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에너지 회복 위한 쉼과 여가 적극적으로 도모해야

[안주연의 ‘다시, 연결’]
[안주연의 ‘다시, 연결’] 6년 차 직장인 “아무것도 하기 싫고 무기력합니다”
※한경비즈니스는 ‘안주연의 다시, 연결’을 연재하며 독자에게 상담 편지를 받고자 합니다. 직장인 마음 상담을 주제로 다양한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안주연 마인드맨션의원 대표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 직접 답하겠습니다. 하단 링크로 직접 사연을 작성하거나, poof34@hankyung.com으로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사연 접수 링크

Q. 안녕하세요. 6년 차 직장인입니다. 스물네 살에 일을 시작해 20대 절반을 사회인으로 보냈습니다.

요즘 가장 큰 고민은 무기력함입니다. 업무가 과중한 것도 아니고 회사에 괴롭히는 사람도 없고 직장 동료나 선후배들과의 사이도 아주 좋습니다. 선배들은 잘 끌어주고 후배들은 잘 따라주죠. 업무가 지루한 것도 아닙니다. 프로젝트성이라 늘 다른 주제로 일하고 있고 다른 직업에 비해 개인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고 성과가 눈에 보이는 일이라 지금까지는 성취감을 가지고 일해 왔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세상이 귀찮아졌어요. 일어나고 밥 먹고 씻고 집을 치우는 모든 일이 힘듭니다. 일할 때는 숨이 턱 막혀 가슴을 치며 할 때도 많아요. 건강상 문제인 것 같아 병원도 가보고 한의원도 가봤지만 문제는 없었습니다.

차라리 업무 스트레스이거나 관계에서 오는 문제라면 이를 해결하고 고민도 털어놓을 수 있는데 저는 원인 없이 무기력한 게 가장 고민입니다. 너무 무기력하고 모든 게 귀찮아 제발 그만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저는 저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도 아니에요. 목표 지향적인 사람도 아닙니다. 원래는 산책을 하거나 하늘만 봐도 기분이 전환되는 날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운동하는 것도, 여행을 가는 것도, 쇼핑과 취미 활동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업무 집중도나 생산성도 크게 떨어지고 있어요.

아무런 원인도 없이 이렇게 우울감과 무기력함이 찾아올 수 있는 건가요.
 안주연 마인드맨션의원 대표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마인드맨션의원 제공
안주연 마인드맨션의원 대표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마인드맨션의원 제공
안녕하세요, E 님.
이렇게 편지로 만나뵙게 돼 반갑습니다.

몇 달 전부터 특별하게 짚이는 이유 없이 무기력하고 삶이 재미가 없다는 고민을 이야기해 주셨어요. 자문자답도 해보고 한의원부터 쇼핑까지 다양한 시도도 해 봤는데 무기력이 해소되지 않고 원인도 알 수 없다고 하셨지요. 참 답답하셨을 것 같아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 일해 오면서 가장 어려울 때 중 하나가 큰 이유 없이 우울하거나 무기력해졌다는 내담자분을 만났을 때예요. 이럴 때 저는 내담자분들에게 최근 1~2년간의 삶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여러 가지를 물어 봅니다. 그리고 어릴 때 가졌던 꿈부터 인생관, 마법의 지팡이가 있어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면 무엇을 빌고 싶은지까지 추상적이고 가치 지향적인 질문도 많이 던집니다. 내담자의 생물심리사회학적 특성 외에도 세상과의 관계 맺음, 가치관까지 파악하며 내담자에 대한 입체적인 이해를 해보는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내담자가 본인 내면의 욕구나 결핍을 발견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원인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본인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 무기력에 따르는 불안이나 답답함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맞는 휴식이나 생활 양식을 찾아가기도 하지요.

E 님께 답장을 쓰면서 특히 이런 깊은 대화가 E 님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차분히 차 한잔 나누면서 해 나가는 그런 만남과 이야기들이요. 하지만 우리가 당장 직접 만날 수 없으니 보낸 글을 바탕으로 추정하며 몇 가지 이야기들을 해볼 게요.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스물네 살에 빠른 취업. 같은 업계에서 성취감을 가지고 6년째 일해 옴.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가 좋음. 일상에 감사해 하고 사소한 새로운 경험에도 즐거워하는 성격. 자립해 혼자 살아온 지 몇 년…. 글을 통해 알게 된 E 님의 면모들입니다. 쉬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외향적이고 유능한 청년이 그려집니다.

우선 정말, 정말 수고하셨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요즘 같은 취업 시장에서 서른을 맞이하는데 5년 이상의 직업적 커리어를 갖추고 직장에서도 인정받고 있다니 얼마나 치열하게 생활했을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친한 소수와 잘 소통하고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도 두루 원만하게 지내는 만큼 대인 관계 능력 또한 좋은 편입니다. 회복 탄력성도 높아요. 그러니 이런 본인에게 왜 우울감과 무기력이 찾아온 것인지 화도 나고 막막할 거예요.

아직 많은 답장을 쓰지는 못했지만 이 코너에서 여태 만나 뵌 사연자들과 E 님은 꽤 다릅니다. E 님은 다른 사연자님들처럼 특정한 관계, 혹은 환경의 변화 등으로 인한 극도의 스트레스와 정서적 고통을 겪는다기보다 수년간 이어진 무리와 피로가 누적된 형태의 심리적·신체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서서히 누적된 스트레스와 부담은 그 존재 자체를 인식하기가 어려워 많은 이들이 ‘멀쩡했는데 아무 이유 없이 무기력해졌다, 우울해졌다’고 느끼곤 합니다. 이유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작은 이유가 쌓인 것이고 가랑비에 옷 젖듯이 서서히 지쳐 갔을 가능성이 높아요.
[안주연의 ‘다시, 연결’] 6년 차 직장인 “아무것도 하기 싫고 무기력합니다”
제품 생산 한계치가 100개인 공장이 매일 120개의 제품을 생산하다 보면 직원들이 과로하게 되고 불량품 빈도가 늘어날 것입니다. 세계적인 운동 선수라고 해도 쉬지 않고 힘든 경기에 나간다면 부상의 위험이 높아질 겁니다. 그런데 직업에 의한 심리적 소진, 그러니까 번아웃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심리적 에너지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고 측정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직업적으로 몰입해 어떤 일을 이루고 이에 따른 만족과 보상을 얻다보면 정서적 소진에 따른 피로와 고통을 잘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이 거듭되면 꼭 남겨 놓아야 할, 재충전과 회복을 위한 심리적 에너지마저 고갈돼 그야말로 하얗게 다 타 버린 번아웃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E 님은 일을 잘하고 센스 있다는 평을 듣지만 부담감이 크고 책임감이 강한 편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높은 수준의 내적 기준을 가지고 있는 분이기에 좋은 질의 결과를 내기 위해 시간과 심리적 에너지를 어떠한 제한선 없이, 아낌 없이 사용해 왔을 것 같아요. 그랬기에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것이겠지만 높은 내적 기준을 사수하다 보면 몸과 마음에 무리가 쌓이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본인의 심리적 어려움을 축소하는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매번 새로운 프로젝트, 마감, 바로 결과가 나오는 스트레스 상황 속에서 일하면서 동료들보다 회복 탄력성이 좋다 보니 주로 주변을 이해해 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고 ‘나 정도면 괜찮은 편이지’, ‘일을 하려면 이 정도 스트레스는 기본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쉬웠을 거예요. 하지만 E 님은 스트레스에 비교적 잘 대처하는 것이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일의 완성도와 책임 완수를 위해 긍정적이고 굳센 마음가짐을 다지다 보면 그 뒤편에서 전해 오는 피로와 고통의 신호는 무시돼 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느끼는 극도의 피로감, 일에 대한 거부감과 압박감, 업무 효능감 저하, 신체적 무기력 등 전형적인 번아웃 증후군의 증상들이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찾아왔다고 느낄 수 있어요.

이렇게 번아웃 증후군의 증상들을 체감할 정도면 심리적 에너지를 회복하기 위한 쉼과 여가를 적극적으로 도모해야 합니다. 그것이 회복의 첫걸음이에요. 그런데 성취욕이 강한 분들은 떨어진 의욕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대학원 진학이나 새로운 공부처럼 또다시 심리적 에너지를 투입해야 하는 활동들을 계획합니다. 저는 이 부분이 조금 우려가 됩니다. 당장은 의욕이 조금 회복될 수 있지만 길게 보면 번아웃 증후군을 가속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E 님이 현재 경험하는 우울감, 평소 흥미를 느끼던 활동에서의 관심 저하, 미래에 대한 비관, 삶의 의욕 저하 등은 우울증이 아닌지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에서 꼭 한 번 체크해 봐야 하는 증상들입니다. 꼭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나 심리 상담 전문가를 만나 대면 상담을 해보기를 권합니다.

여기에 더해 특별히 제안하고 싶은 것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자기 정체성 찾기입니다.

E 님, 제가 가장 마음이 쓰이는 것은 보내준 자신의 모습들이 사실은 자신이 ‘통과한 시간’이거나 ‘자신이 수행한 역할’들로 채워져 있다는 점입니다. 업무 능력, 상사와의 관계, 더 나은 커리어를 위한 대학원 진학 계획은 물론 E 님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하지만 제가 진심으로 궁금해지는 것은 E 님 자신만의 독자성을 담고 있는 인생의 순간과 이를 통해 만들어진 모습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개성이 있고 독특하게 모난 모습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에지나 모남은 부모나 선배 혹은 사회가 가리키는 길이 아니라 자신이 온전하게 선택한 것들이 남긴 자국들입니다.

컨설턴트라는 일이 좋은 것일지, 문제를 해결하는 상황이 좋은지, 누구와 대화하는 것이 좋은지 등의 세밀한 순간들을 자세히 포착하고 직업과 일상의 삶에서 진심으로 ‘느껴지는 순간’을 발견해 자기 정체성을 좀 더 구체화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컨설턴트가 되기로 마음 먹었던 그날의 이야기가 있을 겁니다. 그날은 어떤 날이었나요. 그날 E 님은 누구와 어떤 얘기를 나눴나요. 무엇을 보고 어떤 감정들을 느끼면서 ‘컨설턴트가 되기’로 마음 먹었나요.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찾아가는 정체성을 ‘서사 정체성’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E 님이 된 결정적인 이야기들은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의미 있는 순간과 기억 등으로 구성됩니다. 아, 그리고 정체성이란 단어에서 혹시라도 ‘질풍노도의 청소년 시기는 지났는데…’라고 치부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의 정체성은 일평생에 걸쳐 변화하고 다져지기 마련입니다. 고정된 정체성으로 살겠다는 생각이 오히려 자신을 무기력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특히 지금처럼 정서적 소진이 느껴지는 때는, 어쩌면 새로운 정체성을 위한 자기 인식과 고민이 꼭 필요한 시기일지도 모릅니다.

E 님, 좀 더 이야기를 듣고 더 깊이 이해하면서 돕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전 세계적으로 MZ세대(밀레니얼+Z세대)는 생산성에 과도한 강박을 가진 나머지 자신의 삶에서 좀처럼 비생산적인 활동을 허용하지 않는 경향이 높습니다. 번아웃의 위험성이 매우 높다는 얘기입니다. 밀레니얼의 번아웃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책 ‘요즘 애들’에서는 여가를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는 죄책감에서 자유로운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정말 생산성 있는 활동은 아무것도 안 하는, 자유로운 여가를 만들어 가보면 어떨까요. 또한 E 님에게 말을 건넵니다. “당신은 그저 존재하기 때문에 가치 있다”고요.

※한경비즈니스는 ‘안주연의 다시, 연결’을 연재하며 독자에게 상담 편지를 받고자 합니다. 직장인 마음 상담을 주제로 다양한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안주연 마인드맨션의원 대표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 직접 답하겠습니다. 하단 링크로 직접 사연을 작성하거나, poof34@hankyung.com으로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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