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집 막내아들’·‘작은 아씨들’·‘금수저’를 시청하며 ‘기회’를 꿈꾸는 사람들

드라마 재벌집 막내 아들 / 자료=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 아들 / 자료=jtbc
“이번 생은 나에게 기회다.”

자신 있게 이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란 자조적인 신조어가 유행하는 시대에 기회는 멀고 먼 얘기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진도준(송중기 분)이 하는 이 말을 들으면 부러움과 동시에 묘한 쾌감을 느끼게 된다. 가난한 전생에서 벗어나 재벌집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마음껏 누리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진도준을 통해 이를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짜릿하다. 드라마가 시청률 24%를 돌파하며 많은 인기를 누린 비결엔 시청자의 이런 욕망을 대신 구현해 주는 대리 만족의 영향이 크다.

욕망을 수면 위로 끄집어 내 정면으로 다루는 콘텐츠가 잇달아 나오고 있다. ‘재벌집 막내아들’뿐만 아니라 tvN 드라마 ‘작은 아씨들’, MBC 드라마 ‘금수저’ 등 다양한 작품들이 돈과 계급 등을 둘러싼 인간의 욕망과 갈등을 다루며 호평을 받았다. 욕망을 다루는 작품들이 늘어나고 사랑받는 이유는 뭘까.
현실에 두 발을 단단히 붙인 판타지
물론 이전에도 욕망을 그린 국내외 작품들이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도도 높은 편이었다. 영화 ‘돈’,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대부분 증권맨과 같은 특정 직업군과 이야기를 다루는 정도에 그쳤다. 최근엔 한 발 더 나아가 일반 회사원부터 기업 오너까지 다양한 캐릭터와 소재를 활용해 욕망을 다루는 작품들이 나오고 있다.

이 드라마들엔 공통점이 있다. 작품 곳곳에 판타지적 요소가 강하게 깃들어 있다. 본래 콘텐츠 자체가 현실에 상상력을 가미해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현실보다 허구에 훨씬 가까운 내용들을 담고 있다. 그 허구의 핵심 내용은 가난했던 드라마 주인공들이 갑자기 부자가 될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 현실에선 거의 찾아보기 힘든, 상상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아닌가.

‘재벌집 막내아들’은 아예 ‘회귀물’이라는 판타지 장르를 전면에 내세웠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한국의 대표 기업 순양그룹의 머슴처럼 일하던 윤현우는 누군가에 의해 살해된다. 그리고 과거 1987년으로 회귀해 순양그룹 회장의 막내 손자 진도준으로 태어난다. 심지어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현생을 살아가는 능력까지 주어졌다. 그 덕분에 진도준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와 정보기술(IT) 버블, 각 대선 결과 등 대한민국의 굵직한 경제·정치·사회적 사건을 꿰뚫어 보고 이를 자신의 성장 발판으로 적극 활용한다. 그야말로 판타지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금수저’는 우리 사회에 팽배한 ‘수저 계급론’에 판타지를 가미했다. 가난한 주인공이 우연히 얻게 된 금수저로 밥을 먹고 나면 흙수저였던 인생이 갑자기 금수저로 탈바꿈한다는 내용이다. 수저 계급론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곧 자식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되며 그 지위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차가운 현실을 담고 있다. 그런 현실과 정반대로 수저 하나만 잘 이용하면 지위를 바꿀 수 있다는 드라마 설정은 호기심을 한껏 자극한다.

‘작은 아씨들’은 두 작품처럼 장르 자체를 판타지로 가져 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 자체는 상상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가난한 세 자매에게 갑자기 700억원이란 엄청난 거액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판타지보다 더 꿈처럼 느껴지는 얘기가 아닌가.
그렇게 이 드라마들은 대중의 이루지 못한 욕망과 꿈을 가득 담아 투영한다. 하지만 그저 환상만으로 그쳤다면 큰 공감을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작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독히도 현실에 두 발을 단단히 붙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재벌집 막내아들’엔 재벌까지는 되지 못하더라도 앞날을 미처 내다보지 못해 놓쳐 버린 수많은 기회의 사다리에 대한 대중의 아쉬움이 뒤섞여 나타난다. 분당 땅을 사고 아마존 주식을 사 많은 시세 차익을 남긴 진도준을 보고 있자면 ‘그때 그 땅을 샀더라면’, ‘그때 그 주식을 샀더라면’이라고 한탄하던 평소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작은 아씨들’과 ‘금수저’에도 현실 속 극심한 빈부 격차, 사회 곳곳에 만연한 가난에 대한 냉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난하게 자랐어? 하도 잘 참아서.”(‘작은 아씨들’) “인간은 평등하다. 하지만 모두 알고 있다. 평등은 교과서 속에만 있다는 것을. 이곳 대한민국은 계급 사회다.”(‘금수저’)
어두운 ‘평균 실종’ 사회에 건네는 위로
드라마 작은 아씨들 / 자료 tvn
드라마 작은 아씨들 / 자료 tvn
욕망을 그린 콘텐츠들의 방영과 인기는 그만큼 욕망이 주요 화두가 됐다는 것음을 보여준다. 콘텐츠는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돼 왔다. 드라마뿐만 아니라 영화·예능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은 대중의 내면을 파고들어 적극 반영해 왔다. 힐링·자존감·욜로(현재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며 소비하는 태도) 등을 내세운 콘텐츠들이 쏟아지고 인기를 얻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런 흐름을 지나 새롭게 도착한 지점이 욕망이란 사실은 왠지 씁쓸하게 느껴진다.

돌이켜 보면 최근 몇 년 사이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자주 욕망을 표현하고 드러냈다. 누군가와 만났을 때, 심지어 낯선 사람들끼리 만났을 때도 어느 순간 대화는 자연스럽게 부동산·주식·코인 이야기로 흘러갔다. 그리고 한 테이블에 같이 앉아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양분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세 가지를 적절히 활용해 수익을 낸 사람, 이 기회를 놓치고 수익을 내지 못한 사람으로 말이다. 평소엔 멀게 느껴졌던 사회의 양극화가 지금 우리가 있는 테이블의 양극화 문제가 될 만큼 누구나 가깝게 체감할 수 있는 이슈가 된 것이다.

앞으로 이런 분위기는 보다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저서 ‘트렌드 코리아 2023’에서 2023년 주요 트렌드로 ‘평균 실종’을 꼽는다. 소득의 양극화로 시장의 승자 독식 구조가 굳어질 것으로 봤다. 이에 따라 평균의 개념도 사라지고 정치·사회 등 전 분야에 걸쳐 양극화 현상이 확산될 것으로 예측했다.

어두운 터널을 걸으며 ‘이생망’을 되뇌는 사람들에게 콘텐츠는 현실을 비추는 데 그치지 않고 위로를 건넨다.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진도준이 재벌가 사람들의 방해에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며 실력을 인정받는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용기를 선사한다. 경기 침체와 저성장 국면에서 갈수록 커지는 불안을 다독이는 역할도 한다. 한국 주요 기업들의 굵직한 역사를 한데 모아 펼쳐 놓으며 향수를 자극하는 식이다. 사람들은 국내외 시장을 넘나들며 빠르게 성장했던 기업의 과거를 보며 다시 작은 희망을 품어 보기도 한다.

최근엔 콘텐츠가 사람들의 욕망을 표출하는 그릇이자 통로가 되고 있기도 하다. 영상 플랫폼의 새로운 주도권을 갖게 된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의 콘텐츠가 대표적이다. 이들의 콘텐츠는 방송사 제작진 등이 선보이던 기존 작품들과 사뭇 다르다. 자신의 평소 관심과 취미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다양한 욕망을 더하고 뒤섞어 만들었다. 자신만의 콘텐츠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어 하는 욕망, 이를 통해 수익까지 창출하고자 하는 욕망이 함께 흐른다.

그리고 그 힘은 막강한 파급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의 욕망에 화답하듯 많은 관심과 자금이 이곳에 몰리고 있다. 크리에이터 개개인의 욕망이 파노라마처럼 나열되는 거대한 플랫폼 유튜브는 전 세계 이용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기업들의 광고비도 크리에이터에게 흘러가고 있다. 누구나 콘텐츠를 통해 욕망을 표출하고 실현할 수 있다는 점은 다른 사람들의 욕망도 자극하고 있다. 수많은 이들이 자신도 유튜버가 돼 이 욕망을 펼칠 꿈을 꾸고 실제 준비도 하고 있다.

기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듯 느껴지는 시대와 사회. 그러나 콘텐츠는 이를 위로하는 동시에 잠재 욕망을 깨운다. 세상을 향해 당당히 그 욕망을 실현할 기회를 부여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찰리 채플린이 직접 제작한 영화 ‘라임라이트(1952년)’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인생은 욕망이지 의미가 아니야. 욕망이야말로 삶의 원동력이지. 그래서 장미는 장미대로 꽃을 피우고 싶어 하고 바위는 언제까지나 바위답게 있으려고 노력하는거야.”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해서 앞으로도 기회가 영영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무기력하게 있을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콘텐츠는 사람들의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끌어올린다. 이번 생은 결코 망하지 않았다고 다독이며….

김희경 한국경제 문화부 기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