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줄도산 악몽 재현될까' 투자 심리 위축…10월 건설현장 31곳 중단되거나 지연
건설사들의 자금 조달 창구가 막히면서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사업에 부실 경고등이 켜졌다. 대형사들은 비교적 탄탄한 재무 구조와 여유 있는 현금 확보로 보릿고개를 넘길 수 있지만 중견·중소 건설사들은 자칫 자금난에 빠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특히 최근 주택 시장에서 미분양 물량이 급증하면서 건설사들의 위기감은 더욱 커지는 분위기다. 지난 10월 말에는 일부 건설사 부도가 임박했다는 소문에 한때 업계와 증권가를 들썩였다.
이런 가운데 10월 말 전국 건설공사 현장 100곳 가운데 13곳 정도가 중단됐거나 지연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이 15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달 10일부터 28일까지 전국 건설업체 1만 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한 40개 업체의 233개 건설현장 가운데 31곳(13.3%)이 중단됐거나 지연 상태였다.
공사가 중단 또는 지연되는 이유는 PF 미실행(66.7%)과 시행사의 공사비 인상거부(60.0%)가 주된 요인이었다. 또 중단됐거나 지연된 현장의 조기(1~2개월 이내) 정상화 가능성에 대해서는 응답업체 18곳 가운데 66%가 “낮다”고 대답했다.건설사 “유동성 문제없다” 일축건설사 유동성에 대한 불안 심리가 시장에 확산되면서 건설사들도 홍역을 치르고 있다. 사실 관계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나 아주 작은 위기 신호만 감지돼도 ‘부도설’로 일파만파 확산되면서 시장의 피해가 가중되고 있다.
11월 1일에는 중견 건설사 한신공영 채권이 한때 연 수익률 65%에 거래돼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제가 된 채권은 2023년 3월 3일 만기인 ‘한신공영42’ 종목은 민평 금리(민간 채권 평가사 평균 평가 금리) 연 5.801%다. 이날 장 초반 민평 금리보다 3%포인트 정도 높게 거래되다가 갑자기 연 65%까지 치솟았다.
개인 간 이뤄진 돌발 거래로 밝혀졌지만 시장에서는 한때 한신공영의 부도설이 급격히 확산되기도 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이례적인 개인 간 거래를 한신공영 위기와 연결하기는 무리가 있다고 분석한다.
상반기 기준 한신공영의 현금성 자산은 4400억원이다. 유동 비율 역시 상반기 말 기준 159% 정도로 양호하다. 유동 비율은 회사가 1년 안에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유동 자산을 1년 안에 갚아야 할 유동 부채로 나눈 값으로, 유동성 상황을 보여주는 지표다. 유동 비율 100~200%는 단기 채무 상환 능력이 보통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유동 비율이 100% 아래로 떨어져야 유동성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기업으로 본다. 곳간 열고 비상조치…대형사도 돈 구하기 어렵다 건설사들의 어깨를 누르고 있는 우발 채무는 지금 상황에선 빚이 아니지만 특정 요건을 충족하면 채무로 확정될 가능성이 있는 채무다.
PF 우발 채무 악순환의 고리는 이렇게 형성된다. 부동산 개발은 미래 수익성을 담보로 사업을 진행하게 된다. 사업 운영 주체인 시행사는 은행과 증권사 등 자금 조달 창구에 돈을 빌리는데 이때 금융사들은 앞으로 개발 사업에서 예상되는 수익을 예측해 이를 담보로 돈을 빌려준다.
공사를 하기로 한 건설사들은 자금력이 떨어지는 시행사가 PF 대출을 받을 때 연대보증·자금보충 등의 신용 공여를 제공한다. 직접 자금을 차입하지 않지만 지금처럼 금리가 급등하고 경기 침체가 우려되는 상황에서는 금융회사에서 대출 만기를 연장해 주지 않거나 PF 사업이 부실화될 수 있다. 이때는 건설사가 대신 빚을 떠안거나 공사비를 받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 같은 상황이 여러 사업장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면 건설사들의 자금 압박은 커진다.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 PF가 차환에 실패한 것이 대표 사례다. 발행했던 채권의 원금을 상환하기 위해 채권을 새로 발행하려고 했는데 이를 사겠다는 투자자를 구하지 못한 것이다.
자금을 구하지 못하면서 보증을 선 시공사가 보증한 사업비 7000억원을 대신 갚기로 했다.
부동산 경기가 좋을 때는 PF 리스크 우려가 현저하게 낮아진다. 최근 몇 년간이 그랬다. 아파트는 100%에 가까운 분양률을 기록했고 이에 따라 PF 상환 재원인 분양 대금 회수에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최근 아파트 미분양이나 공사 지연이 증가하고 있고 전반적인 경기 침체로 자금 조달이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9월 강원도가 사실상 레고랜드의 채무 불이행을 선언한 이후 시장에 ‘돈줄’이 마르고 있다.
건설사의 줄도산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이유는 과거 PF 부실로 인한 뼈아픈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건설사들의 신용 보강이 실제 재무 리스크로 이어지면서 시공 능력 평가 40위권의 중견 건설사가 줄도산했던 악몽이 재현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다.
대형사들 역시 자금 확보를 위해 비상 조치에 나서고 있다. 심지어 신용보증기금의 프라이머리 채권담보부증권(P-CBO)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상황이다. 대우건설(1000억원), 효성중공업(700억원), 롯데건설(300억원) 등이 P-CBO를 받았다. P-CBO는 신보 등이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의 회사채와 대출 채권에 보증을 제공해 발행하는 증권이다. 중소 건설사가 주로 쓰는 자금 조달 방식이다.
돈 구하는 데 어려움이 없던 대형 건설사가 P-CBO 발행에 나선 것은 그만큼 자금 시장 상황이 좋지 않다는 의미다.
자금 회전이 어려워지면서 만기가 도래하는 회사채를 차환하는 대신 회사 곳간을 열어 상환하는 건설사들도 여럿이다. 포스코건설은 10월 22일 1100억원의 회사채 만기가 도래했지만 차환용 회사채를 발행하지 않고 자체 보유 현금으로 상환했다. SK에코플랜트도 2000억원 수준의 만기 회사채를 현금 상환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물산도 11월 500억원 수준의 회사채 만기가 도래하지만 현금으로 처리할 예정이다. 쌍용건설은 기업어음(CP) 만기 200억원을 자체 자금으로 상환했다. 롯데건설, 3주간 계열사에서 1조 수혈 든든한 그룹사를 둔 건설사는 계열사에 손을 벌리고 있다. 롯데건설은 최근 롯데그룹에서 총 1조원 규모의 자금을 수혈받았다. 최대 주주인 롯데케미칼은 물론이고 계열사인 롯데정밀화학에까지 손을 벌렸다.
첫 수혈은 유상 증자였다. 롯데건설은 10월 18일 주주 배정 2000억원의 유상 증자를 하겠다고 밝혔다. 롯데건설 주요 주주인 롯데케미칼(43.8%)과 호텔롯데(43%)은 각 876억원, 861억원 규모로 유상 증자에 참여하겠다고 공시했다. 10월 20일에는 롯데건설이 롯데케미칼에서 5000억원을 단기 차입하겠다고 밝혔다. 여기에 11월 8일에는 지분 관계가 없는 롯데정밀화학에서 3000억원을 빌린다고 밝혔다. 그룹에서 3주간 1조원 규모의 자금을 조달한 것이다.
롯데건설 관계자는 “단기 PF 금융 환경이 아직 정상화되지 않아 선제적 대응 차원에서 안정적 재무 구조를 갖추기 위해 차입하게 됐다”고 밝혔다.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올해 말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롯데건설의 유동화 증권 규모는 3조1000억원이다. 이를 포함해 내년까지 채무 인수, 자금 보충 약정 등 신용 보강을 제공한 PF 우발 채무 규모는 6조7000억원이다. 이를 차환하거나 상환하기 위한 총알로 쓰기 위해 계열사에서 자금을 조달한 것으로 보인다.
롯데건설의 재무 건정성을 살펴보면 위험한 수준은 아니다. 현금성 자산은 지난해보다 늘었고 부채 비율도 낮은 편이다. 롯데건설의 현금성 자산은 상반기 말 기준 5950억원으로 지난해 말 대비 1627억원 늘었다. 부채 비율은 156%로 안정적인 편이지만 지난해 말(141%)보다 높아졌다. 유동 비율은 지난해 말 134.1%에서 상반기 141.11%로 늘었다. 겉으로 나타난 지표에는 문제가 없는 셈이다.
롯데건설은 계열사에서 돈을 빌리면서 올해 만기가 도래하는 3조원 정도에 대해 안정적인 대응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롯데케미칼은 신용도 하락 압력을 받고 있다. 롯데건설이 롯데케미칼에게서 5000억원을 차입하겠다는 내용이 알려진 후 롯데케미칼의 주가가 급락하기도 했다. 한국신용평가는 “계열사 지원 성격의 자금 지출은 현금 흐름 관리 및 자체 재무 부담 상승 가능성 측면에서도 신용도 하향 압력을 가중하는 요인”이라며 모니터링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태영건설도 지난 10월 계열사 군포복합개발피에프브이에 대한 960억원 규모의 채무 보증을 결정했다. 이는 태영건설의 자기 자본 대비 13.54%에 해당하는 규모다.
한국기업평가에 따르면 태영건설의 PF 우발 채무 규모는 2조3000억원(6월 말 기준)으로 롯데건설(약 6조7000억원) 다음으로 높은 수준이다. 우발 채무 78%가 만기 1년 이후로 장기화돼 내년 상반기 만기가 도래하는 PF 대출 잔액은 383억원 정도로 단기 리스크는 낮은 편이다.
하지만 재무 완충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상반기 태영건설의 현금성 자산은 4102억원이다. 기존 부채 비율이 448.5%, PF 우발 채무를 포함한 부채 비율이 498.8%에 달한다.
김현 한국기업평가 책임연구원은 “태영건설은 만기 구조가 장기화돼 있고 분양률이 우수하지만 재무 완충력을 감안할 때 PF 우발 채무 규모가 과중한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이에비해 매출 규모가 큰 4대 건설사(현대건설·DL이앤씨·대우건설·GS건설)의 단기 조달 리스크는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재무 완충력이 높아 위험 수위는 낮다는 평가다. 4대 건설사의 PF 합산 잔액(상반기 기준)은 3조3934억원에 불과하다. 이 중 DL이앤씨의 PF 잔액은 ‘제로’다. DL이앤씨는 사업 진행 시 연대 보증 등 신용 보강 대신 책임 준공을 통해 위험을 낮춘 덕이다.
책임 준공은 공사 도급 계약에 의거해 시공사가 정해진 기간 내에 공사를 완료할 의무만 진다. 재무 건전성도 높다. 올해 상반기 DL이앤씨의 부채 비율은 83.3%다. 이는 시공 능력 평가 상위 10대 건설사 평균(117%)과 비교해도 매우 낮다.
나머지 3개 건설사들의 절대적인 우발 채무 규모는 높은 편이다. 시공 능력이 높은 만큼 사업 규모도 크기 때문이다.
현대건설이 쥐고 있는 PF 우발 채무는 2조원대다. 하지만 3조원 정도의 현금성 자산을 들고 있고 부채 비율은 지난해 말 121.3%에서 올해 상반기 116.2%로 낮아졌다. 대우건설의 PF 우발 채무는 1조1600억원이다. 하지만 현금성 자산이 2조2480억원으로 우발 채무의 2배 수준인 만큼 유동성이 높다. 다만 부채 비율은 높은 편이다.
상반기 말 대우건설 부채 비율은 210.7%를 기록했다. GS건설의 PF 우발 채무는 1조4300억원이다. GS건설의 보유 현금성 자산은 3조2100억원으로 PF 우발 채무의 3배 수준이다. 이에 비해 단기 차입금은 6700억원 수준이다. 같은 기간 부채 비율은 210.7%를 기록했다.
다만 한국기업평가는 3사(현대·대우·GS)의 PF 우발 채무 가운데 미착공 사업 비율이 70%를 웃도는 점은 향후 위험성을 높일 수 있다고 평가했다. 미착공 사업장은 사업 진행이 멈춘 곳이기 때문에 추후 악성 채무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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