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후 기술 기업 - 수퍼빈
[ESG 리뷰] 기존의 선형 경제(linear economy)에서 폐기물은 재활용되는 것보다 매립되고 소각되는 것이 당연하다. 원료를 가공해 만든 생산품을 소비하고 버려야 소비자가 새 상품을 다시 구매하고 시장이 돌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갈수록 심각해지는 환경 오염 문제는 이 같은 선형 경제 모델이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안으로 등장한 순환 경제(circular economy) 모델은 이미 생산된 물건을 회수, 가공해 재활용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선형 경제에서 순환 경제로 전환되면서 폐기물이 새로운 자원으로 각광받고 있다.수퍼빈은 바로 버려진 폐기물에서 자원을 뽑아 내는 회사다. 그중에서도 페트병과 캔에 초점을 맞춘다. 인공지능(AI) 쓰레기통인 네프론을 활용해 페트병과 캔을 수거한다. 소비자가 네프론에 폐페트병과 캔을 넣으면 자동 스캔과 분류를 거쳐 개당 10포인트의 포인트를 제공한다. 포인트는 2000점 이상이면 현금화할 수 있다.
수퍼빈은 앞으로 이렇게 수거한 폐기물을 2023년 초 가동 예정인 경기도 화성의 자체 폐기물 처리 공장 ‘아이엠팩토리’에서 재자원화할 예정이다. 페트는 세척 과정을 거쳐 잘게 쪼갠 후 플라스틱 플레이크로 만든다. 플레이크는 화학 공정에 투입되는 원료다. 고철은 따로 모아 압축한다. 수퍼빈은 이 플레이크와 고철을 석유화학 회사나 펄프·유리·철강 회사 같은 생산자에게 공급해 자원 순환을 돕는다. 자원 순환 고리에서 꼭 필요한 중간자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선별 수거로 더 깨끗한 자원 확보
김정빈 수퍼빈 대표는 기자에게 쓰레기 선별장에 가 봤느냐고 물은 뒤 화면에 사진을 띄웠다. 시꺼멓게 이물질이 묻은 페트를 압축해 놓은 사진이다. 여러 쓰레기를 따로 분리하지 않고 모두 선별장으로 가져오는 데다 서로 뒤섞이는 과정에서 이물질이 묻기 때문에 아무리 잘 선별해도 플라스틱에 불순물이 섞인다. 이렇게 오염된 플라스틱은 아무리 잘 가공해도 재활용할 수 있는 플라스틱 플레이크가 되기 어렵다.
“쓰레기 선별장으로 가는 페트병은 따로 분리되지 않고 다른 물질과 섞입니다. 이렇게 가면 재활용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처음부터 선별 수거가 중요합니다. 한국에서 플라스틱 플레이크를 만들어도 품질이 낮은 이유죠.” 김 대표의 말이다.
수퍼빈은 선별 수거를 위해 네프론이라는 스마트 수거함을 개발했다. 네프론은 3차원 물체를 인식하는 AI를 기반으로 소비자가 넣은 폐기물의 재활용 여부를 판독하고 보상을 진행하는 분리 수거 쓰레기통이다. 폐기물은 수거 단계부터 잘 선별되고 혼입되지 않아야 품질을 높일 수 있다. 네프론은 자원의 형태나 바코드가 훼손돼도 식별할 수 있고 딥러닝 기술을 탑재해 식별 과정에서 스스로 학습해 정확도를 더욱 높인다. 이렇게 수거한 자원은 빅데이터로 관리되고 원격 제어된다. 수거함이 차면 물류차로 옮겨 물류 창고에 보관한다.
수퍼빈은 소비자에게 폐기물을 매입해 보상을 지급하는 현재 모델을 2016년 처음 선보였다. 보상을 위해 페트병을 모아 네프론에 지정 수거하는 이도 늘면서 ‘쓰테크(쓰레기+재테크)’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재활용도 돈이 되고 놀이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만들어졌다. 현재까지 수퍼빈 사용자는 31만 명에 달한다. 이미 독일 등 유럽 선진국에서는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기반으로 한 이 같은 보상 수거함이 보편화돼 있다.
네프론은 기업 사옥 내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네이버 제2신사옥 전층과 삼성디스플레이·삼성바오로직스·LG전자·SK이노베이션을 비롯해 SK가스·세븐일레븐·KB국민은행 등에 도입됐다. 초창기에는 지자체와 공공 기관을 중심으로 네프론이 도입됐지만 기업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이 활발해진 최근에는 기업의 러브콜이 많은 편이다. 자원 순환의 가치를 기업들이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만큼 네프론이 확보할 수 있는 깨끗한 자원의 양도 늘어났다. 현재 네프론의 설치 대수는 650여 대, 월평균 처리하는 폐기물 양은 200톤에 달한다. 현재 수퍼빈은 네프론 판매·대여 및 유지·보수비를 주요 수익원으로 삼고 있다. 고순도 플레이크 제조 실험
경기도 화성에 들어선 1만3000㎡(약 4200평) 규모의 플라스틱 플레이크 생산 공장은 수퍼빈의 미래다. 현재 정식 가동을 위해 인허가 절차를 밟고 있다. 수퍼빈은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의 도움으로 플라스틱 플레이크 플랜트를 시험 운영한 뒤 플라스틱 플레이크 공장 신설을 계획했다. 공장의 플라스틱 플레이크 생산량은 연간 1만 톤 규모이고 수율을 고려하면 월 800톤에서 900톤 정도를 생산하게 된다. 향후 전국적으로 생산 라인을 3개까지 늘려 3만 톤까지 확장하는 것이 목표다. 이렇게 되면 플레이크 제조, 판매가 새로운 수익 모델이 된다.
2023년 초 공장 가동이 시작되면 수퍼빈은 단일 기업으로는 세계 최초로 순환 경제 사이클을 완성한 사례가 된다. 고순도 플라스틱 플레이크는 같은 무게의 플라스틱 쓰레기 뭉치보다 5~6배 이상 비싼 kg당 1500~1800원에 거래돼 경제성이 높다. 수퍼빈은 환경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영국 왕실 재단의 어스샷 프라이즈(earthshot prize)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김 대표는 “이론적으로만 설명된 순환 경제를 한 기업 내에서 실제로 구현해 내는 사례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예전에는 한국에서 A급 플레이크를 만들어 내지 못해 일본에서 매년 1조원어치의 플레이크를 수입해 왔지만 ‘쓰레기를 수입한다’는 비난 여론에 수입이 중단된 바 있다. 재생 플레이크를 필요로 하는 한국 기업에 수퍼빈 같은 업체가 고순도 플레이크를 생산해 공급하면 서로에게 윈-윈이 된다. 특히 2023년부터 한국에서 페트를 제조할 때 재생 원료 사용이 의무화된다. 2030년까지 재생 원료 비율을 30% 이상으로 높여야 한다. 폐플라스틱의 몸값이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한국의 3대 화학회사인 롯데케미칼·SK지오센트릭·GS칼텍스가 모두 수퍼빈의 주주다. 현재 수퍼빈은 플라스틱 플레이크 샘플을 기업에 보내 피드백을 받고 있다. 그동안 한국에서 폐기물이 제대로 재활용된 적이 없기 때문에 최적의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컬러나 조직 등 여러 차원에서 검증 작업을 벌이고 있다. 또 기업들이 의견을 수거 단계에도 반영해 시스템을 고도화하고 있다.
최근 시리즈B 브리지 투자 유치를 마무리한 수퍼빈은 화성에 이어 호남 지역에 제2 사업장을 추진한다. 제2 사업장에서는 페트병 등 플라스틱을 플레이크로 재가공하는 공정 외에 펠릿(pellet) 공정도 추가해 생산 후 물류비용 감소, 자체 수요 물량 확보 등이 가능한 연속 공정을 구축할 계획이다. 현재는 플레이크를 기업에 제공하면 기업에서 한 번 더 펠릿 공정을 거쳐야 한다. 이에 따라 펠릿 공정까지 수퍼빈이 맡게 되면 순환 경제 사업 모델의 완성도를 더욱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 순환 경제를 위한 비즈니스 모델을 구체화하고 있다. 아디다스는 2018년부터 플라스틱 폐기물로 운동화를 만들고 있다. 에비앙은 2025년까지 재활용된 병으로만 신규 상품을 제조하겠다고 선언했다. 코카콜라도 2025년까지 모든 음료 용기를 100% 재활용할 수 있는 친환경 패키지로 교체한다. 효성티앤씨는 페트병으로 만든 리사이클 원사를 패션 업체에 납품하고 있다. 순환 경제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기업들이 처음부터 재활용을 염두에 두고 제품을 생산하고 재활용된 원료를 사들이기 시작하면 수퍼빈의 역할은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쓰레기 선별장에서 본 꿈
수퍼빈의 김정빈 대표는 한국의 대기업과 컨설팅 회사에 근무하다가 30대에 철강회사 최고경영자(CEO)를 거친 입지전적 인물이다. 이후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로 활동하다가 창업에 나섰다. 예전에 근무한 회사에서 인공지능(AI) 기반의 폐기물 수거함을 도입했던 기억을 살려 많은 시행착오 끝에 네프론을 개발했다. 네프론은 우리 몸에서 노폐물을 걸러 주는 신장의 가장 작은 기능 단위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네프론을 통한 선별 수거에서 플라스틱 플레이크 제조로 발을 넓히게 된 데는 계기가 있었다. 초기에 주로 지방자치단체에서 네프론을 많이 도입했는데, 그때 이명희 구미시 계장을 만났다. 이 계장과 함께 선별장에 처음 가 본 김 대표는 각종 폐기물이 뒤섞인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이 계장은 “누군가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이 일을 계기로 ‘순환 경제 설계자’라는 더 큰 꿈을 갖게 됐다. 깨끗이 수거만 하면 재활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달랐다. 김 대표는 ‘수거 이후’를 생각하는 넥스트 스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김 대표는 ‘순환 도시’의 설계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순환 경제가 제대로 실현되려면 도시 설계 단계부터 폐기물을 재활용하는 인프라가 포함돼야 한다. 즉 순환 경제 인프라가 도로나 상하수도 같은 도시 기반 시설이 돼야 한다. 그래야 폐기물에서 재활용할 수 있는 것을 효율적으로 회수하고 소각과 매립을 줄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탄소 제로 사회로 가는 길이다. 수퍼빈은 이러한 도시를 설계하는 설계자가 되는 것이 목표다.
“앞으로 폐기물 가공 기술이 발전하려면 장치 산업이나 과학기술이 더 발전해야 합니다. 수퍼빈은 이 발전 과정에 함께하고 싶습니다. 언젠가는 99%의 폐기물이 클로즈드 루프(closed loop) 안에서 소화되길 바랍니다.”
구현화 기자 kuh@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1413호와 국내 유일 ESG 전문 매거진 ‘한경ESG’ 1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더 많은 ESG 정보는 ‘한경ESG’를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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