동자 59명을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놓은 바 있다. 이 하도급 업체 노동자들이 도급 계약에서 허용하지 않는 원청(포스코)의 지휘·명령 등을 직접 받았다는 점이 인정된다고 본 것이다.

대법원은 원고들이 포스코 작업 표준서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고 제품 생산·조업 체계가 전산 관리 시스템(MES)으로 관리되는 점에 비춰볼 때 원고와 피고 간 노동자 파견 관계가 성립한다고 봤다. 대법원은 특히 MES에 주목해 “MES를 통한 작업 상황 및 정보 전달은 구속력 있는 업무상 지시”라고 판단했다.

MES는 공정 계획이나 작업 유형별 업무 순서 등을 원청이 하청 업체에 공유하는 프로그램이다. 포스코‧현대제철 등 주요 철강 기업에서 도입됐고 현대차·현대위아 등 제조업에서도 사용이 확산되고 있다.

그동안 하급심에서는 MES를 불법 파견 근거로 볼 수 없다는 판단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대법원이 MES를 활용한 전달이 원청의 직접적인 업무 지시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판결로 법원의 방침이 명확해진 것이다.

현대차‧기아 및 포스코 관련 판결에서 볼 수 있듯이 원청이 파견 노동자를 지휘‧감독했는지와 관련해 폭넓게 해석하는 대법원 판례가 잇따르고 있다. 관련 소송이 진행 중인 기업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황이다.

현대제철 순천공장 사내 하도급 노동자들이 제기한 소송은 대법원 판단을 앞두고 있다. 한국지엠의 노동자 57명이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불법 파견 소송에서의 대법원 판단도 남아 있다.


최한종 한국경제 기자 onebe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