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 문화 혁신 위해 시작된 호칭 파괴, 임원·CEO까지 확산
직급 체계 개선 및 상호 존중 노력도 필요

[비즈니스 포커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022년 9월 13일(현지 시간) 삼성전자 파나마법인에 방문해 직원들과 기념 촬영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제공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022년 9월 13일(현지 시간) 삼성전자 파나마법인에 방문해 직원들과 기념 촬영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에서 ‘회장님’, ‘사장님’, ‘상무님’ 등의 호칭이 사라진다. 그간 직원에게만 적용되던 수평 호칭을 경영진과 임원에게까지 확대했다.

삼성전자 경영진을 포함한 임직원은 앞으로 영어 이름이나 영문명의 이니셜(앞글자), 한글 이름에 ‘님’을 붙이는 등 상호 수평적 호칭만 사용해야 한다. 이재용 회장은 영문 이니셜인 ‘JY’ 또는 ‘재용님’, 한종희 DX부문장(부회장)도 ‘JH’, ‘종희님’으로 부르는 식이다.

삼성전자는 2016년부터 수평 호칭 제도를 시행해 왔다. 인사 제도 개편을 통해 직급도 기존 7단계(사원 1·2·3, 대리, 과장, 차장, 부장)에서 4단계(CL1~CL4)로 단순화했다. 연공서열을 타파하고 수평적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다.

제도가 자리 잡기까지 우여곡절도 있었다. 직원들이 타 부서 동료를 만날 때 사내망에서 부장·차장 등 직급을 찾아보고 기존 직급으로 소통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직원 간 수평 호칭이 정착됐다는 판단으로 경영진과 임원에게까지 확대 적용한 것이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사진=한국경제신문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사진=한국경제신문
20년 전부터 수평 호칭…CJ·아모레는 안착

최근 근속이나 연공에 근거한 보상에서 역량 수준과 직무에 근거한 보상 제도가 확산되면서 ‘사·대·과·차·부(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 등 기존 직급 체계를 간소화하거나 ‘님’ 또는 ‘프로’, ‘매니저’로 단일화하는 추세다. 역량을 근거로 하는 기업은 선임·책임·수석 등의 호칭을 쓰고 있다.

KT&G도 올해 2월부터 호칭을 ‘프로’로 쓰고 있다. 대기업들의 호칭 파괴 바람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전통 제조 기업에서 미래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으로 변신 중인 현대차는 2019년 직급을 기존 5단계에서 ‘매니저’와 ‘책임매니저’ 등 2단계로 줄이고 임원 직급 체계도 상무·전무로 통일했다.

자유롭고 유연한 조직 문화를 만들기 위해 2006년 임원을 제외한 모든 직원 간 호칭을 ‘매니저’로 통일했던 SK텔레콤은 2018년부터 모두 ‘님’으로 통일했다. 사원도 임원도 모두 SK텔레콤에선 ‘님’이나 자신이 원하는 영어 이름으로 불린다.

SK하이닉스는 기술사무직 호칭을 ‘TL(기술 리더)’로, SK이노베이션은 수직적인 문화를 파괴하고 상하 관계의 벽을 허물기 위해 직급 체계를 2021년부터 ‘PM(프로페셔널 매니저)’으로 부르고 있다. 신입 사원부터 부장까지 PM으로 불린다. 스스로 업무를 완결적으로 관리하는 프로페셔널한 구성원이 되자는 의미가 담겼다.

광고회사는 창의적 아이디어가 중시되는 업의 특성상 자유롭고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구축하기 위해 일찍부터 수평 호칭을 쓰고 있다. 대홍기획은 ‘쌤’으로, 제일기획은 ‘프로’로 부른다.

CJ그룹은 대기업 호칭 파괴의 효시로 꼽힌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 이후 기업 간 생존 경쟁이 치열하던 당시 조직의 창의성을 끌어올리기 위한 방편으로 대기업 최초로 수평적 호칭을 도입했다. 2000년 1월부터 부장·과장·대리 등 직급 호칭 대신 이름에 ‘님’을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임직원들은 공식 석상에서 이 회장을 호칭할 때도 ‘이재현님’으로 부른다.

이 회장은 ‘님’ 문화 도입 당시 어색해하는 임직원들이 빠르게 수용할 수 있도록 스스로 ‘이재현님’으로 호칭하도록 독려하면서 수평적 소통 문화의 안착을 이끌었다.

CJ그룹은 2021년 말부터 수평 호칭 적용을 임원으로 확대해 기존 상무대우·상무·부사장대우·부사장·총괄부사장·사장 등 6단계로 나뉘었던 임원 직급을 ‘경영리더’로 단일화하기도 했다. 아모레퍼시픽도 2002년 7월부터 사장·팀장·부장 등 모든 직위 호칭을 없애고 ‘님’ 호칭을 도입해 성공적으로 안착한 사례다.
‘JY·종희님’ 호칭 쓰는 삼성…‘사대과차부’ 지고 ‘님프매’ 뜬다
‘실리콘밸리처럼…’ CEO도 계급장 뗀다

수평 호칭 정착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경영진부터 솔선수범해 장기간 유지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구광모 LG 회장은 취임 이후 임직원들에게 사내 호칭을 회장 대신 ‘구 대표’로 불러달라고 당부했다. 무거운 총수 이미지를 벗고 직원들과 격의 없는 소통을 중시하며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구 회장의 실용주의 경영 철학을 보여주는 예다.

권영수 LG에너지솔루션 부회장도 수평적이고 유연한 조직 문화를 만들기 위한 호칭의 중요성을 중시한다. 자신의 사내 호칭을 ‘권영수 님’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했고 온라인 채널 ‘엔톡’을 개설해 임직원과 직접 소통하고 있다.

권 부회장은 취임 이후부터 ‘임직원들이 출근하고 싶은 회사, 일하기 좋은 회사로 만들겠다’고 강조한 만큼 조직 문화 혁신에 힘쓰고 있다. 전체 임직원의 80%가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인 LG에너지솔루션은 복리 후생과 자유로운 근무 환경, 수평적 문화가 정착돼 취업 준비생들 사이에서 입사하고 싶은 회사로 손꼽힌다.

김준 SK이노베이션 부회장은 최근 신입 사원 대면 연수에 참석해 ‘쭌선배’라는 호칭을 자처했다. 신입 사원들에게 격의 없이 다가가기 위해서다. 기업 문화 개선 노력에 힘입어 SK이노베이션이 최근 입사한 신입·경력 사원 700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 조사에서 ‘수평적이고 자율적인 기업 문화’가 입사 결정 이유 1위였다.

영어 이름을 쓰는 최고경영자(CEO)도 늘고 있다. 최태원 SK 회장은 2022년 3월 SK텔레콤 회장에 공식 취임한 후 사내 인공지능(AI)사업팀원들과 타운홀 미팅을 열고 소통과 실행력을 강조하며 자신의 영어 이름인 ‘토니(Tony)’로 불러 달라고 요청했다. 김상현 롯데 유통군 총괄대표(부회장)도 임직원들에게 자신의 영어 이름인 ‘샘(Sam)’으로 불러 달라고 요청했다.

재계에서 영어 이름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미래이니셔티브센터장)다. ‘브라이언(Brian)’이 그가 사내에서 쓰는 영어 이름이다. 카카오 임직원은 모두 영어 이름을 사용하는데 수평 호칭 도입의 성공 사례로 손꼽힌다.

카카오의 호칭 제도는 입사 1년 차 신입 사원도 CEO에게 “브라이언, 제 의견은 다르다”고 말할 정도로 편하게 다른 생각을 표출할 수 있는 조직 문화를 만든 일등 공신으로 꼽힌다.

책임 소재 불분명…카카오·네이버 임원 부활

기업의 특성과 전략에 따라 폐지했던 임원 직급을 부활시키는 곳도 있다. 수평적 문화를 지향하며 2017년 임원 직급을 폐지했던 카카오는 덩치가 커진 조직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2019년 ‘책임 리더’라는 이름으로 부활시켰다.

네이버도 카카오와 같은 이유로 2017년 임원 직급 폐지했지만 조직 체계화, 경영 효율성을 이유로 2년여 만인 2019년 ‘책임 리더’라는 이름으로 임원 직급을 부활시킨 바 있다. 회사가 커지면서 각 조직의 권한·책임의 분산 문제가 불거졌고 해당 업무 부문을 관장하고 책임지고 이끌 임원 직급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다.

수평 호칭 제도와 직급 체계 변경만으로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조성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시각도 있다. 일각에선 연차가 10년 이상 나는 선배에게 ‘○○님’이라고 부르기 쉽지 않아 대부분 호칭을 부르지 않거나 사내 메신저로만 소통하게 됐다는 부작용을 호소하기도 한다.

말단 직원들의 창의성이 나오기 힘든 관료적 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수평 호칭 제도를 도입했지만 구성원의 저조한 참여와 뿌리 깊은 위계질서 문화를 없애지 못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업계 관계자는 “결국 경영진과 구성원의 적극적인 동참, 상호 존중 문화, 리더들의 일하는 방식 변화, 직급 체계 개선 내재화 등의 노력이 수반돼야 수평적 조직 문화 구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