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취향에 맞는 것을 깊이 파다…바뀌는 음악 산업의 주도권

역주행 신화 뒤, 취향을 ‘디깅’하는 사람들[김희경의 컬처 인사이트]
“발매 222일, 486주 만에 1위…? 만화인가!”

‘눈 떠보니 스타가 됐다’는 얘기보다 왠지 더 비현실적으로 들린다. 노래가 발표된 지 222일, 아티스트가 음원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한 지 486주(약 8년)가 흐른 시점에 갑자기 1위에 올랐다니 말이다. 아티스트가 직접 자신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 쓴 짧은 글에서조차 그 스스로도 어안이 벙벙하다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정말 상상 속에서나 있을 법한 만화같은 일이다.

차트 역주행 신화의 주인공은 데뷔 17년 차 가수 윤하다. 그가 지난 3월 발매한 정규 6집 리패키지 앨범의 타이틀곡 ‘사건의 지평선’은 11월 7일 멜론 등 국내 주요 음원 플랫폼의 차트 1위에 올랐다. 이 노래는 많은 인기 아이돌 그룹의 공세에도 굳건히 정상을 지키고 있다.

데뷔한 지도 오래된 가수의 다소 모호하고 어려운 제목의 노래는 어떻게 ‘차트의 지평선’을 넘을 수 있었을까. 이를 단순히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현상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잊을만 하면 들려오는 반가운 역주행 소식, 그 뒤엔 음원 산업의 커다란 변화가 담겨 있다.달라진 ‘음악의 생애 주기’
차트 역주행은 음악 생애 주기의 흐름을 거스르는 정반대의 현상이다. 음악은 인고의 시간을 거쳐 탄생한다. 그리고 대중에게 공개된 직후 가장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이후 점점 하향 곡선을 그린다. 전 세계 어느 지역, 어느 시대에나 통용되는 음악의 운명이자 법칙이다.
하지만 최근엔 그 주기가 매우 짧아지고 있다. 다수의 음악이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된다. 발매 후 1주일 안에 차트 상위권에 들지 않으면 대중의 기억 속에서 빠르게 사라진다. K-팝의 확산으로 음원 시장이 커진 영향이 크다. 요즘은 하루가 멀다고 새로운 아이돌 그룹과 그들의 노래가 나온다. 아이돌 음악은 강력한 팬덤의 힘으로 차트 상위권에 나란히 오른다. 이에 따라 다른 장르의 음악들은 대중의 눈에 띌 기회를 쉽게 얻지 못한다. 다양한 마케팅을 진행해도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다수의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그 곡을 감상하고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게 될 가능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희박해진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건의 지평선’은 음악의 생애 주기를 거슬러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사건의 자평선’은 윤하가 직접 작곡·작사한 노래다. 이 곡의 흥행은 쉽게 예상하기 어려웠다. 곡의 길이는 무려 5분에 달한다. 요즘 나오는 대부분의 노래가 3분 이내인 것에 비해 훨씬 길다. 가사도 아이돌 음악들과 결이 사뭇 다르다. 아이돌 음악은 간결하고 직관적이다. 반면 이 노래는 이별을 우주의 블랙홀에 빗대어 풀어내 처음엔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곡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가사를 곱씹으며 문학적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안전한 유리병을 핑계로/바람을 가둬 둔 것 같지만’, ‘저기, 사라진 별의 자리/아스라이 하얀 빛/한동안은 꺼내 볼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이런 점이 오히려 ‘디깅(digging)족’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디깅은 ‘파기’나 ‘채굴’의 의미를 가진 단어로, 특정 분야나 취향에 몰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저서 ‘트렌드 코리아 2023’에서 “자신의 취향에 맞는 한 분야에 깊이 파고드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새로운 트렌드로 ‘디깅 모멘텀(digging momentim)’을 꼽았다.

디깅족은 ‘오타쿠’나 ‘덕후’ 등과는 다르다. 이들이 자기 만족에 머물렀다면 디깅족은 한 발짝 더 나아가 자신이 즐기는 음악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소통하며 널리 알리려고 한다. 멜론·유튜브 등에서 취향별로 음악을 모아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제공하는 채널 운영자들도 디깅족에 해당한다. 한 음원업계 관계자는 “이들은 저작권 문제 등으로 인해 수익을 내지 못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사람들과 나누는 행위 자체를 즐기며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건의 지평선’은 디깅족의 이 같은 욕구를 더욱 자극한다. 어느 순간 우리는 ‘이지 리스닝(easy listening)’에 익숙해졌다. 국내외 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도록 후렴구가 자주 반복되는 ‘후크송’이 늘어난 영향이 크다. 그 사이 감성적이고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가사의 노래들은 순위권 밖으로 자연스럽게 밀려났다. 하지만 디깅족은 이런 음악들에 큰 호기심을 갖는 경향을 보인다. ‘사건의 지평선’ 또한 언어적 묘미가 살아 있고 다채로운 해석의 여지가 있기에 디깅족을 강하게 끌어들였다.거대한 아카이브가 된 영상 플랫폼

디깅족의 또 다른 특징은 스스로 뭔가를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주체가 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김 교수는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 사회적 갈등, 경제적 위기 등으로 인한 불안은 개인이 선택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며 “이런 상황에서 내가 온전히 바꿀 수 있는 ‘그 무엇’을 찾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분석한다.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을 충분한 가치가 있음에도 묻혀 있던 보석같은 음악을 발굴하고 역주행이라는 짜릿한 롤러코스터를 태우는 일은 디깅족의 강력한 변화의 의지와 잘 맞아떨어진다.

그중에서도 디깅족이 역주행의 주인공으로 주목하는 아티스트는 어떤 인물들일까. 올해 역주행의 주역이 된 윤하, 지난해 먼저 역주행 신화를 이룬 아이돌 그룹 ‘브레이브걸스’에겐 공통점이 있다. 브레이브걸스는 2017년 공개한 ‘롤린’이란 곡으로 역주행에 성공했다. 무려 4년이나 지난 노래가 열풍을 일으키며 무명에 가깝던 이들이 스타가 됐다.

두 아티스트 모두 유튜브 ‘직캠’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유튜브라는 새로운 플랫폼이 발전하면서 이곳엔 시시각각 다양한 직캠이 올라오게 됐다. 직캠은 각종 행사나 축제 등 공연에서 아티스트가 무대에 올랐던 모습을 팬들이 직접 찍은 경우가 많다. 공연을 보면서 영상을 촬영했기 때문에 화질이 좋지 않고 화면이 흔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아티스트가 열심히 노래하고 관객들과 적극 소통하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 본다.

직캠 속 두 아티스트의 모습엔 ‘꾸준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브레이브걸스는 데뷔 이후 작은 행사부터 멀고 먼 군부대 위문 공연까지 열심히 다녔다. 이런 무대들이 담긴 영상은 네티즌 사이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며 입소문이 났고 어느새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윤하 역시 대학 축제 등 다양한 무대에 올랐던 직캠들이 화제가 되며 역주행에 성공했다. 그가 오랜 시간 묵묵히 공연을 하며 관객들과 소통한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윤하의 숨은 명곡들을 잘 몰랐던 MZ세대(밀레니얼+Z세대)들도 그의 무대 영상을 보며 함께 감동하며 즐겼다. MZ세대가 데뷔 17년 차의 역주행을 이끈 주역이 된 이유다.

새로운 영상 플랫폼의 발전은 음원 산업의 주도권을 분산하고 이전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과거엔 방송이란 거대한 조직과 고착화된 시스템이 제공하는 음악만을 주로 소비할 수 밖에 없었다. 방송사에서 프로그램에 소개하는 아티스트의 음악이 아니면 접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분위기가 급변했다. 누구나 유튜브 등을 통해 많은 아티스트의 음악과 영상을 쉽게 찾아보고 감상할 수 있다. 유튜브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아카이브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디깅족들은 이 아카이브를 활용해 좋은 음악을 발견하고 소개하는 능동적인 주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 덕분에 대중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던 아티스트는 음악 인생을 ‘리부트(reboot·재시동)’할 수 있게 됐다. 해체 직전이던 브레이브걸스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도 유튜브에서의 인기를 발판으로 역주행을 해낸 덕분이다.

물론 역주행의 신화를 이뤄 낸 음악도 언젠가는 차트 상위권에서 사라지게 된다. 마치 ‘사건의 지평선’ 가사처럼 말이다. ‘하나둘 추억이 떠오르면/많이 많이 그리워할 거야/고마웠어요. 그래도 이제는/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역주행을 꿈꾸는 또 다른 명곡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이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시 반가운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한 번 역주행에 성공했던 곡들이 먼 훗날 재소환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머릿속엔 이미 그 노래에 책갈피가 끼워져 있다. 그러니 언제든 다시 들춰 볼 수 있지 않을까.

김희경 한국경제 문화부 기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