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 감상부터 앙상블, 낭독까지…
살아 숨쉬는 문화예술 향유의 장
황인용 뮤직 스페이스 카메라타 외관. 나무와 철, 노출 콘트리트로 구성했다. (사진=황우섭 작가)
황인용 뮤직 스페이스 카메라타 외관. 나무와 철, 노출 콘트리트로 구성했다. (사진=황우섭 작가)
어느 멋진 장소의 방문 후기나 리뷰를 읽다보면 ‘공간이 주는 힘’이라는 어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공간이 주는 힘이란 어떤 것일까. 규모로 압도하는 건축물에서 느끼는 웅장함, 개인적 취향과 생산자의 의도가 맞아떨어질 때의 기쁨, 공간에서 엿보이는 주인의 애정, 그 애정이 점열될 때의 충만감….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느껴진다면 성공이다.

처음 ‘황인용 뮤직 스페이스 카메라타’에 간 날은 첫 회사에서 퇴사하는 날이었다. 그날은 오후 1시쯤이었고 8월이라 민소매를 입은 팔에 태양이 강렬하게 내리쬈다. 물건을 담은 박스를 안고 멍하니 서 있자니 어디든 떠나고 싶었고 쉬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해 드라이브를 가자고 했다. 그가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책이나 읽자’며 데려간 곳이다. 파주시 헤이리, 자유로를 타고 달리다 파주출판단지를 지나 헤이리 7번 게이트로 들어서면 커다란 창고처럼 보이는 콘크리트 박스 건물 두 개가 보인다. 황인용 뮤직 스페이스 카메라타다. 한국의 대표 건축가 조병수 씨가 설계했다. 두 개의 큐브 중 하나는 황인용 씨의 사적 공간이고 나머지 하나가 음악 감상실인데 약 10m 높이의 두 건물이 나무와 철, 노출 콘트리트로만 구성됐다. 현대적이면서 단순한 외관이 재료의 물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쪽 벽면에는 고낙범 작가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작품이 전시돼 있다. 작가는 각 대상에 대해 그가 갖는 감정과 기억을 근간으로 인물의 정체성을 색채화했다.
한쪽 벽면에는 고낙범 작가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작품이 전시돼 있다. 작가는 각 대상에 대해 그가 갖는 감정과 기억을 근간으로 인물의 정체성을 색채화했다.
내부는 기둥 하나 없이 개방돼 있고 3층 높이의 높은 층고에서 울리는 홀 톤(Hall Tone)은 웅장함을 더한다. 중앙과 한쪽 벽면에는 어디서 본 듯한 스피커가 있다. 기억을 되짚어 보니 이 스피커는 경주에 있는 한국대중음악박물관에서 본 적이 있다. 나머지 한쪽 벽에 2m는 족히 넘어 보이는 크기의 초상화가 강렬하다. 이 작품은 고낙범 작가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다. 227.3×181.8cm의 거대한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작품은 작가가 갖는 감정과 기억을 근간으로 인물의 정체성을 색채화했다. 47개의 의자와 테이블은 모두 스피커 방향으로 놓여있어 마치 오페라 공연의 좌석 같다. 실제로 2004년 개관 후 700회 이상 공연했다. 초창기 퍼커셔니스트 한문경 씨의 공연을 비롯해 최근에는 테너 존 노 씨의 작은 음악회도 열었다.
카메라타는 앙상블블랭크의 ‘현대음악시리즈’, 피아니스트 연정흠의 ‘바흐-슈베르트 사이클’등 아티스트 공연을 꾸준히 기획하고 있다. (사진=황우섭 작가)
카메라타는 앙상블블랭크의 ‘현대음악시리즈’, 피아니스트 연정흠의 ‘바흐-슈베르트 사이클’등 아티스트 공연을 꾸준히 기획하고 있다. (사진=황우섭 작가)
공간에 최적화된 소리를 찾기 위한 20년 가까운 시간카메라타는 아나운서 황인용 씨가 자신이 소장한 LP 음반과 스피커로 꾸린 음악 감상 공간이다. 스피커는 1900년대 초반 극장용으로 제작된 웨스턴 일렉트릭의 스피커와 클랑필름 스피커들이다. 1930년의 미국 극장에서는 이런 사운드를 느꼈을까. 100년 이상의 세월을 보냈지만 잘 관리된 음향 기기와 건물, 정갈하게 정리된 LP 음반에서 주인의 애정이 느껴진다. 20년 가까이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거쳐 공간에 최적화된 사운드를 디자인했다. 공간 구석에는 보드판이 있는데 음악이 끝나면 그가 직접 새로운 음반을 골라 틀고, 앨범과 곡의 이름을 적는다. 제목이 적힌 보드를 유심히 보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카메라타는 이탈리아어로 ‘예술가 집단’을 뜻한다. 음악 감상실에 그치지 않고 전시 작품, 문학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나아가고 있다. 클래식이 흐르는 공간에서 책을 읽고 작품을 감상하거나 글을 쓰는 등 이곳에 오는 방문객들은 예술가가 된다. 카메라타는 올해 ‘카메라타의 서재’라는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매월 마지막 주 일요일 오후에 책을 낭독하면서 책의 내용이나 분위기에 맞는 곡을 감상하는 프로그램이다. 음악 애호가 못지않은 독서 애호가들의 발길을 끄는 기획이다.

입장료는 1만2000원이다. 입장료에는 음료 한 잔이 포함된다. 마시고 싶은 메뉴를 종이 메뉴판에 체크한 뒤 직원에게 전달하면 음료를 만들어 준다. 이제 남은 일은 자리에 돌아와 거대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과 함께 커피 원두를 갈고 탬핑하는 소리,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와 사람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세상의 온갖 짐을 짊어진 듯 무거운 마음도 무색해지고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던 고민이 하찮게 느껴지는 순간, 황홀감을 느끼는 순간이다.
1900년대 초반 극장용으로 제작된 웨스턴 일렉트릭의 스피커와 클랑필름 스피커들. 100년 이상의 세월을 보냈지만 잘 관리 된 음향 기기에서 주인의 애정이 느껴진다. (사진=황우섭 작가)
1900년대 초반 극장용으로 제작된 웨스턴 일렉트릭의 스피커와 클랑필름 스피커들. 100년 이상의 세월을 보냈지만 잘 관리 된 음향 기기에서 주인의 애정이 느껴진다. (사진=황우섭 작가)
삶의 동력은 이런 찰나의 시간이 모여 생긴다. 우리는 몇 초, 몇 분의 감동을 되새김질하며 일상을 버텨 내는 힘을 기른다. 그러니 결국 공간의 힘이란 어느 곳에서 느끼는 의미 있는 순간, 그 순간이 담긴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트렌드 코리아 2023’이 꼽은 10대 키워드 중 하나인 ‘공간력’이 진정으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경험이 주는 가치, 공간과 사람이 통하는 의미가 필요하다.

윤제나 한경무크팀 기자 ze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