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서양식 건축물…현대적 감성 느낄 수 있어

궁 안에서 만나는 식물원, 창경궁 대온실[MZ공간 트렌드]
봄이 오기 전이 가장 춥다고 했던가. 찬바람을 잠시 피할 여유를 창경궁 안에서 찾았다. 바로 한국 최초의 서양식 식물원 대온실이다. 현대에 와서 만들어진 공간이라고 오해할 만큼 세련됐지만 사실 대한제국 때 만들어진 오래된 건물이다. 이 특별함 때문일까. 많은 이들이 온실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추운 겨울과 따뜻한 봄, 두 계절을 품은 특이하고 매력적인 공간이 아닐 수 없다.
최초 서양식 식물원
혜화역으로 나와 서울대병원 뒤쪽으로 걷다 보면 창경궁을 만날 수 있다. 창경궁은 1418년 왕위에 오른 세종이 생존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궁이다.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킨 만큼 창경궁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임진왜란(1592) 때는 궁이 불에 탔고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으로 또다시 소실됐다. 창경궁은 여러 복원을 거듭하며 궁궐로서의 위상을 지켜 왔다. 하지만 1907년 순종이 즉위하면서 크게 훼손되는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 순종은 즉위 즉시 거처를 덕수궁에서 창경궁 바로 옆의 창덕궁으로 옮겼고 일제는 그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창경궁의 전각을 헐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었다.

창경궁의 대온실은 그때 지어진 식물원으로, 일제가 조선 왕조의 격을 떨어뜨리고 놀림거리로 만들기 위해 만든 것이다. 궁내 전각 60여 채를 헐어낸 자리에 일본식 건물을 만들고 벚꽃을 심었다. 또한 일제는 창경궁의 명칭을 창경원이라고 이름을 바꿔 격하시킨 다음 일반 시민에게 개방했다.

그런 창경궁은 광복 40여 년이 지나서야 옛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1984년 창경궁 복원 계획에 따라 대온실과 창고를 뺀 부속 건축물은 철거되거나 과천대공원으로 옮겨졌다. 벚나무들은 여의도 윤중로로 옮겨 심어지며 지금의 모습을 조금씩 갖춰 나간 것이다.

궁 안에서 만나는 식물원, 창경궁 대온실[MZ공간 트렌드]
내부 중앙 연못에는 잉어가 헤엄치고 있다.
궁에서 만나는 서양식 건축물
창경궁으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걷다 보면 커다란 호수 춘당지를 마주하게 된다. 호수를 자세히 보면 잉어가 다니는 것을 볼 수 있고 그 주변에는 어슬렁거리는 고양이들도 만날 수 있다. 특히 고양이들은 사람들이 익숙한지 카메라를 들이밀어도, 가까이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는다. 창경궁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여기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이곳이 궁이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하얀색 목조 건물인 대온실을 마주하게 된다. 대온실의 지붕 용마루에는 조선 왕실의 문양인 오얏꽃으로 장식했고 대온실 앞에는 르네상스풍의 분수와 미로식 정원이 조성돼 있다.

대온실의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서면 한가운데 연못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이를 중심으로 좌우를 둘러보면 온실은 식물들로 가득 차 있다. 이곳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식물은 동백나무인데, 겨울에 빛을 발하는 식물답게 동백꽃은 붉은 꽃을 자랑스럽게 뽐내고 있었다. 벽면에는 속새과 식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마치 대나무를 축소시켜 놓은 듯한 자태가 인상적이다. 또한 귤나무인지 착각하게 만드는 금감나무가 향긋한 봄내음을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이를 비롯한 70여 종이 넘는 식물들이 푸른 자태를 뽐내며 봄을 가득 품고 있었다.

창경궁 대온실은 최근 2017년 또 한 번 복원 공사를 했는데 이는 1년 3개월간의 대장정이었다. 특히 타일 철거 과정에서 대온실 최초 준공 시 사용된 영국제 타일 원형을 발견했고 이를 복원하는 데 힘썼다.
궁 안에서 만나는 식물원, 창경궁 대온실[MZ공간 트렌드]
온실 내부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아름답고도 신비한 온실 속으로
2004년 2월 6일, 대온실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대한제국 말기에 도입된 서양 건축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을 인정받은 것이다. 등록문화재는 문화재 보호 방법의 다양화를 통해 근대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근대사의 기념이 되거나 상징적 가치가 있는 것, 지역의 역사·문화적 배경이 되고 가치가 널리 알려진 것, 기술 발전이나 예술적 사조 등 시대를 반영하는 데 가치가 있는 것 등을 기준으로 지정된다.

대온실은 생김새부터 탄생 비화까지, 일반 궁들과는 다른 가치를 갖고 있다. 치욕스러운 과거를 기억하는 동시에 아름다움을 느껴야 한다는 점이 특이하다고나 할까. 마치 겨울에도 광선·온도·습도 등을 조절해 각종 식물을 재배할 수 있는 온실의 성격처럼 말이다.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의 가치가 혼재돼 있어 이곳에서는 감탄과 슬픔 그 어딘가의 오묘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꽤 춥고도 기나긴 겨울을 끝으로 창경궁 대온실은 봄맞이를 준비 중이다. 3월부터 본격적인 야간 개장을 앞두고 있다. 밤에 궁을 산책하다 만난 이 특이한 서양식 건축물이 꽤나 특별한 봄밤 나들이를 선사해 줄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이민희 기자 minhee@hankyung.com