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에서 대기업 중심으로 이동
현대차·SK·LG·롯데·한화·GS 등 450조원 시장에서 각축

[비즈니스 포커스]
서울 강남구 한 빌딩 주차장의 전기차 충전소. 사진=연합뉴스
서울 강남구 한 빌딩 주차장의 전기차 충전소. 사진=연합뉴스
450조원대 전기 자동차 충전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한국 굴지의 대기업들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그동안 중소기업 위주였던 충전 시장에 현대자동차는 물론 SK·LG·롯데·한화·GS 등 한국 10대 기업들이 본격 진출하고 있다. 전기차가 35만 대 가까이 보급됐지만 한국의 충전 인프라는 아직 충분하지 않은 상태다. 특정 업체가 주도하는 형국이 아니어서 시장 진입 장벽도 낮다.
◆전국 곳곳 급속 충전소 만드는 현대차
독일 컨설팅 회사 롤랜드버거에 따르면 글로벌 전기차 충전 인프라 시장 규모는 2023년 550억 달러(약 76조원)에서 2030년 3250억 달러(450조원)로 성장할 것으로 추정된다.

운전자들은 ‘충전 인프라 확충’을 전기차 대중화의 핵심 열쇠로 꼽는다. 이동하려는 경로에 충전소가 충분하지 않으면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현대차그룹은 전국 곳곳에 급속 충전소를 설치했다. 지난해 4월 문을 연 전기차 초고속 충전 서비스 브랜드 이피트(E-pit)다. 도심지 9곳과 고속도로 휴게소 12곳에 충전기 총 120기를 구축했다. 전기차 아이오닉5 기준으로 18분 내 80% 충전된다. 15분 충전 시 약 301km 주행이 가능하다. 보통 급속 충전기 이용 시 평균 40분 정도 걸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전 시간을 절반 정도 단축한 셈이다.

올해 더 잰걸음이다. 지난 4월 전기차 충전 서비스 플랫폼 ‘E-CSP’를 출시하며 B2B 시장을 겨냥했다. E-CSP는 전기차 충전소를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돕는 관제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이 적용된 충전소에서는 회원 가입이나 차량 등록 절차가 간소화된다. 현대차그룹은 E-CSP를 활용하면 기존 충전 사업자들이 서비스 개발, 운영 부담 등을 줄일 수 있다고 전했다. 신규 사업자에게는 충전 시장 진입이 한층 쉬워질 것으로도 기대했다.

지난 5월에는 구독형 전기차 충전 요금제 럭키패스 H를 선보였다. 럭키패스 H는 가입한 고객이 매달 일정 비용을 내면 약정한 충전량 한도 내에서 충전 요금을 할인받을 수 있는 상품이다.

현대차의 고급차 브랜드 제네시스는 럭셔리형 충전소를 표방한다. 지난 2월 전기차 전용 충전소를 개소하고 발레 파킹, 라운지 제공 등 운전자의 피로를 덜 수 있는 부가 서비스를 내세운다. 또 무선 충전 서비스 시범 사업을 운영 중이다.
◆중소기업 인수하고 계열사 인프라 통해 확장도
자금력을 가진 대기업들은 중소기업을 인수하거나 계열사 인프라를 통한 확장을 꾀하고 있다.

가장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곳은 SK그룹이다. SK그룹은 지난해 4월 2930억원(지분 55.5%)을 들여 전기차 충전 장비 업체 시그넷이브이를 사들였고 SK시그넷으로 사명을 바꿨다. SK E&S는 올해 3월 미국에서 충전기 4600기를 설치·운영하는 에버차지를 인수해 해외 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LG그룹과 GS그룹도 속도를 내고 있다. LG전자는 GS에너지와 손잡고 올해 6월 애플망고를 공동 인수했다. LG전자가 지분 60%, GS에너지와 GS네오텍이 각각 34%, 6%를 취득했다. 애플망고는 완속 충전기와 급속 충전기까지 전기차 충전 원천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업체다.

이번 인수로 LG전자의 전기차 관련 사업 포트폴리오가 강화됐다. 전장사업본부의 인포테인먼트와 ZKW의 램프, LG마그나 이파워트레인의 전기차 파워트레인 등 기존 전장 분야에 전기차 충전 솔루션까지 더해진 셈이다.

또 LG전자는 2020년 말 GS칼텍스와 손잡고 전기차 충전소 통합 관리 솔루션 시범 서비스를 공급하기도 했다. 앞서 GS그룹은 2019년부터 전기차 충전 사업에 진출했다. 전국 주유소(GS칼텍스)와 LPG충전소에 전기차 충전기를 설치·운영하는 식이다.

LS그룹은 올해 4월 가스 충전소(E1)를 거점으로 전기차 충전기 사업을 시작했다. LS와 E1이 각각 50 대 50으로 출연해 LS 이링크(E-Link)를 설립했다. LS 이링크를 중심으로 그룹 내 전기차 충전 분야 사업 역량을 모아 시너지를 낼 구상이다. 태양광 사업을 하는 한화솔루션의 큐셀부문(한화큐셀)도 올해 5월 ‘한화모티브’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충전 사업 진출을 선언했다.

유통 기업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롯데그룹은 전기차 등 미래 모빌리티를 미래 핵심 사업으로 점찍고 투자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해 10월 롯데그룹의 정보기술(IT) 계열사인 롯데정보통신은 690억원(지분 71.14%)을 들여 중앙제어를 인수했다. 중앙제어는 2011년 한국에서 처음 전기차 충전 인프라 사업을 시작했다. 지난해부터 현대차와 차세대 초고속 충전 플랫폼에 대한 공동 연구·개발(R&D)을 진행 중이다. 올해는 이피트 충전소의 운영 전환, 유지·보수 사업자로 합류했다.

또 롯데그룹은 현대차그룹·KB자산운용 등과 제휴해 초고속 충전 인프라를 고객사에 임대하는 사업 모델을 개발하는 중이다. 우선 접근성과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특수목적법인(SPC)을 설립하고 2025년까지 전국 주요 도심에 초고속 충전기 5000기를 설치할 예정이다. 롯데그룹의 백화점·마트·호텔 등 주요 유통 시설과 현대차그룹의 영업점·서비스센터 등 주요 사업장을 전기차 초고속 충전기 설치 부지로 활용할 계획이다.

신세계그룹의 IT 서비스 계열사 신세계아이앤씨도 지난해 10월 한국의 주차장 인프라와 운영 전문성을 확보하고 올해 2월 전기차 충전 통신 규약을 획득했다. 4월엔 SK시그넷과 손잡았다. SK시그넷이 신세계아이앤씨가 운영하는 전기차 충전소에 충전기를 공급하는 식이다.
그래픽=박명규 기자
그래픽=박명규 기자
◆높아지는 관심 속 과제는
해외에서도 초고속 충전 인프라 구축에 분주한 모습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하 국제에너지기구(IEA)가 발간한 ‘2022 글로벌 전기차 전망·충전 인프라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전기차 충전기 180만 기 중 50만 기가 지난해 설치됐다.

일찍이 완성차 업체를 중심으로 인프라 구축에 나선 미국·유럽 등은 전기차보다 충전기가 더 많다. 한국자동차연구원에 따르면 영국에서는 전기차 1대당 3기의 충전기가 보급됐다. 미국과 일본은 각각 전기차 1대당 1.8기와 1.5기의 충전기가 설치됐다.

반면 한국 전기차 충전 인프라 구축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전기차 충전기는 지난해 말 기준 전국에 10만6701기로 집계됐다. 같은 기간 전기차 등록 대수가 23만1443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전기차 2대당 1기 정도밖에 안 되는 셈이다.

또 공용 충전기는 급속·완속을 합쳐 총 3만5379기에 불과하다. 70%는 개인·아파트용 충전기인 셈인데 주민 소유 차량이 아니면 사실상 충전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 정부는 2025년까지 전국 주유소와 고속도로 휴게소 등에 급속 충전소를 1만2000기 이상 설치하고 완속 충전기는 도보 5분 거리 생활권 중심으로 50만 기 이상 구축할 계획이다.

이호근 대덕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주택가 주변에 완속 충전기를 늘려야 전기차 보급이 활성화될 수 있다고 조언한다. 그는 “급속 충전기 구축도 중요하지만 여행객들이 20~40분 충전 계획을 세우기는 쉽지 않다. 충전 패턴을 분석해 봐도 집 근처에서 야간에 충전하는 비율이 높다”며 “충전이 끝나도 계속 주차하는 등 얌체족에 대한 불만으로 아파트 충전기 이용이 제한되고 있다. 충전 후에도 차를 빼지 않으면 10분당 3000원씩 과도하게 주차 요금을 부과해야 한다. 이를 충전기에서 회수할 수 있도록 만들어 이용률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또 대기업 위주로 시장이 재편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자본력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대기업이 일부 지분을 사고 초기 충전 시스템을 만든 중소기업이 자금을 확보하는 구조는 윈-윈하는 관계”라고 말했다. 다만 “중소기업의 보호도 필요하다”며 “기술 기반의 대출이나 사업 확장을 위한 자금 지원을 정부 차원에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