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센 후폭풍에 결정 번복했지만 ‘신뢰’ 깨져…금융 당국 뒷북 수습, 모기업의 무책임 등에 비판 쏟아져
[비즈니스 포커스] 김진태 강원도지사에 이어 흥국생명이 또 사고를 쳤다. 그 여파로 채권 시장이 크게 흔들렸다. 흥국생명이 5억 달러 규모의 외화 신종자본증권을 11월 9일 전액 조기 상환했지만 신뢰는 추락했다. 지난 11월 1일 조기 상환권(콜옵션) 미행사를 발표한 직후 한국 채권 시장의 혼란이 커지자 부랴부랴 불을 끈 것이다.하지만 흥국생명의 방침 번복에도 불구하고 금융 시장의 불안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있다. 레고랜드 사태에 이어 이번 흥국생명 논란까지 더해지며 후폭풍이 거세다. 신뢰를 바탕으로 움직이는 채권 시장에서 이미 깨져 버린 신뢰를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다. 네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번 흥국생명 사태의 전말을 짚어봤다.
키워드 1. ’무늬만 자본’ 신종자본증권…디폴트도 아닌데 시장 휘청인 이유
흥국생명은 11월 1일 싱가포르거래소를 통해 5억 달러어치의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미행사를 공시했다. 이번에 논란이 된 ‘신종자본증권’은 발행 만기가 30년으로 2047년 11월 9일이 최종 만기다. 하지만 발행사의 결정에 따라 만기를 연장하는 것이 가능하다. 부채지만 사실상 상환 기간이 없는 영구채다. 이와 같은 특성에 따라 신종자본증권은 국제회계기준(IFRS)상 ‘자본’으로 인정받는다. 대기업들이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할 때 부채 비율을 낮추면서 자본 확충을 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한 ‘자금 조달’ 수단이다.
하지만 ‘30년 만기’인 신종자본증권에도 조건이 붙는다. 채권의 성격을 지닌 만큼 일반적으로 5년에 한 번씩 투자자들에게 조기 상환을 약속하는 것이다. ‘콜옵션’이다. 그리고 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는 투자자들에게 더 높은 금리를 줄 것을 또 약속한다. ‘스텝업(step up)’ 조항이다. 실제 해당 신종자본증권의 금리는 2017년 발행 당시인 연 4.475%에서 스텝업 적용 시 연 6.7%까지 오를 것으로 예상됐다.
엄밀히 말해 ‘콜옵션’은 기업 측이 채권을 살 수 있는 ‘권리’다. 자금이 없어 빚을 갚지 못하는 디폴트(채무 불이행)와는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국생명의 이번 결정이 이 정도로 금융 시장의 불안을 자극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채권 시장은 신뢰를 바탕으로 움직인다.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한 기업이 5년에 한 번씩 조기 상환하겠다는 약속은 투자자 신뢰와 직결되는 문제다.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은 것은 법적으로 문제되지 않고 신용도에도 변화가 없지만 시장 내에 재정 건전성과 상환 능력이 악화됐다는 시그널로 비쳐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한 한국 기업 가운데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은 기업은 2009년 우리은행의 ‘콜옵션 미이행’ 발표 이후 13년 동안 한 차례도 없었다. 우리은행 또한 2009년 당시 시장의 불안함이 크게 증폭되며 부랴부랴 이를 철회한 바 있다.
시장에서 관행인 콜옵션 행사(채무 상환)를 하지 않은 것이 신뢰의 상실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인 셈이다.
키워드 2. 오락가락 금융 당국…‘뒷북 수습’이 사태 키웠다?
흥국생명은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미행사가 시장에 어떤 파장을 미칠지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두 달여 전인 지난 9월 신종자본증권 상환을 위해 자금 조달을 시도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3억 달러 규모의 신종자본증권 발행을 추진하고 연내 1000억원 이상의 후순위채 발행을 통해 금액을 충당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최근 지속되는 금리 인상 우려에 이미 채권 시장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흥국생명은 싱가포르 등을 찾아 차환 발행을 위한 투자자 모집에 나섰지만 10%대 금리 제안에도 투자자를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장의 ‘돈맥경화’로 인해 자본 확충에 실패한 흥국생명의 고민은 깊어졌다. 차환 발행 없이 콜옵션을 행사하면 재무 건전성 지표인 지급 여력(RBC) 비율이 하락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RBC 비율은 보험 계약자가 일시에 보험금을 요청했을 때 보험사가 보험금을 제때 지급할 수 있는 능력을 수치화한 것이다. 현재 금융 당국은 한국 보험사들의 RBC 비율을 150% 이상 유지할 것을 권하고 있다. 지난 2분기 기준 흥국생명의 RBC 비율은 157.9%다. 더욱이 최근 시중 금리가 급등하며 보유 채권 가격이 하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흥국생명이 조기 상환을 실행하면 RBC 비율 150% 유지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흥국생명은 10월 28일 금융감독원을 찾아 이번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미이행과 관련해 당국의 승인을 요청했다.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기획재정부는 협의를 거쳐 흥국생명 측의 의사를 존중하기로 결정했다. 실제 금융위원회는 11월 2일 보도 자료를 통해 “흥국생명의 수익성 등 경영 실적은 양호하며 계약자에 대한 보험금 지급 등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흥국생명의 채권 발행 당시 당사자 간 약정대로 조건을 협의 조정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흥국생명의 신종자본증권 가격은 무려 30% 급락했다. 동양생명·우리은행·신한금융지주 등 다른 은행과 보험사들이 발행한 외화 표시 채권(KP물)의 가격까지 떨어지며 불똥이 옮겨 갔다. 해외 시장에서 한국물 채권에 대한 투심이 빠르게 악화되며 위기감이 고조됐다.
당황한 금융 당국은 11월 3일 각 보험사 재무 담당자를 불러모아 대책을 논의했다. 사태가 일파만파 커지고 흥국생명은 ‘콜옵션 미행사’를 발표한 지 1주일이 채 안 된 11월 9일 신종자본증권을 정상적으로 상환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11월 9일 기자 간담회를 통해 “흥국생명의 콜옵션 미행사 공시 이후 시장 안정을 위해 흥국생명이 큰 문제가 없다는 보도 자료를 냈던 것”이라며 “하지만 그것만으로 불안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흥국생명과 얘기해 해외 투자자들의 기대에 맞춰 콜옵션을 행사하는 쪽으로 신속하게 대응했다”고 설명했다.
금융 당국의 ‘뒷북 수습’에 비판은 점점 거세지고 있다. 특히 보험사의 RBC 관련 규제 문제와 관련해 ‘금융 당국 책임론’이 제기되고 있다. 흥국생명이 이번 ‘콜옵션 미행사’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RBC 비율은 사실상 새 국제회계기준(IFRS17)이 도입되는 내년부터 큰 의미가 없어진다. 다시 말해 흥국생명 콜옵션 행사에 걸림돌이 된 RBC 비율은 두 달 되면 사라지는 규제다. 금융 당국과 충분한 사전 협의를 거쳐 해결 가능한 부분이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금융 당국이 단순히 RBC 비율을 근거로 흥국생명의 콜옵션 미행사를 묵인했다면 이는 명백히 잘못된 판단이라는 지적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번 사태와 관련해 오락가락하는 금융 당국의 방침 또한 도마 위에 올랐다. 실제 이번 흥국생명의 콜옵션 미행사 결정에 ‘합리적인 선택이었다’는 금융 당국의 방침은 국내외 금융 시장 관계자들을 갸웃하게 했다. 다음 날인 11월 3일 세계 3대 신용 평가사인 스탠더드앤푸어스(S&P)는 “흥국생명의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미행사로 한국 보험사들의 자금 조달 여건이 악화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대책을 세워야 하는 금융 당국이 이번 사태가 미칠 파장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태를 키웠다는 비판이다.
키워드 3. 태광그룹 뒤늦게 나섰지만…‘믿음’이 문제
흥국생명의 이번 콜옵션 행사를 위한 자금 마련 방안은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종자본증권 5억 달러(발행 당시 약 5571억원) 가운데 4000억원을 환매조건부채권(RP)을 발행해 충당할 계획이다. 4대 시중은행이 RP를 매입하되 수수료를 조금 높게 계산하는 방식을 논의 중이다. 나머지 1000억원은 보험사들의 대출로 조달한다.
이번 자금 마련 방안에는 모기업인 태광그룹의 자구책 마련도 포함돼 있다. 흥국생명은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이 지분 56.3%를 보유한 최대 주주다. 흥국생명 측은 “현재 흥국생명의 수익성 및 자금 유동성, 재무 건전성 등은 양호한 상황”이라며 “향후 추가적인 자본 확충을 통해 자본 안전성을 더욱 강화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해결하는 데 정작 모기업인 태광그룹의 무책임한 태도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실제 보험업계와 증권가에서는 흥국생명의 모회사인 태광그룹이 ‘바이백(buy-back)’을 시행해 시장 안정화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바이백은 채권 발행자가 시장에서 해당 발행 채권을 사들여 만기 전에 미리 돈을 지급하는 것을 의미한다. 태광그룹이 콜옵션 예정일인 11월 9일 이전에 자사의 자금을 활용해 해당 채권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글로벌 투자자들의 한국 채권에 대한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태광그룹이 직접 해결에 나서는 대신 금융 당국은 물론 동종 업계의 경쟁사라고 할 수 있는 보험사와 은행까지 모두 흥국생명의 ‘급한 불’ 끄기에 동원됐다. 태광그룹의 뒤늦은 자구책 마련 약속에도 시장의 반응이 냉담한 이유다.
더 큰 문제는 이미 무너져 버린 신뢰를 회복하는 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데 있다. 레고랜드 사태 등으로 한국의 채권 시장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진 상황에서 이번 흥국생명의 콜옵션 미행사 결정은 그 여파가 클 수밖에 없었다. 금융 투자업계에 따르면 내년 만기가 돌아오는 한국 기업들의 외화 채권 규모가 약 250억 달러(약 35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된다.
김준수 키움증권 연구원은 “이번 사태는 단지 한 기업을 넘어 글로벌 시장 내에서 한국계 외화채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려 한국 기업 전반의 외화 자금 조달에 어려움이 커질 수 있다”며 “흥국생명의 콜옵션 행사가 추가적인 경색을 막을 수는 있어도 단기간에 투자 심리를 회복심켜 시장을 안정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키워드4. 심화되는 ‘돈맥경화’…해결사역 떠맡은 대형 증권사들
흥국생명은 지난 9월 조기 상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400억원 규모의 후순위채 발행에 나섰지만 수요 예측에서 기관 참여자가 한 곳도 없었다. 최근 금리 변동성이 커진 상황에서 보험업계의 자본성 증권 물량 공급이 늘어나며 중소형사인 흥국생명에 대한 메리트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분석된다. 미매각된 물량은 총액 인수 계약에 따라 주간사 회사인 메리츠증권이 400억원 전량을 떠안아야 했다.
강원도 레고랜드 채무 불이행(디폴트) 사태와 함께 이번 흥국 생명 사태는 한국 증권사들에도 상당한 여파가 미치고 있다. 특히 강원도 레고랜드 사태는 그동안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을 확대해 온 중소형 증권사들의 자금난이 심화되는 상황이다.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에 금융 감독 당국은 대형 증권사를 중심으로 중소형 증권사의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을 사들이는 ‘채권 시장 자구 안정 펀드’ 조성을 제안하고 나섰다. 금융투자협회는 11월 8일 9개 대형 증권사를 중심으로 제2 채안펀드 설립을 위한 SPC 설립 방안을 확정했다. 채권안정펀드는 은행채·회사채·카드채 등을 인수해 채권 시장의 실질금리를 끌어내리는 역할을 하게 되는 펀드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11월 1일 금융지주 회장과의 간담회 직후 “증권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며 “정부에 다 해결하라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 이후 대형 증권사들은 속전속결로 SPC 출자를 결정했다. 한마디로 사고는 정부·강원도(레고랜드)·흥국생명이 치고 일부 책임은 대형 증권사들이 지라는 얘기다. 물론 금융 시장이 크게 흔들리면 대형 증권사도 어려움에 처한다. 자발적으로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 채안펀드는 정부의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대형 증권사가 참여한 것이라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앞서 정부는 10월 23일 비상 거시 경제 금융 회의를 열고 50조원 규모의 시장 안정 조치를 발표했다. 하지만 가장 약한 고리인 중소형 증권사가 보증한 저신용 등급 PF ABCP를 투자 대상에서 제외해 실효성 논란이 일었다. 이를 채우기 위해 대형 증권사가 나서도록 한 셈이다.
9개 대형 증권사들은 각 사별로 500억원을 2회에 걸쳐 나눠 SPC에 출자할 계획이다. 대상 증권사는 미래에셋증권·NH투자증권·한국투자증권·삼성증권·KB증권·메리츠증권·하나증권·신한투자증권·키움증권이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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