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대출 금리 10년 내 최고·회사채 발행도 급감
자회사·부동산·비주력사업 매각해 현금 쌓아
SKC 필름사업 매각해 1.6조 확보

이자 상환 부담이 커지고 회사채 시장에서는 발행액보다 상환액이 더 많은 순상환 상태로 전환하면서 기업들은 현금 보유액을 늘리고 있다. 연합뉴스
이자 상환 부담이 커지고 회사채 시장에서는 발행액보다 상환액이 더 많은 순상환 상태로 전환하면서 기업들은 현금 보유액을 늘리고 있다. 연합뉴스
경기가 하강 국면에 접어들고 기업 경영 지표가 악화하자 기업들이 현금을 쌓으며 유동성 확보에 나섰다. 이자 부담이 늘고 자금 시장 경색으로 돈줄이 마른 상황에서 외부 조달을 하지 않고도 버틸 수 있는 힘은 현금뿐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유상 증자·기업공개(IPO)·회사채 발행으로 운영 자금을 모으던 기업들은 채권 시장이 얼어붙자 은행으로 발길을 돌렸다. 지난 10월 말 기준 은행의 기업 원화 대출 잔액은 1169조2000억원으로 전월 대비 13조7000억원 늘었다. 증가 폭은 2009년 6월 통계를 내기 시작한 이후 10월 기준으로 가장 큰 규모다.

기업 대출로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기업 대출 금리는 5%를 돌파하면서 약 10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한국경제연구원은 계속된 기준금리 인상으로 기업 대출에 대한 연간 이자 부담액이 올해 9월부터 내년 연말까지 최소 16조2000억원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자 상환 부담이 커지고 회사채가 발행보다 상환이 많은 상태가 지속되자 기업들은 투자를 줄이고 부동산과 비핵심 사업을 팔며 현금을 확보하고 있다. 경영의 강조점이 성장에서 생존으로 급속히 이동 중이다.

기업이 현금을 쌓아 두는 이유는 또 있다. 한파가 지나고 경기가 다시 상승 사이클에 접어드는 초입에서는 쌓아 둔 현금이 인수·합병(M&A)으로 경쟁력을 높이고 설비 투자에 나서 생산 능력을 확대할 수 있는 실탄이 된다. 기업에는 또 다른 기회를 준비하는 월동인 셈이다. 12곳 중 10곳 현금 늘어나
현금 쌓는 대기업들…위기는 대비하고 투자 기회는 살리고
주요 업종을 대표하는 상장사 12곳의 3분기 재무제표를 들여다봤다. 이 중 10곳의 현금 보유액이 늘었고 2곳은 차이가 없었다.

현금이 가장 많은 곳은 삼성전자(128조2000억원)였고 지난 1분기 대비 현금 보유 비율을 가장 크게 늘린 곳은 한화솔루션(41%)이었다. 삼성전자는 보유한 현금이 가장 많지만 늘어난 비율은 3.3%로 다른 주요 상장사들과 비교해 적었다.

삼성전자는 보유한 현금으로 다시 시설 투자에 나선다. 3분기 경영 실적 발표에서 회사는 올해 “인위적인 감산은 고려하지 않는다”며 예년보다 늘어난 시설 투자를 예고했다.

삼성전자는 올해 3분기까지 반도체에 29조100억원을 투자했는데 4분기 약 18조원을 더 투입한다. 3분기에는 전년 동기 대비 투자액이 소폭 줄었지만 연간 총 47조7000억원을 투자해 지난해보다 더 많은 투자를 단행할 계획이다.

한진만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부사장은 실적 발표 당시 “인위적인 감산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기본적 방침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며 “현시점에서 수요가 위축된 것은 맞지만 중·장기 관점에서 수요 회복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기업은 주로 감산과 투자 축소에 나섰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작년까지 정보기술(IT) 기기와 데이터센터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호황기를 맞이했지만 팬데믹(세계적 유행) 효과가 끝나고 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이 동시에 닥치는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전방 수요가 줄었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는 1분기와 3분기의 현금 보유액이 모두 5조 3000억원 수준으로 차이가 거의 없었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3분기 이후 현금을 비축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3분기와 비교하면 1년 새 현금 보유 비율이 약 60% 높아졌다.

올해 1분기부터 3분기까지 영업으로 벌어들인 현금은 16조7633억원이었고 투자를 위해 현금 14조5756억원을 지출했다. 지난해 3분기 누적과 비교하면 영업으로 벌어들인 현금은 약 1조7000억원 늘었지만 투자 활동은 약 1조1140억원 줄었다.

4분기와 내년에는 허리띠를 더 졸라맬 것으로 보인다. SK하이닉스는 3분기 경영 실적 발표 자리에서 ‘투자 축소’와 ‘감산’을 언급했다. 삼성전자는 시설 투자 규모를 예년과 비슷하게 유지하며 중·장기적 관점에서 수요 회복에 대비하고 SK하이닉스는 투자를 줄여 메모리 반도체 불황에 대응하겠다는 전략이다.

노종원 SK하이닉스 사업담당 사장은 “내년 투자는 올해 대비 50% 이상 감축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며 “이는 2008~2009년 업계의 시설 투자 절감률에 버금가는 상당한 수준의 투자 축소”라고 말했다.

SK그룹 중 비주력사업을 매각해 현금을 쌓은 기업도 있다. SKC는 지난 2일 사모펀드(PEF)인 한앤컴퍼니에 필름사업부문인 SKC미래소재 지분 100%를 처분하고 1조5950억원의 매각대금을 일시불로 받았다. 이번에 매각한 필름사업은 SKC의 모태다. 1977년 국내 최초 폴리에스터(PET) 필름 개발을 시작으로 2000년대 디스플레이용 필름을 주력 생산하는 등 국내 필름산업을 선도해왔다.

하지만 2차전지와 반도체, 친환경 소재 중심의 비즈니스 모델로 포트폴리오를 재편하고 소재 솔루션 기업으로 도약하고자 매각을 결정했다. 사업 자체만 놓고 보면 성장성이 있지만 회사가 나아갈 방향과 맞지 않는다는 판단에서다. SKC는 지난해 화학·필름 제조사에서 모빌리티 소재사로 사업구조를 전환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 SKC는 탄탄한 현금 유동성을 바탕으로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에 대비하고 미래사업 투자를 본격화할 전망이다.현대차·LG 투자보다 유보에 힘 실어현대차도 당초 9조2000억원이었던 올해 투자 규모를 8조9000억원으로 줄였다. 현금 보유액은 3분기 약 26조원으로 1분기 대비 22% 늘었다.

LG전자 역시 보수적으로 돌아섰다. 1분기 5조6194억원이던 현금은 3분기에 7조5677억원으로 늘면서 35.7% 증가했다. 투자보다 유보에 힘을 실은 결과다.

현금 중심 경영을 선포한 포스코그룹의 현금도 쌓이고 있다. 그룹 지주회사인 포스코홀딩스의 현금 보유액은 1분기 대비 약 9.5% 늘었다.

최정우 포스코그룹 회장이 직접 ‘현금 경영’을 주문하면서 그룹사 전체가 수요 위축과 비용 상승, 공급망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비상 경영에 돌입했다.

최 회장은 지난 10월 그룹 사장단과 전 임원이 참석한 그룹경영회의에서 “복합적인 경제 충격을 선제적으로 대비하기 위해 지금 즉시 그룹 차원의 비상 경영에 돌입한다”며 “특히 현금 흐름과 자금 상황이 문제 되지 않도록 현금 중심 경영을 한층 강화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재계 5위 롯데그룹에는 15조원 정도의 현금이 쌓여 있다. 롯데그룹은 두둑한 현금으로 자회사의 유동성 위기를 해소하고 나섰다.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자금줄이 막힌 롯데건설을 위해서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사재 11억원을 투입하기도 했다.

롯데건설은 유상 증자로 자금을 조달하고 계열사와 금융사에서 돈을 빌리며 최근까지 총 1조4500억원을 확보했다. 금융 시장에서 부동산 PF 대출 만기 연장과 차환이 어려워지면서 선제적 대응에 나섰다는 설명이다.

현대백화점그룹과 효성 등 자회사와 비핵심 자산인 부동산을 매각하며 자금 확보에 나선 기업들도 있다. 효성첨단소재는 울산 언양공장 토지와 건물 등을 1500억원에 처분한다. 회사 측은 “재무 구조 개선과 투자 재원 확보가 목적”이라고 밝혔다.

코오롱인더스트리도 최근 재무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인천공장 토지를 부동산 투자·개발 업체에 550억원에 매각했다. 한진그룹 계열사 칼호텔네트워크는 제주KAL호텔을 950억원에 매각했고 HJ중공업도 인천 서구 원창동 토지와 건물을 770억원에 매각했다. 업계 1위 가구·인테리어 업체 한샘은 서울 상암동 본사 사옥 매각을 검토하고 있다.

금융시장이 경색되면서 자금 조달에 차질이 생기자 국내 대기업 절반 가량은 아직 내년도 투자계획을 마련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이 지난 달 매출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2023년 국내 투자계획을 물은 결과 응답 기업(100개사)의 48.0%가 내년도 투자계획이 없거나(10.0%) 아직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38.0%)고 응답했다.

투자계획을 수립한 52.0%의 내년 투자 규모는 올해와 비슷한 수준이라는 응답이 67.3%로 가장 많았으나 투자 축소(19.2%)가 확대(13.5%)를 웃돌아 내년 투자 실적이 전반적으로 부진할 것임을 시사했다.

투자 규모를 늘리기 어려운 이유로는 금융시장 경색 및 자금조달 애로(28.6%)가 가장 많이 꼽혔고, 이어 원·달러 환율 상승(18.6%), 내수시장 위축(17.6%) 등 순이었다.

추광호 전경련 경제본부장은 “최근 금리인상에 따라 시중유동성이 축소되는 상황에서, 내년에 경기침체가 본격화될 경우 기업들은 수익성이 악화되고 투자자금 조달에 상당한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라며 “기준금리 인상 속도를 조절하고 적극적인 금융시장 안정대책을 사전에 강구해 자금시장 경색을 미연에 방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