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브리핑- 소비자 권리와 자원 순환 관점에서 주목

[ESG 리뷰]
아이폰14 기기를 열어 보이고 있다. 사진=아이픽스잇 제공
아이폰14 기기를 열어 보이고 있다. 사진=아이픽스잇 제공
정품 전자 기기 부품을 골라 소비자가 마음대로 갈아 끼울 수 있다면? 최근 전자 기기를 ‘수리할 권리(right to repair)’가 세계적 이슈로 떠올랐다. 전자 기기 제조사의 수리 독점권에 문제를 제기하고 소비자가 직접 전자 기기 부품을 구매해 수리할 수 있도록 하자는 움직임이다. 특히 가격이 비싸고 교체 주기가 빠른 스마트폰의 수리할 권리가 주목받고 있다.

그간 전자 제품의 수리는 제조사가 제공하는 부품의 품질 보증 여부를 고려하는 데 치중해 있었다. 최근 수리할 권리는 자원 순환(recycling) 관점에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수리하면 더 오래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리를 통한 전자 기기의 수명 연장으로, 제품을 더 오래 쓰고 전자 폐기물을 줄일 수 있다. 폐기물 감축과 환경 오염, 자원 낭비를 방지하기 위해 ‘수리할 권리’가 떠오르고 있다.

유럽, 수리할 권리 보장법 제정…미국도 행정명령

유엔이 발간한 2020년 세계 전자 폐기물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기준 5260만 톤에 달하는 전자 폐기물이 발생했다. 또 전 세계적으로 전자 폐기물의 재활용 비율은 22%에 불과한 실정이다. 전자 폐기물을 줄이려면 상품을 오래 쓰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에서는 2003년 소비자가 스스로 전자 기기를 고치는 것을 권장하는 아이픽스잇(iFixit)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아이픽스잇 홈페이지에서 직접 수리할 수 있는 제품 카테고리와 제품명, 갈아 끼울 부품, 필요한 공구를 소개하고 제품 해부도를 제공한다. 모두 기기를 수리한 사람의 참여를 통해서다. 또 수리한 이들이 소요 시간과 수리 단계를 고려해 10점 만점으로 ‘수리 용이성 점수’를 직접 매긴다.

아이픽스잇은 제조사의 수리 독점권에 의문을 제기했다. 소비자 측면과 환경적 측면 등 크게 2가지 부분에서다. 아이픽스잇은 “제조 업체가 수리를 독점하면 수리 가격이 올라가고 수리 질은 떨어진다”며 “소비자가 갖게 되는 소유권은 열기·뜯기·수리·개선을 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환경적 측면에서도 “전자 폐기물 양이 점점 늘고 있고 폐기물을 줄이도록 물건을 고쳐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유럽과 미국은 이 같은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전자 기기의 수리할 권리를 보장하는 법을 만들었다. 2020년 3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수리할 권리’ 보장법을 통과시켰다. 유럽은 ‘소비자의 역할 강화’ 부문에서 소비자의 수리할 권리를 보장했다. 수리할 권리 관련 내용으로 △EU 관련 규정 개정을 통한 수리 정보 제공 강화 △예비 부품 제공 △부품 배송에 관한 의무 등을 담고 있다. 이 법은 2021년부터 유럽에서 판매되는 스마트폰 등 전자 기기 부품을 사설 업체에서 수리할 수 있도록 강제했다. 이에 따라 사설 업체도 제조사의 정품 부품을 공급받으면서 제품을 수리할 수 있게 됐다.

미국에선 소송에 따라 수리할 권리가 점차 확대됐다. 2021년 11월 매사추세츠 주에서 자동차에 대한 수리를 독점하는 자동차 회사에 대항하는 ‘자동차 소유자 수리 권리법’에서부터 소비자 권리 운동이 시작된 이후 애플의 배터리 교체 할인 프로그램 종료에 따른 소비자 소송을 계기로 전자 제품에 대한 수리로 확장됐다. 2018년 10월 미국 정부는 ‘원래 상태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사용되는 경우 육상 차량, 스마트폰, 가전제품 등에서 사용하는 저작권 보호 면제를 승인했다. 2021년 7월에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전자 기기 제조사의 수리권 제한 관행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호주에서도 2021년 6월 수리할 권리에 대한 생산성위원회 초안 보고서를 발표하고 의견을 수렴 중이다. 특히 제품 내구 연한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고 제품 제조 업체가 지정하는 수리 업체나 부품을 사용하지 않아도 소비자의 수리권이 보장된다는 제조 업체의 보증 문구를 넣도록 했다. 제품 내구성이나 제품 수리 가능성에 대한 소비자 정보 제공을 위한 라벨링 체계도 개발 중이다.

애플과 삼성 잰걸음…후속 조치 나오나

애플은 2021년 11월 아이폰 12·13 모델과 맥북의 정품 부품을 판매하고 수리 도구 매뉴얼과 키트를 제공하는 ‘셀프 서비스 수리(self service repair)’ 프로그램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미국을 시작으로 점차 대상 국가를 늘려 나갈 계획이다. 구글도 지난 6월부터 아이픽스잇과 손잡고 자사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정품 부품을 판매한다. 삼성전자는 8월부터 미국에서 갤럭시 S20·21과 갤럭시탭 7+ 모델에 직접 제품을 수리할 수 있도록 정품 부품과 수리 키트를 제공하는 자가 수리(self-repair)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갤럭시 S21 기준 액정과 배터리 교체는 약 22만원, 배터리 단일 교체는 약 9만원 수준이다.

하지만 자가 수리 방침은 애플·구글·삼성 모두 한국에서는 적용되지 않고 있다. 올해 국정 감사에서 노태문 삼성전자 MX사업부장(사장)은 “왜 미국처럼 삼성 스마트폰의 자가 수리를 할 수 없느냐”는 질문에 한국과 달리 미국은 대면 수리가 어려운 환경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다만 “자가 수리에 대한 요구가 계속되고 있어 면밀히 검토한 후 추진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일부 환경 단체 위주로 수리할 권리가 논의되고 있다. 최근 서울환경연합은 수리권 보장 법률 제정과 수리 접근성 강화 등을 골자로 한 서명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강은미 정의당 의원 등은 지난해 11월 ‘수리할 권리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지만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

물론 생각해 볼 부분도 있다. 자가 수리는 저작권 보호 문제나 보증 유효화 문제, 자가 수리 시 발생할 수 있는 상해 위험성 등이 불거질 수 있다. 또 한국 시장은 제조사가 제공하는 서비스센터가 활성화돼 있어 다른 나라와 다른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리할 권리의 의의를 따져보고 한국 상황에 맞게 고려할 필요는 있다. 김재영 한국소비자원 연구위원은 “수리할 권리는 소비자 권익 증진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점점 중요시되는 환경과 자원 순환 이슈로서 앞으로도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정책을 마련하기 위한 수요 조사와 근거를 마련해 미래 소비 환경에 기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1407호와 국내 유일 ESG 전문 매거진 ‘한경ESG’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더 많은 ESG 정보는 ‘한경ESG’를 참고하세요.)

구현화 기자 ku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