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대부분 갚지 않기를 선택…케인스가 지적한 두 가지 ‘문제’ 풀어야
[이정흔의 쉬운 경제][편집자 주 = 매일 수많은 경제 기사가 쏟아집니다. 수많은 기사를 읽고 나면 경제 이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 꺼풀만 더’ 들어가면 잘 모르는 경제 지식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작은 시도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복잡한 경제 이슈와 그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누구도 물어보지 않는 아주 사소한 경제 지식부터 공부해 보기로 말입니다. 때로는 경제학적으로 역사적인 사건의 한 대목을, 때로는 경제학에 큰 획을 그은 경제학자들과 같은 사람의 이야기로 ‘오늘의 경제’를 공부해 보는 건 어떨까요. ] 31조3810억 달러. 우리 돈으로는 약 3경8755조5350억원에 달하는 금액이라고 합니다. 숫자만 들어서는 얼마나 많은 액수인지 감도 안 잡힐 만큼 어마어마한 금액, 바로 미국 정부가 지고 있는 ‘나랏빚’입니다. 요즘 미국이 이 ‘나랏빚’ 문제로 시끌시끌합니다.
지난 1월 13일 재닛 옐런 미 재무부 장관이 의회에 서한을 보냈습니다. “정부 부채가 상한선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며 “부채 한도 확대나 한도 적용 유예”를 요청하는 내용이었죠. 이에 미 재무부는 1월 19일 한도 이상의 신규 차입을 피하기 위한 특별 조치를 시행했는데 오는 6월 초까지가 시한입니다. 다시 말해 이 기간 동안 의회가 부채 한도 증액 합의에 실패하고 이자를 갚지 못한다면 사상 초유의 ‘미국 채무 불이행(디폴트)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결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현재 민주당의 조 바이든 대통령은 조건 없는 부채 한도 상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수당인 공화당은 지출 삭감을 우선적인 조건으로 내세우며 대립각을 세우고 있죠. 이 때문에 현재로서는 협상이 꽤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결국 미국의 정부 부채 한도는 상향될 것이고 미국이 부도가 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궁금합니다. 지금 미국이 정부 부채 한도를 올려 디폴트 사태를 막는다고 해도 천문학적인 나랏빚을 그대로 둬도 괜찮은 것일까요. 이 어마어마한 빚을 갚을 수는 있는 걸까요.
재정 적자(budget deficit)와 국가 부채(national debt)의 차이는
미국 정부 부채가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증가한 데는 지난 3년간 코로나19 사태의 영향이 절대적입니다. 코로나19 발생 전인 2019년 미국 정부 부채는 22조7190억 달러 수준이었지만 2020년부터 2022년까지 3년간의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이 금액은 27조7480억 달러(2020년), 29조6170억 달러(2021년), 30조8240억 달러(2022년)까지 치솟게 됩니다.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 기간 동안 경기 부양을 위해 지출을 대폭 늘린 데다 경제 활동이 어려워진 개인과 기업들에 상당히 후한 구제 금융 정책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2020년 초부터 현재까지 늘어난 정부 부채 규모만 약 8조 달러, 우리 돈으로 1경원을 넘어서는 금액을 쓴 셈입니다.
사실 팬데믹을 거치며 나랏빚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늘어난 곳은 미국뿐만이 아닙니다. 일본·영국·중국·한국도 예외는 아니죠. 2022년 12월 기준 일본의 정부 부채는 약 1290조 엔(9조8000억 달러)으로 추산됩니다. 영국은 2022년 기준 2조4367억 파운드(2조7255억 달러), 중국은 약 46조 위안(1조1887억 달러)의 정부 부채를 기록하고 있죠. 한국의 정부 부채 또한 2022년 1068조3000억원을 기록하며 사상 처음으로 ‘1000조원’을 넘어서기도 했습니다. 팬데믹이라는 예상하지 못한 재난 상황에서 경기에 미치는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확장적인 재정 정책을 써 왔습니다. 이에 따라 지난 3년간 나랏빚이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늘어나게 된 것이죠.
흔히 나랏빚을 비교할 때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을 많이 인용합니다. 각 국가마다 재정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단순히 금액을 비교하기보다 각 국가마다 재정적인 여력을 비교해 얼마나 감당할 만한 수준의 부채를 갖고 있느냐가 더 정확한 수치라는 것입니다. 단순 정부 부채의 규모로 보면 미국이 압도적인 1위입니다. 하지만 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로 보면 가장 위험한 나라는 일본입니다. 미국의 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은 2019년 79%에서 2022년 123.4%로 뛰었습니다. 2019년 198%였던 일본의 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은 2022년 기준 265%로 전 세계 1위입니다.
이쯤에서 조금 더 근본적인 내용을 짚고 넘어가 볼까 합니다. 정부가 나라 살림을 꾸리기 위해서는 당연히 돈이 들어갑니다. 정부가 이 돈을 얻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이 내는 ‘세금’입니다. 정부는 이렇게 거둬들인 수익을 다양한 곳에 사용합니다. 그런데 가끔 정부가 지출한 금액이 수익을 넘어설 때도 있습니다. 특히 전쟁이나 코로나19 사태와 같은 상황이라면 정부의 지출은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가 ‘세금’을 통해 얻은 수익보다 더 많은 금액을 지출하는 상황을 ‘재정 적자(budget deficit)’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정부는 이때 수익을 넘어선 지출을 위해 필요한 돈을 어떻게 구하는 걸까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정부는 보통 돈을 빌려옵니다. ‘국가 부채(national debt)’죠. 그러면 정부에 이와 같은 돈을 빌려주는 곳은 어디일까요. 은행·연기금과 같은 금융회사들이나 심지어 다른 나라에서 돈을 빌려 오기도 합니다. 이때 돈을 빌려준 기관들에 발행하는 것이 바로 ‘채권’입니다. 흔히 나라에서 발행한 채권은 ‘국채’라고 부르죠. 정부가 이 국채를 갚아야 하는 시기는 짧게는 1개월부터 길게는 몇 십 년 뒤까지 천차만별입니다.
천문학적인 ‘나랏빚’, 갚지 않아도 괜찮을까?
이 빚을 갚으려면 정부는 돈이 필요합니다. 이때 정부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더 많은 빚을 내거나’ ‘공공 지출을 줄이거나’ ‘세금을 올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중 어느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이때 공공 지출을 줄이는 것도 위험 부담이 있지만 특히 세금을 올리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인기 있는 정책이 아니기 때문에 다음 선거에서 표를 잃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정부는 ‘빚을 안 갚기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만기가 돌아와 정부가 갚아야 하는 채권은 계속 생겨나겠죠. 하지만 정부는 더 많은 신규 채권을 발행해 빚을 낼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이 빚을 제대로 갚는 정부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코로나19 사태와 같은 상황에서 재정 적자가 매우 커졌음에도 ‘공공 지출을 줄이거나’ ‘세금을 올려’ 빚을 갚기가 힘든 상황이라면 정부는 더 많은 ‘나랏빚’을 쌓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렇다면 정부가 이 ‘나랏빚’을 갚지 않은 채 계속 지출을 늘려 가도 괜찮은 것일까요. 이때 가장 자주 소환되는 경제학자는 다름아닌 존 메이너드 케인스입니다. 정부가 돈을 빌려 써서는 안 된다는 전통 경제학에 반기를 든 인물이죠. 케인스는 경제가 불황일 때 정부가 ‘빚을 늘려’ 공공 지출을 높이고 이를 통해 경기를 활성화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이때 빌린 돈은 경기가 호황일 때 갚으면 되는 것입니다.
케인스는 1930년대 대공황이 한창일 무렵 영국과 미국 등 많은 서구 국가들에서 실업률이 10% 이상 치솟았을 때 이에 맞서기 위해 “때로는 정부가 적자 재정을 무릅쓰는 과감한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케인스의 이와 같은 주장은 코로나19 사태 때 많은 국가들이 경기를 촉진하기 위해 ‘나랏빚’을 늘렸던 근거가 됐죠.
하지만 케인스 또한 ‘나랏빚’이 과도하면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고용, 일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 이론’에서 그는 이와 같은 적자 재정 정책이 잠재적으로 심각한 두 가지 문제를 불러올 수 있다고 언급합니다. 먼저, 사실상 완전 고용 상태에서 ‘나랏빚’을 갚지 않은 채 정부가 지출을 지속적으로 늘려 가면 “통화 가격이 상승하는 경향이 강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플레이션이 만연해질 수 있다는 것이죠.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금리와 연관이 깊습니다. 본질적으로 나라의 부채가 증가하는 것은 문제가 없을 수 있습니다. 적어도 시장에서 정부의 ‘과도한 나랏빚’을 문제 삼지 않을 때까지는 말입니다. 하지만 시장이 정부가 지고 있는 ‘과도한 나랏빚’을 문제 삼기 시작하면 시장의 신뢰는 빠르게 무너지고 금리가 매우 큰 폭으로 상승할 수 있습니다. 금리가 빠른 속도로 높아지면 정부의 부채 리스크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겠죠. 말 그대로 정부가 이자를 갚기 위해 또 다른 ‘빚’을 져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3년여 간의 팬데믹 기간 동안 수많은 나라들은 적극적으로 빚을 내 국민을 지원하고 나라 살림을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바로 그 ‘빚’이 부메랑이 돼 돌아오고 있습니다. 이들 정부가 막대한 빚으로 인해 부도가 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 선진국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이미 미국·영국·일본 등이 그 ‘빚’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들의 ‘천문학적인 빚’이 향후 글로벌 경제에 미칠 영향 또한 주시해야 할 때입니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