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둘러싼 평등권과 공정성 간의 마찰로 이어져
트랜스휴머니즘의 도래 4 지난 11월 3일 미국 항소법원이 내린 판결을 둘러싼 파장이 심상치 않다. 미스 USA 대회에 성전환자(transsexual)의 출전 금지가 정당하다는 판결이었다. 사건의 요지는 이렇다.성전환자인 아니타 그린 씨는 2019년 미스 오리건 대회에 출전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주최 측이 ‘자연 태생 여성’으로 출전 자격을 제한해 버린 것이다. 출전이 좌절된 그린 씨는 대회 측을 차별 금지법 위반으로 오리건 주 법원에 고소한다.
하지만 오리건 주 법원은 주최 측의 손을 들어주며 ‘이상적 여성상’을 추구하는 미스 USA 정신에 비춰 보면 성전환자 출전 제한은 위법하지 않다는 판결을 내린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22년 11월 3일 항소법원이 1심 판결을 재확인해 준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린 씨는 아무런 자격 시비 없이 미스 몬태나 대회에 출전한 경력이 있었다. 또 다른 성전환자 카탈루나 엔리케즈 씨는 심지어 미스 네바다 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있고 그 자격으로 2021년 전미 미스 USA 대회에 출전한 전례도 있다.
이웃하는 캐나다에서도 성전환자 출전을 두고 꽤나 요란한 공방이 있었다. 2014년 미스 캐나다 대표 선발에서 엄청난 대중적 지지를 얻은 제나 탈락코바 씨가 그 주인공이다. 비록 우승하지는 못했지만 탈락코바 씨는 당시 대회 공동 호스트였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의 본선 진출 저지에 맞서 장기간 법정 공방에서 승리함으로써 트랜스섹슈얼 평등권의 심벌로 부각됐던 인물이다.
실제로 세계 각국 대표들이 경합하는 미스 유니버스는 2012년부터 공식적으로 성전환자의 출전을 허용해 왔다. 그리고 2018년 안젤라 폰스 씨가 스페인 대표 자격으로 미스 유니버스에 참여한 첫 성전환자로 기록된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미국 항소법원의 판결은 보편적 평등권과 포용적 민주주의의 퇴보라는 비판에 직면한다. ‘미국의 이상적 여성상 추구’라는 주최 측 표현의 자유 보장을 명분으로 직업·나이·성별·종교·장애·성적 취향과 무관한 평등권이라는 열린 사회의 더 큰 합의를 묵살한 시대 역행적 처사라는 질책이다.
여기에 사태를 점입가경으로 만든 두 가지 반전이 더 추가된다. 첫째 반전은 미국 항소법원의 평결 1주일 전에 발생한다. 지난 10월 26일 태국 출신 트랜스섹슈얼 셀러브리티 차크라퐁 ‘안느’ 챠크라주타팁 씨가 미스 유니버스 대회의 새 주인으로 등장한 것이다.
JKN글로벌이라는 회사 오너이자 트랜스섹슈얼 인권 단체 설립에도 앞장선 그녀는 미국 자회사 JKN 메타버스를 통해 거금 3100만 달러(약 407억원)를 들여 미스 유니버스 대회를 전격 인수했다. 미스 유니버스가 세계 150여 개국에 방송되는 행사라는 점에서 회사 홍보는 물론이고 트랜스젠더의 권리 향상에도 유효할 것이란 판단이 그 뒷배경이라고 한다.
또 다른 반전은 항소법원 판결 사흘 뒤 일어났다. 11월 6일 미국 뉴햄프셔 주 지역 예선 중 하나인 미스 그레이터 데리에서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을 가졌지만 여전히 남성 신체를 지닌 브라이언 응우옌 씨가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세의 그(녀)는 뉴햄프셔 주 전체 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갖추게 됐고 미스 아메리카 공식 주관 행사 최초의 트랜스젠더 수상자가 됐다. 참고로 트랜스젠더는 트랜스섹슈얼보다 포괄적 개념으로, 성전환 수술 여부와 관계없이 자연적으로 주어진 성별을 바꾼 사람들과 젠더 유연성을 지닌 사람들을 지칭한다.
2021년 미스 네바다 출신의 카탈루나 엔리케즈 씨는 성전환 수술을 한 트랜스섹슈얼로서는 최초이지만 브라이언 응우옌 씨는 생물학적 남성 신체를 보유한 사상 최초의 ‘여성’ 미인 대회 수상자라는 측면에서 그 파장이 만만치 않다.
이를 두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서는 논란이 한창이다. 보수와 리버럴 진영 간의 대립도 재점화되는 양상이지만 이념 지형을 넘어 폭넓은 갑론을박이 전개된다. MTF(남성에서 여성으로 : Male To Female) 트랜스에 우호적이지 않은 일부 페미니스트들(TERF : Trans-Exclusive Radical Feminist)은 여성들의 대회에서 조차 남성 수상자를 뽑는 것은 뿌리 깊은 여성 혐오를 방증한다며 날을 세운다.
한편 브라이언 응우옌 씨가 남자가 아닌 실제 여성의 몸을 가졌다면 대회 출전 자체가 가능했을 외모인가 하는 의문도 등장해 눈길을 끈다. 특히 트랜스에 대한 차별 금지가 도를 넘어 급기야 특혜로 귀결된 사례라며 소수자 우대 정책이 역차별로 이어지는 불공정성에 대한 지적이 거세다. 몸을 둘러싼 평등권과 공정성의 충돌
불과 2주일 사이에 연쇄 발생한 위 세 가지의 ‘대형 사건들’은 몸을 둘러싼 상이한 관점과 주체·권력들의 전면적 충돌이 임박해 있음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수년 차에 접어든 퀴어 축제를 두고서도 거친 마찰이 발생하는 한국의 사정을 감안한다면 이는 결코 ‘강 건너 불구경’이 될 수 없다.
2020년부터 2021년까지 지속된 고(故) 변희수 하사와 관련된 논란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렇다. 당시 논쟁은 변 하사의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잠정 중단됐지만 성전환자와 그들의 권리에 관한 사회적 불협화음은 더 큰 파괴력으로 되돌아올 것이 번연하다. 하지만 트랜스젠더의 몸과 관련된 국내외 논란 속에는 평등과 공정의 엇갈림이란 더 큰 난제가 웅크리고 있다.
단적으로 이번 항소심 판결을 두고 한편에서는 평등권 역행의 사례라는 비판이 일고 반대편에서는 트랜스젠더들의 출전이야말로 대회 공정성 훼손이라는 주장으로 팽팽하게 맞선다. 또 트랜스들만을 위한 대회를 별도로 개최해야 한다는 견해와 그것은 분리주의(segregationist)적 발상에 기초한 차별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성전환자에 관한 공정성 시비가 더욱 첨예한 부문은 스포츠계다. 지난 6월 세계수영연맹(FINA)은 이사회 공식 투표를 거쳐 성전환 선수의 출전 금지를 확정했다. FINA의 결정을 신호탄으로 국제사이클링연맹(UCI)과 국제럭비연맹(IRL)도 같은 결정을 내렸다.
그 결과 10월 15일 런던에서 개막된 여자 럭비 월드컵에 출전 금지된 선수가 다수 발생했다. 그런데 이 같은 조치는 이미 중고교 소녀 종목에서 지난 2년간 확대돼 왔고 당사자를 비롯한 트랜스젠더 학부모들의 반발 또한 거세지고 있다.
‘트랜스 소녀도 소녀다(trans girls are girls)’라는 학부모들의 외침은 공정과 평등 간의 긴장 관계를 실감나게 하는 장면이다. 통상 공정은 평등의 발판이고 평등은 공정을 드높인다. 그런데 만약 평등과 공정 중 택일해야 하거나 상호 충돌이 발생한다면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무슨 선택을 해야 할까.
공정은 편견과 치우침이 없음을 뜻한다. 그래서 사람이나 상황이라는 특수성에 의해 기울기가 발생하지 않는, 정해진 룰의 일관된 집행과 공평한 적용에 초점을 둔다. 대체적으로 경쟁이나 차별적 결과가 예측되는 분야(운동 경기·시험·재판 등)의 황금률이다.
반면 평등은 사람과 집단 사이의 불가피한 차이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차이로 인한 차등을 방지, 극복하겠다는 현대 사회의 약속이다. 평등은 그 자체가 목적이고 그것의 보편적 적용만을 허용한다.
그래서 대중교통에는 장애인을 위한 특수 장비와 별도 공간이 필수적이다. 노약자나 임산부 우선석이 필요한 것도 신체 약자를 포함한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그걸 ‘배려’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는 발상이다. 보편적 통행이란 평등권에 도대체 누가 선심을 쓰고 누가 양보한다는 것이며 그것이 무슨 미덕이란 말인가.
평등을 위해서는 차별적 접근이 부득이하다. 누진세나 대입 특별 전형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니 모두에게 똑같은 룰을 적용하는 것만이 공정이라는 단순한 생각이 평등의 장애물이 되고 만다. 개인·집단 간 기존하는 차이와 불균등을 감안하지 않고 어떤 룰을 기계적으로 관철한다면 그것은 공정도 일관도 아닌 획일로 불려야 한다. 그리고 기계적 획일이야말로 불평등의 방치와 확대의 주원인이 된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사진 속 파란색 오리는 오리인가, 아닌가. 혼자만 다른 색을 가졌다는 이유로 저 오리는 선반에서 제거돼야 할까. 그래야 다른 노란색 오리들에게 공정해지는 것일까.
최정봉 전 NYU 영화이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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