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애도 기간 선포 후 공연 행사 등 줄줄이 취소…노래 한 소절이 주는 위로 잊지 말아야

[비즈니스 포커스]

“‘2022 K-뮤직 평창’은 연기되었음을 안내드립니다.”
“시상식을 최소 규모로 진행하고 시상식 생중계는 취소되었음을 안내 드립니다.”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가 비통한 사고에 가슴 아파하는 이때, 공연을 진행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판단되어 연기를 결정하게 됐습니다.”


문화·예술계가 멈췄다. 핼러윈 데이를 앞둔 10월 29일 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서 일어난 ‘10·29 참사’로 문화·예술계 행사가 줄줄이 취소됐다. 정부가 선포한 ‘국가 애도 기간’은 11월 5일 밤 12시를 기점으로 끝났지만 문화·예술계의 10·29 참사 여파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관계자들은 행사 취소와 연기로 재정적 손해를 보거나 생계를 위협 받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겨우 기지개를 켠 터라 문화·예술계의 생채기는 더욱 컸다. 정부가 나서 자제를 요청하자 일각에선 ‘애도 계엄령’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애도 계엄령’이라는 말까지…시름하는 문화·예술계
“대중음악 가장 먼저 금기”참사 이틀째인 11월 1일 문화체육관광부는 문화·체육·관광 분야 관련 주요 단체 등에 ‘국가 애도 기간 중 다중 밀집 행사 자제 등 협조 요청’ 공문을 발송했다. 애도 기간 선포는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 이후 둘째다.

공문에는 △국가 애도 기간 중에는 가급적 행사와 축제 자제 △불가피하게 행사를 개최해야 하는 경우 철저한 안전사고 예방 대책의 수립 및 관할 지자체·경찰과의 긴밀한 협조 체계 구축 후 추진 등 내용이 담겼다.

지자체 주최 행사는 일제히 취소됐지만 민간 주최 행사는 정부가 진행 여부를 강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같은 협조 공문으로 자제를 요청한 것으로 풀이됐다. 공문에 강제성은 없었지만 이날 이후 문화·예술계의 ‘취소·연기’ 공지가 줄을 이었다.

우선 방송가는 드라마·예능을 결방했다. 이 시기 예정된 행사와 공연 일정 역시 취소되며 기약 없이 연기됐다. 가수의 컴백 일정 역시 연기됐고 내한 가수의 콘서트도 취소됐다.

경제적 손실과 대관 일정 등의 사유로 취소가 어려운 경우에는 행사가 축소됐다. 지니뮤직 측은 11월 8일 코로나19 사태 이후 3년 만에 개최되는 ‘2022 지니뮤직어워드’ 시상식을 최소 규모로 축소한다고 공지했다. 이들은 “최대한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하겠다”며 ‘함성 소리’ 응원 등을 금지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한국 축구 문화를 상징하던 거리 응원도 취소됐다. 서울시와 대한축구협회는 11월 24일부터 서울 광화문광장·서울광장 등에서 열 예정이던 카타르 월드컵 거리 응원전을 개최하지 않기로 했다고 11월 4일 밝혔다.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는 “거리 응원전을 개최하기 위해 서울시와 안전 대책 등을 협의했지만 결국 행사 자체를 열지 않기로 최종 결정했다”며 “이태원 참사가 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거리 응원을 하는 게 국민 정서에 맞지 않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핼러윈 데이 관련 행사들이 취소됐을 때만 해도 애도의 반응을 보였던 누리꾼들은 연이은 취소 소식에 황당함을 나타냈다. “애도의 방식은 각기 다른데 슬픔을 강요하는 것 같다”는 댓글들이 포털 사이트 뉴스 게시물에 달렸다. 특히 참사의 책임자를 놓고 당국자들의 폭탄 돌리기가 이어지자 비판 수위는 더욱 세졌다. ‘애도를 가장한 계엄령’이란 댓글에 공감을 나타내는 누리꾼의 수가 급증했다.

잇단 취소에 문화·예술계 관계자들의 금전적 피해와 생계 위협도 커졌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이제야 정상화 단계를 밟는 과정이기에 울분은 더욱 컸다. 가수 허리케인 김치는 “이번 달 제 수입의 70%가 사라졌다”며 “예술가와 공연인의 활동은 직업이고 생계 수단이다. 공연과 창작은 예술인들이 애도하고 힘든 상환을 견뎌 내는 방식이기도 하다”고 꼬집었다.

주민 생계가 걸린 정부·지자체 행사의 피해도 막심하다. 국내 내수 경기를 되살리기 위해 마련되는 코리아 세일 페스타의 11월 1일 개막식은 취소됐다. 지난 11월 5일 예정된 부산 불꽃축제를 무기한 연기한 부산시 역시 축제 입장권 환불 절차를 밟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전에는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운집할 만큼 지역 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던 행사였다. 기대가 컸던 만큼 소상공인들의 좌절감도 깊어지고 있다.

문화·예술계 관계자들도 조심스레 각자의 의견을 표출했다. ‘생각의 여름’으로 활동하는 가수 박종현 씨는 10월 31일 인스타그램에 “예나 지금이나 국가 기관이 보기에는 예술이 유흥·여흥의 동의어인가 보다”라며 “관에서 예술 관련 행사를 애도라는 이름으로 일괄적으로 닫는 것을 보며 주어진 행사를 더더욱 예정대로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공연이 업인 이들에게는 공연하지 않기뿐만 아니라 공연하기도 애도의 방식일 수 있다”며 “하기로 했던 레퍼토리를 다시 생각하고 매만져 보는 것, 무슨 이야기를 관객에게 할지 한 번 더 생각하는 것 그것이 제가 선택한 방식”이라고 말했다.

그가 쓴 메시지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샀다. 다수의 공연 관계자들이 그의 글을 공유하며 생각을 보탰다. 배순탁 대중음악 평론가는 자신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서 “언제나 대중음악이 가장 먼저 금기시되는 나라”라고 분노했다. 그는 “슬플 때 음악으로 위로 받는다고 말하지나 말든가. 우리는 마땅히 애도의 시간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애도의 방식은 우리 각자 모두 다르다. 방식마저 강요하지 말기를 바란다”고 일침했다.

가수 정밀아 씨도 자신의 트위터에 “저는 저의 방식대로 애도하겠다. 그중에는 음악이 있다”며 “정성껏 만들고 있는 노래들 마무리도 잘할 것이고 예술로 위로도 받을 것”이라고 올렸다. 작곡가 겸 가수 정원영 씨도 인스타그램을 통해 “모든 공연을 다 취소해야 하나. 음악 만한 위로와 애도가 있을까”라고 물었다.치유의 노래, 외상 후 스트레스 해소 정신의학과 전문의들은 현장 영상이나 뉴스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음악과 같은 문화·예술을 통해 불안과 긴장을 완화할 것을 주문한다. 실제 다수의 연구에서 음악이 뇌의 인지·감정·감각·운동 과정을 자극시키며 뇌의 기능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결과가 보고됐다. 전북대 정신건강의학과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에 대한 음악 요법의 적용 일례’ 보고서에서 “정신건강의학과 영역에서는 주요 우울증·불안 장애·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 편도·안와전두피질 등 변연계나 변연계 주위의 기능 부전과 관련 있는 질환에서 음악 요법을 적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1919년 7인의 여성 독립 투사들이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에 수감됐을 때 이들은 조국 독립의 염원을 담아 노래를 지어 불렀다. “접시 두 개 콩밥덩이 창문열고 던져줄 때 피눈물로 기도했네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참혹한 현실 속에서 자신을 위로하고 내일을 희망하기 위해 독립 투사들이 선택한 것은 옥중 노래였다.

2017년 5월 22일 영국 맨체스터 아레나 공연장에서는 팝가수 아리아나 그란데의 콘서트 도중 폭탄 테러가 발생해 22명이 희생되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1주일 후 아리아나 그란데는 피해자와 가족들을 위로하는 자선 콘서트를 열었다. 이날 공연에는 5만 명의 인파가 몰렸고 수많은 군중은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그룹 오아시스의 ‘화내며 뒤돌아보지 마세요(Don’t Look Back in Anger)’를 눈물로 열창했다. 아리아나 그란데는 “치유의 시간이었다. 내 눈물을 닦아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국가 애도 기간이던 지난 11월 2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취소되지 못한 서울시합창단의 공연이 열렸다. 첫 곡의 연주가 끝난 이후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화면에는 아래와 같은 글귀가 나타났다. “서울시합창단은 이태원 참사로 숨진 분들의 넋을, 그리고 그들을 잃고 괴로움에 슬퍼하는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며 애도하는 마음을 담아 연주합니다. 관객분들도 같은 마음으로 애도와 위로를 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관객석은 눈물을 훔쳤고 추모의 묵념이 이어졌다.

국가 애도 기간, 희생자 국가 국민을 위한 애도는 무엇일까.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